(4) 하나조노 여관
"리사, 아직 멀었어?! 여기도 위험해!"
팔이 백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느날부턴가 갑자기 흰 천막으로 실려오는 부상자가 많아졌다.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앞으로 옆으로 피를 쏟으며 죽을 지경까지 이른 사람들이었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외우던 주문이었으나 기력이 부족해 정신이 아득해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옆에 차고 있는 거무튀튀한 액체를 마시면서 에너지를 보충했다. 매일 주문을 외우고, 회복제를 써서 억지로 체력을 회복시키고, 다시 주문을 쏟아내다가 어지러워서 쓰러지기 직전에 다시 회복제를 마셨다.
그러나 그렇게 기를 써도 환자들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오는 탓에 리사는 점점 지쳐갔다. 희망의 상징이었던 흰 천막은 모험가들의 피로 물들어져 점점 붉은 천막이 되어가고 있었다.
"잠시만요! 지금 가요!"
막 한 환자를 재운 리사가 다른 환자를 향해 뛰었다. 피를 토하고 있는 환자들 사이로 지나갈 때마다 제발 살려달라며 차가운 손들이 덥석덥석 잡아왔다. 그러나 먼저 오는 순서대로 치료를 해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깜짝 놀라는 건 둘째치고 그들을 밀어내야 한다는 죄책감에 억눌려 차마 손을 내치진 못하고 잡히는 대로 앞으로 꾸역꾸역 나아갔다. 옷이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리사가 환자에게 도착했을 때 이미 환자는 눈이 뒤집히고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옆구리에 무언가에 베어 물린 듯한 큰 구멍이 나있었다. 리사는 손에 잔뜩 묻은 피를 식염수로 닦아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환자는 가망이 없어요..."
"그래도 살려야죠! 저도 도울테니까, 얼른!"
리사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신입 신관이 환자의 상처부위에 손을 대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상처 부위가 초록색으로 빛나며 조금씩 치유되고 있는 듯 했다. 리사도 하는 수 없이 그 사람을 따라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환자는 더욱 경련을 일으키더니 피 한덩이를 뱉어내고는 축 늘어졌다. 무리한 치료로 상처부위가 터져 리사와 신입 신관의 몸에도 피가 잔뜩 튀었다. 신입 신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았다. 리사의 손은 힘없이 밑으로 처졌다.
살릴 수 없댔잖아. 이 사람은 죽을 운명이었던 거야. 귓가에 울리는 환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꼭 좀비들이 다가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대로 있다간 뜯겨먹힐 것만 같다. 리사는 끔찍한 소리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얼굴에 잔뜩 튄 피를 대충 훔쳐내고 신입 신관을 따라 주저앉았다. 축축한 피가 흐르는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리 치료해도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협회에 가입하면서 다짐했던 당찬 포부는 환자들의 무덤 밑으로 끌려들어가 함께 피로 물들어버렸다.
"리사, 리사! 이쪽 환자도! 어서!"
동료들의 외침을 밀어냈다. 더이상 회복제도 듣지 않는다. 일어날 힘이 없다.
죽여주세요. 차라리. 제발. 리사는 그 날 처음으로, 신에게, 자신의 죽음을 기도했다.
"...이마이 씨."
덜컹거리는 와중에 잘 자네. 사요는 멀거니 리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아 가녀린 어깨를 몇번 두드렸다. 그러나 끙끙대는 소리만 낼 뿐 좀처럼 일어나질 않는다. 아무래도 새벽 일찍 출발한 건 조금 무리였을까. 이번에는 두 어깨를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이마이 씨."
리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더 앓는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눈을 번쩍 떴다. 그 모습에 사요도 덩달아 놀라 리사의 어깨에서 손을 놓고 조금 떨어졌다. 리사는 사요에게 시선을 못박아둔 채로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흑, 흑, 하면서 얼굴이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어딘가 이상하다. 다시 리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어디 안 좋아요?"
"흑, 힉...."
"숨, 숨이 안 쉬어져요?"
목을 움켜쥐면서 대답도 못하고 있는 걸 보니 숨이 안 쉬어지는 모양이었다. 잘 자다가 느닷없이? 사요의 손은 어찌할 줄 모르고 허공을 휘저었다. 리사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사요의 팔을 쥐었다. 살려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사요는 리사의 어깨를 꽉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요!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잘 자놓고 왜 그래요? 혹시 악몽 꿨어요?"
