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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마사쿠]아름다운 핑계

향유동화 2016. 1. 1. 02:15
딸깍, 문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왔다. 살며시 눈을 떴다. 여전히 숨이 뜨겁고 가슴이 답답하다.

"혼자 괜찮겠니? 같이 가는게 좋을것 같은데."

히마와리가 뜨거운 숨을 참으며 애써 웃었다.

"괜찮아요. 염려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1년에 한번 뿐인 해돋이인데..."
"이러다가 늦겠어요, 얼른 출발하세요."
"...그럼 얼른 다녀올게. 조금만 쉬고 있어, 응?"

카에데가 부모님 뒤에서 걱정스럽게 건너다보았다. 히마와리는 몸을 살짝 일으켜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착한 카에데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문이 닫히고, 적막한 공기 속에서 다시 이불을 턱 밑까지 덮었다. 두 겹이나 덮었는데도 춥다. 새해에 감기라니... 무슨 액땜을 하려고 이리도 독할까.
기운이 없어서 조금씩 잠이 오려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누구지? 평소 같았으면 긴장해서 몸을 움츠렸겠지만 힘이 없어서 그런지 문 쪽을 바라보는 것도 힘들다.
검은 그림자가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이마에 올려진 수건에 손을 대본다.

"와... 뜨겁네. 갈아줘야겠는데."

그리고는 수건을 빼앗아들고 나가버린다. 정신이 몽롱해져서 멍하게 있는데, 곧 차가운 수건이 머리 위에 얹어진다.

"액땜 하겠는데? 축하해, 히마와리."
"...에...예....?"
"병든 닭처럼 그러고 있냐? 나야 나!"

얼굴이 불쑥 다가온다. 바로 코앞까지 숨결이 닿는다. 그렇게 말해도 캄캄해서 보이질 않는걸요. 속으로 한마디씩 어렵게 뱉자, 침대 옆에 있던 스탠드가 켜진다. 은은한 주황빛이 갑작스러운 행인의 얼굴을 비춘다.

"사...사쿠..."
"오오무로 사쿠라코 님이시다. 하필 심부름 가고 있는데 너네 부모님을 만났지 뭐야."

사쿠라코가 못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품에 안은 검은 봉투가 뽀시락댄다.

"매년 해돋이 보러 간다고 연락이 오던 앤데 어쩐지 오늘따라 없다 했더니 감기냐?"
"......가족들은 어쩌고...."
"다같이 코타츠에 모여있는데 나보고 먹을걸 좀 사오래서. 참내. 이런건 원래 막내가 해야하는거 아니야?"

둘째의 서러움이란. 첫째는 첫째라 안되고 막내는 막내라 안되니 언제나 둘째가 다 도맡는다. 둘째의 서러움을 알 리가 없는 히마와리는 다시 꿈뻑꿈뻑 졸고 있다.

"야, 야."

사쿠라코가 짓꿎은 손가락으로 히마와리의 볼을 꾹꾹 눌렀다. 많이 뜨겁다. 아프긴 아픈가보네...

"...예...?"
"너 아픈데 괜히 왔나보다. 푹 쉬어. 나 간다?"

부스럭, 비닐봉지를 챙겨들었다.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려는데 히마와리의 손이 사쿠라코의 소매 끝을 간신히 붙들었다.

"왜?"
"저... 잘때까지만..."
"가족들 기다려. 음식 식는단 말이야."
"....."

히마와리가 눈살을 찌푸린다. 사쿠라코는 혼란스럽다. 이렇게 고집이 센 아이였나? 오늘따라 왜 이러지?

"아, 정말... 어쩔 수 없네."

조금만 더 있다 가기로 했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는데 이번에는 사쿠라코의 손을 잡아 끈다.

"뭐, 아까부터 왜 그래?"
"재워주세요..."
"아기냐? 약 먹더니 이상해진거야?"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얼른 재우는게 좋을것 같다는 생각에 히마와리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쓸어주었다.

"올 한해... 수고 많으셨어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너도."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나도."

히마와리가 다시 눈살을 찌푸린다. 아, 대충 대답해서 빈정 상했다는건가? 이럴때는 참 어린애다. 사쿠라코가 혀를 차면서 손을 거두고 침대 끄트머리에 누웠다. 히마와리가 몸을 움직이더니 사쿠라코를 바라보는 쪽으로 돌아누웠다. 수건이 옆으로 쏠려 흘러내린다.

"밉네요 정말."
"집에 안보내주는 너가 더 밉거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음?"

사쿠라코도 돌아 누웠다. 열 때문인지 히마와리의 얼굴이 많이 상기되어있다.
오라는 잠은 안오고 어쩐지 정신만 더 멀쩡해진다. 히마와리는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서 사쿠라코 쪽으로 천천히 뻗었다.

"깨있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만 자."
"....."

뜨거운 손이 톡, 사쿠라코의 볼에 닿았다. 술에 취한게 이런 기분일까. 붕 떠있는것 같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쿠라코의 얼굴은 스탠드 빛을 등지고 있어서 어둡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입술이 꿈쩍댄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좋아해요."
"어, 나도.... 뭐?!"

볼에 닿았던 손가락이 스르르 미끄러져서 사쿠라코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야, 너... 야."
"....."

히마와리는 그새 눈을 감고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봉투에 든 음식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었고 어둠에 익숙해진 동공 가득 살포시 눈을 감고 있는 히마와리가 보였다.
사쿠라코는 몸을 조금씩 움직여서 히마와리의 이불을 들춰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휴, 정말...."

흘러내린 수건을 멀리 치우고 대신 손바닥으로 상기된 볼을 살짝 감쌌다.

"그런 말은 멀쩡할때 해."

이마를 살짝 맡대었다. 히마와리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이 포근하다.
히마와리는 항상 핑계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저지른다. 장난인건지 진심인건지 매번 마음 졸이는 것도 참 힘들다.

"돌아오는 새해에는... 조금만 더 용기 내보라고. 알겠어?"




-Fin.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