"......흐윽..."
"그건 환상이에요. 이마이 씨는 지금 꿈 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고요. 꿈에서 깨요, 어서!"
호통치는 목소리에 리사가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사요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밑으로 푹 숙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소리가,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조용히 깨어났다. 눈에 띄게 숨소리가 가라앉자 리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 맽혀있었다.
"아... 미안해요. 악몽을 꿔서..."
그제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와 돼지의 여물이 한 켠에 조금 쌓여있고, 딱딱한 나무바닥이 심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위에는 노란 천막으로 씌운 천장이 흔들렸다. 새벽에 집에서 나와 시내에 가기 위해 지나가던 마차에 얻어 탔었다. 옷과 먹을 것을 사기 위해 가장 먼저 정한 목적지가 시내였다.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느낌에 발 끝에서부터 쫙 소름이 끼쳤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두 손이 사요의 어깨에 손이 올라가 있는 걸 보고는 급하게 떨어졌다.
"미, 미안해요!"
"...미안한 것도 많네요."
되려 사요는 무심하게 넘어갔다. 딱히 웃지도 않고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혹시 악몽 자주 꾸나요?"
"...가끔..."
"간밤엔?"
"간밤이요? 아... 어젯밤이요? 어제는 괜찮았는데..."
마치 검증이라도 하듯이 사요의 눈이 지그시 리사에게 향했다. 거짓말을 한게 아님에도 리사는 어쩐지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마차가 우뚝 멈췄다. 아무래도 목적지에 다 온 모양이었다. 사요가 먼저 일어나 훌쩍 마차에서 내리고, 리사도 허둥지둥 따라 내렸다. 마차 주인에게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사요는 멀찍이 떨어져서 리사가 마차 주인에게 말을 걸며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그런 불쌍한 표정을 짓다니. 어쩐지 조금 안쓰러워졌다. 자신이야 사람을 찾고 복수를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목표가 없는 삶이고 카타콤에서 상처를 받은 일도 없으니 그런 표정을 지을 일 또한 없었다. 리사가 죽여달라고 한 말이 이제서야 어느정도 납득이 되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다. 아직은 활동을 같이 하는 동료로서 조금 섬뜩한 생각이지만 어떻게 죽여야 원한 없이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생각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게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리사가 마차를 보내고 사요에게 다가가면서 아무렇지 않게 미소지었다.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요? 낯 가려요?"
"...혹시라도 제 얼굴을 기억해서는 안 되니까 방어를 하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갈까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앞서가는 모습에 사요는 살짝 뒤틀린 마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안쓰럽다는 생각은 취소해야겠다.
조금 걸으니 곧 사람이 북적북적한 시장이 나왔다. 쭉 이어진 통로를 따라 잡상인들이 줄지어 자신의 물품을 팔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사요는 잠시 귀를 막았다. 발걸음을 옮기기 싫어졌다. 죽여라! 뭐하냐, 약해 빠져가지고! 사지를 갈갈이 찢어서 죽여! 목을 따서 비틀란 말이야! 듣기 싫은 소리처럼 귓가를 마구 멤돌았다. 시선은 오갈 데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필 여기서 카타콤이 생각날 게 뭐람.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아, 그렇지. 그 곳은 원래부터 감옥이었다. 살인감옥.
리사가 어느정도 앞서가다가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 뒤를 돌아보았다. 사요는 귀를 꽉 막은 채 우왕좌왕하는 하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가서 부드럽게 그 팔을 잡았다. 사요가 더듬더듬 시선을 옮겨 간신히 리사를 바라보았다.
"가요."
"...혼자 다녀오면 안 될까요?"
"무서워요?"
"저는 여기 있을 테니까. 괜찮아요."
리사의 목소리마저 들으려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리사는 잠시 한숨을 쉬다가 팔을 더 꽉 쥐며 잡아당겼다. 귀를 꽉 막고 있던 한쪽 손이 떨어져나갔다. 급하게 다시 막으려고 했지만 리사는 의외의 악력으로 사요의 팔을 놓지 않았다.
"아까 저한테 꿈에서 깨어나라고 외친 사람이 누구였죠?"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
"깨어나세요. 지금 악몽 꾸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안 가면, 평생 이런 큰 길은 가지도 못할 거예요. 그렇게 겁쟁이로 살아도 좋아요? 매일 무언가에 쫓기면서 좁고 퀘퀘한 냄새가 나는 길로만 다닐 건가요?"
"글쎄, 악몽이랑 이거랑 다르다니까요. 이건 엄연한 현실이잖아요."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내려가더니 손을 꽉 잡았다. 사요는 움찔하면서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도저히 빠지질 않았다. 내가 힘을 쓸 일이 훨씬 많았을 텐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사요의 상식으로는 깡마른 체구에서 이런 힘이 나올리 만무했다. 이것 역시 신의 힘이라면 몰라도.
손과 손이 맞닿자 어느정도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귀를 꽉 막고 있던 반대쪽 손도 내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다. 만약에 어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리사가 빙긋 웃으면서 한걸음씩 내딛자, 사요는 마치 걸음마를 떼듯이 조심스럽게 리사를 따라갔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놀라면서 조금씩 몸을 피하긴 했지만 어느새 수많은 사람 무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요가 조금씩 마음을 진정하는 사이에 리사는 적당한 옷가게를 골랐다.
"아, 저기 예쁜 옷 많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부터 엄청 추운 데에서나 입을 법한 묵직한 옷까지 굉장히 다양한 옷을 판매하고 있는 가게였다. 가게에 들어서자 점원이 활짝 웃으면서 두 사람을 반겼다. 사요는 처음보는 옷들과 낯선 풍경에 짓눌려 입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리사는 어느새 사요의 손을 놓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대보고 있었다.
"이런 건 어때요?"
목소리를 따라 멍한 시선을 옮기자, 리사가 조금 짧은 치마를 대보고 있었다. 사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옷은 모험가에게 불필요합니다."
"예쁘긴 한데~ 그렇겠죠? 사요 씨도 옷 골라봐요. 제가 사줄 게요."
괜찮습니다-, 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사요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햇빛을 받아 여기저기 반짝이고 있는 갑옷이었다. 오른쪽 어깨와 가슴 부분에 단단한 강철이 둘러져있고, 전체적으로 푸른 빛깔이다. 무릎 위까지 오는 스커트 유형의 갑옷으로, 다리는 까만 타이즈에 정강이 부분과 발 전체적으로 강철을 두른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걸리적거리지 않고 적당히 움직일 수 있겠다. 한번 들어보니 아무래도 무거운 소재로 이루어져 있어서 움직였을 때 어떤 모습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입어볼래요?"
바로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하마터면 갑옷을 떨어뜨린 뻔 했다. 옷을 꼭 그러안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요를 보며, 리사가 빙긋 웃었다.
"입어보셔도 돼요."
점원이 이쪽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사요는 리사를 빠르게 스쳐지나가 종종걸음으로 점원이 안내하는 곳에 들어갔다. 사요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리사는 팔장을 끼며 옷 구경하는 것도 잊고 사요가 나오길 기다렸다. 5분, 10분. 15분이 다 될 때까지 사요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옷을 만들어서 입고 나오나? 리사가 문을 두드렸다.
"사요 씨? 안에 있어요? 죽은 거 아니죠?"
그러자 좁은 문 틈 사이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뇨... 그게... 다 입었는데...."
"그럼 나와봐요~ 잘 어울리는지 봐야 살 테니까."
"안...어울리는 것 같아요..."
한숨.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빨리 나와요~ 안 나오면 놔두고 가버릴 거예요!"
이상한 데에서 겁이 많은 사람이다. 조금 더 기다리니 문이 서서히 열렸다. 오후 햇살이 강철에 부딫혀 강한 빛 그대로 반사되었다. 리사는 눈을 잠시 감으면서 조금 물러났다. 철컥, 철컥 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소리는 바로 앞에서 멈췄다.
"이마이 씨?"
부르는 목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눈 앞에는 청색의 기사가 서 있었다. 정의를 위해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갈 것만 같은. 온 몸이 무서져도 칼 하나에 의지해 기어코 적장을 베어버리고 마는. 용기에 살고 용기에 죽는, 위태롭고도 쓸쓸해보이는 기사. 현실은 아니지만. 리사가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와, 정말 잘 어울리는데요?"
"....농담 아니죠?"
"정말! 멋져요. 이제야 좀 인물이 사네. 역시 옷이 날개라니까요?"
일단 칭찬일색이니 사요도 뿌듯해져 어깨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니 과연 옷이 분위기를 바꿔주었다. 카타콤에서는 칙칙하고 방어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마냥 무겁기만 한 갑옷을 입었었는데. 그 때보단 많이 가볍지만 제대로 된 방어구도 있으니 한결 안심이다. 강철을 주먹으로 두드리니 탕탕, 하는 듬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리사를 바라보았다. 리사는 자신의 일인양 정말 기뻐보였다. 사요도 조금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리사처럼 웃으면 기운이 생길 줄 알았는데. 어쩐지 조금 힘이 빠지는 것 같다.
"아대도 있으니까 차보세요."
마지막으로 똑같은 강철로 된 아대를 차니 완벽하게 한 세트가 되었다. 이전까지 입고 있던 옷의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쥐고, 왼쪽 팔에 키메라를 차니 더욱 완벽해졌다. 리사는 벌써 지갑을 꺼내고 있었다.
"이걸로 하나 주세요."
"잠, 잠시만요."
"사양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없는 몸인 거 다 알거든요? 나중에 약속한 것만 잘 지켜주세요."
어차피 죽게 되면 다 필요 없어질 테니까. 리사는 아낌없이 돈을 꺼내들었다. 그동안 흰 천막에서 일한 보수로 모아두길 잘했다. 묵직했던 주머니가 조금 가벼워졌다. 리사의 마음도 조금,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리사는 자신의 옷을 고르지 않았다. 사요는 갑옷을 받은 게 조금 미안해서 봐줄테니 한 벌 골라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게 다문 입술과 앞만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어쩐지 생각을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요가 보기에도 리사는 조금씩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것 하나 남김 없이, 훌훌 털어보내고는, 떠날 마지막을.
분명 전에 입었던 갑옷 보다는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갑옷을 입어버렸다.
조금 어둑해지고, 슬슬 잠자리를 찾아야할 때가 왔다. 사요는 익숙하게 나무 위에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사는 자연스럽게 상인에게서 산 지도를 펼쳐들었다.
"여관에서 잔다고요?"
"저는 사요 씨처럼 원숭이가 아니라서 나무를 못타거든요~"
"또 돈을..."
또 돈을 쓰려는 거냐며 막으려다가, 집중하느라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리사의 모습을 보며 나오려는 한숨을 참았다. 그렇게 죽는 게 좋다면야. 여기서부터 도와주는 게 좋겠지. 사요도 옆에 달라붙어 함께 여관을 찾았다. 옆에 끼쳐온 작은 바람에 리사는 여전히 지도를 짚어보면서 미소지었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짐작하는 게 어려웠지만 그 뒤로는 착착 진행되었다. 때마침 가까운 곳에 여관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여관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숨을 삼키면서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주변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고 커다란 울타리가 둘러져있었으며, 그 안에 여관이 있었는데 여관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저택 같은 벽돌집이었다. 게다가 ㄴ자로 길게 뻗은 외벽에는 괴상한 그림들이 그려져있었다. 하얗고, 두 귀가 길며, 짜리몽땅한 꼬리가 그려져있는 괴생물체가 온 벽을 뒤덮고 있었다.
"...공포 체험관은 아니겠죠?"
"그러게요, 아하하... 여관...이 맞을 텐데... 지도에도 그렇게 써져있고."
"금방에라도 옆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사요가 조근조근 혼잣말을 뱉다가 품 안에서 재빨리 단검을 꺼내들고 키메라를 치켜들었다. 방금 옆에서 섬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마물을 상대해온 사요에게 그런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이었다. 리사는 깜짝 놀라면서 사요 옆에 바짝 붙었다. 사요는 겁을 주거나 장난을 치려고 함부로 전투태세를 갖출 사람이 아니다.
"무, 무, 무슨 일 있어요?!"
여차하면 키메라를 키울 주문을 외울 참이었다. 사요는 계속 어두운 숲 쪽을 주시했다. 한참의 정적. 인기척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은 너무 잠잠했다. 한동안 전투를 안했더니 감이 떨어졌나. 사요는 단검을 조금 내렸다. 여관으로 들어가자고 하려던 찰나, 뒤늦게 뭔가가 튀어나올 것이라는 예감이 적중했다. 덤불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확 튀어올라 하늘을 날았다. 사요는 주문을 외워 키메라를 키우고는 그 밑에 수그리고 리사를 끌어당겼다. 리사는 소리지를 생각도 못하고 잽싸게 키메라 밑으로 바짝 웅크렸다.
"몸 최대한 숙여요!"
그렇게 외치지 않아도 이미 숙이고 있거든요. 리사가 떨면서 눈을 꽉 감자, 동시에 카캉,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키메라를 꽂은 땅이 움푹 패일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곧이어 지탱하고 있던 힘이 조금 느슨하게 풀리자 사요는 키메라를 그대로 자신의 팔에서 떼어냈다.
"이 밑에서 꼼짝도 말고 있어요. 금방 올 테니까."
"아, 저기!"
리사가 사요의 팔을 붙잡았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사요는 리사의 손을 떼어내면서 키메라를 짚고 앞으로 나섰다. 사요가 순식간에 지나쳐가자 리사는 허공에 뿌리쳐진 손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벌벌 떨린다.
"누구시죠? 직접 대결을 신청하지도 않고, 무례하네요. 기습은 예의가 아닌 거 모르시나요?"
상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 앞에 검은 그림자는 보이는데. 그 사이에 어둠이 너무 짙어졌다. 사요는 단검을 어둠 속으로 겨누었다. 키메라에 닿았을 때의 묵직한 정도를 생각해보면 상대의 무기는 대검이나 도끼 같은 종류일 것이다. 단검으로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단번에 목을 찔러 숨통을 끊는 것이라면 자신 있으니까. 무기가 크다고 해서 무조건 강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들 수 없는 거대한 무기를 든 마물도 얼마든지 처치해 보였던 사요였다.
다시 상대가 움직였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무기는 대검이었다. 납작하고 말 그대로 거대한 대검이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달려들었다. 단검으로 내치기엔 역부족이다. 최대한 피하면서 밑을 노릴 작정이었다. 무릎을 한번 베어내고, 주춤하는 사이에 목에 칼을 찔러넣는다. 그 한순간의 타이밍이 중요하다. 절대로 중심을 잡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여러번 반복되는 패턴을 간단하게 피하다가, 하체에 빈 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순간. 사요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단검이 무릎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호- 재밌다!"
무릎을 베어내기 직전, 상대가 경쾌하게 웃었다. 밝지만 어쩐지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 웃음에 압도된 사요는 무릎을 베지 못했다. 칼날이 무릎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고, 상대와 방향이 엇갈렸다. 고작 웃음소리에. 한심하다. 이렇게 된 김에 잠시 멀리 떨어져서 움직임을 살필 작정이었다. 때마침 상대도 잠시 쉴 생각이었는지 사요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덕분에 얼굴이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와~ 이런 상대는 처음이야! 죽지 않아줘서 고마운걸?"
"...무슨...?"
"자, 또 간다?"
또 온다. 다시 몸을 낮게 수그리며 단검을 겨누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오는 게 아니었다. 멀찍이서 상대방이 조금 꿈지럭대더니 몸을 뒤로 젖혔다가 크게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대검.
말도 안돼, 대검을 던진다고? 이 거리에서? 그러나 그 이상으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대검은 순식간에 코앞까지 끼쳐왔다. 당황한 나머지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리를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로 대검이 두뇌를 뚫을 텐데...
"피해요, 제발!"
어둠을 찢을 듯한 목소리가 사요의 두뇌를 먼저 찔렀다. 간신히 온 몸의 신경세포가 반응하기 시작해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대검은 아슬아슬하게 머리 옆으로 비껴가 땅에 박혔다.
분명 리사의 목소리였다. 사요는 긴장감에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키메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잘 웅크리고 있으라고 말했는데. 리사는 키메라에서 나와 몸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인질로 잡혔다간 큰일이다.
"어서 들어.."
"그쪽 신경쓰면 안 될텐데."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상대는 사요의 배를 강타하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사요는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한 숨을 뱉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대검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웬만한 마물은 주먹으로 그냥 쓰러뜨릴 것 같은 힘이었다. 단 일격에 이렇게 쓰러져본 적도 참 오랜만이다. 그렇게 누워있으니 생각이 조금 정리가 되었다. 총사령관이 벌써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알아냈구나. 그리고 사람을 보냈겠지. 이제 여기서 죽는다. 눈을 감았다. 배가 뚫릴 듯이 욱신거렸다. 조금만 더 올려쳤으면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힘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아니, 혹시 사람이 아니라 마물 아닐까.
"...%$#@#$$^%@$^%*@!@*"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고요해졌다. 상대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기에 눈을 떴다. 상대는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 얼굴을 식별해냈다. 시선은 키메라 쪽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리사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고 합장을 하고 있었다.
"...이마이 씨?"
"벌써 쓰러질 거예요?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리사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입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닦아내고 보니 피였다. 몸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그런데 이상한 주문이 귀에 흘러들어오니 어쩐지 조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주먹을 쥐어보았다. 다리를 움직였다.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꼼짝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몸인데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사요가 일어서니 리사의 주문이 멈췄다.
"오- 내 주먹을 맞고 일어난 사람은 네가 처음인데?"
상대가 다시 웃었다. 사요는 어리둥절했다가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쓰러지면서 단검은 날아가버렸다. 이제부터는 주먹질인가. 그런데, 사요가 주먹을 들어올리자 상대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흥미 없어. 우리 여관에 자러 온 거지?"
...흥미가 없다고? 아니 그 전에. 조금 힘빠지는 말이 들렸던 것 같은데.
"우리... 여관?"
"응! 여기 내가 하는 여관인데? 하나조노 여관."
어둠 속에서 상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 커다란 눈, 그리고 마냥 싱글생글 웃고 있는 입술. 조금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 사요는 여전히 주먹을 들어올린 채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시죠. 여기가 왜..."
"오타에 이 자식아~!"
사요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노란색 양갈래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모양새가 꽤나 거칠다. 사요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오타에라고 불린 상대가 고개를 앞으로 확 숙였다. 인사라도 하나 싶었더니 노란색 양갈래 머리 여자가 상대의 뒤통수를 갈긴 모양이었다. 뛰어온 새로운 상대가 씩씩대다가 옆에 떨어져있던 단검을 주워 사요에게 건네주며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이 자식... 아니, 제 친구가 무례를 범했네요."
"...친구....?"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사요는 일단 단검을 받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 뒤통수를 맞은 사람은 아프지도 않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키메라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흥미로운 것이라도 본 듯이 목소리를 늘였다.
"아... 저 사람 쓰러지는데?"
무슨 소린가 했다가, 순간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라 사요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고보니 리사가 있었다.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상대의 말대로 리사는 천천히 키메라에 기대더니 몸을 웅크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요는 헐레벌떡 달려가 리사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정신 차려요!"
"...괜찮아요..."
리사는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거리더니 거무튀튀한 회복제를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뚜껑을 따서 마시는 입술마저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절반 쯤 마시고는 조금 안정이 되었는지 사요 쪽으로 몸을 늘어뜨렸다. 사요는 얼떨결에 리사를 끌어안고 최대한 버텼다.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너무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이, 일단 안으로 들이시죠. 모시겠습니다."
양갈래 머리가 자신을 여관 관계자라고 소개하면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주문을 외워 키메라를 원상태로 복귀시킨 뒤에 팔에 차고서는, 리사를 업었다. 문득 시선을 옮긴 자리에 작은 명찰이 달려있었다. 흘끗 가슴에 달린 명찰을 바라보았다. '이치가야 아리사'라고 써져있었다.
"너도 와야지, 뭐하냐?"
"아리사~ 화났어?"
오타에라고 불린 사람이 아리사라는 사람 옆에 바짝 붙었다.
"너 때문에 손님 다 끊긴다고~ 하여간 진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아리사 옆에 더 바짝 붙던 그녀는, 뒤에서 따라오는 사요를 흘끗 바라보더니 웃었다.
"그건 들어가서 말해줄게."
어쩐지 더욱 불쾌해졌다. 사요는 자꾸만 늘어지려는 리사를 계속 들춰가면서 부지런히 아리사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저 오타에라는 사람은 당분간 조금 경계해야겠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 여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문이 열리고 레드카펫이 먼저 사요와 리사를 반겼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여관 안으로 입성했다. 사요는 리사를 바짝 들춰업으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쉬게 해줄게요. 조금만 참아요. 리사는 사요의 등에 엎드려 얕게 숨을 내쉬었다. 대답은 하지 못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