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마사쿠]피그말리온 효과-01
*본 팬픽은 원래 캐릭터 설정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것을 즐기게 된 지도 벌써 4년에 접어들어가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살짝 끼어있는 뜨거운 담배가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만나 연기를 꾸역꾸역 내뱉었다.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떨리는 볼펜으로 가위표를 했다. 오늘도 실패.
니시가키가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본래 사람이란 자신이 이룬 업적을 기억해내기 마련이다. 아무리 실수였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틀마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대체 뭔지."
담배를 바닥에 짓이겼다. 이제는 알바를 구해야 하나. 그동안은 니시가키와 함께 적당한 연구 업적을 이루며 상금을 타고 다녔지만 이제 연구에 진절머리가 난다.
띠링,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문자를 확인하던 사쿠라코가 힘없이 웃었다.
[오오무로 사쿠라코 님, 서른 두번째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어느새 주머니에서 또다른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뿌옇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서른 두살이네..."
네가 없어진지 18년이 조금 넘었다. 18년이나 흘렀지만 아직 그날 그때에 머물러있는 것만 같다.
열 네살, 그 때에.
***
중학교 2학년때 괴짜 과학 선생이 전근을 온 뒤로 학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과학실에도 통 못들어오게 하고, 수업 시간에는 자습을 시키거나 수업을 일찍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과학실에서 과학 선생이 생물을 해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괴담까지 돌았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어쨌든 대부분의 학생들은 과학 선생을 싫어했다. 하지만 과학 시간에는 물품을 가지러 가야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과학실로 찾아가야 하는 인원이 생길수 밖에 없었다. 학우들은 이름 순으로 과학실에 가는 순서를 정했다.
"오늘은 오오무로 사쿠라코."
"네~"
반장이 부르자 사쿠라코는 순순히 교실을 나섰다. 치나츠와 아카리가 사쿠라코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혼자서 괜찮겠어? 위험하지 않을까?"
"에~이, 괴담은 괴담일 뿐이야. 누가 학교에서 해부를 해? 범죄잖아."
"하지만 그동안 과학실에 다녀온 친구들 표정이 좋지 않았는걸..."
"괜찮아 괜찮아!"
사쿠라코가 씨익 웃었다.
"자자, 어서 들어가있어. 오늘 당번은 나니까."
"아... 알겠어. 조심해야해!"
당당함을 빼면 시체인 사쿠라코였다. 늘 아카리와 치나츠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사쿠라코가 딱 한가지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용감해져야 하는 일이었다. 사실 무서운 영화를 봐도, 귀신의 집에 가도, 여유롭게 귀를 후비면서 나올 정도로 간이 크기도 했다.
"진짜 해부를 한다면 한번 보고 싶네, 어떻게 하는건지."
사쿠라코는 해맑게 웃으며 과학실 문을 열었다.
"선생님~ 계세요?"
웬일로 과학실 불이 꺼져 있었다. 곧 있으면 수업 시작할텐데 어디로 가신거지?
"선생님~"
흰 가운이 의자에 걸려있었다. 늘 입고 다니시던건데 왜 오늘은 벗어두셨지?
사쿠라코는 처음 들어가보는 과학실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어두운 가운데 여기저기서 불을 뿜어내는 실험대들. 그 가운데에는 어느 과학실에나 있는 해부된 개구리나 뱀, 물고기도 있었다.
"오오, 신기해, 신기해."
잠시 본연의 임무를 잊고 사쿠라코는 해부된 동물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때, 뒤 쪽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쿠라코는 구경하느라 굽혔던 허리를 쫙 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선생님! 과학 준비물 받으러 왔는데요~"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정말, 숨바꼭질 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쿠라코는 과학실 안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과학실은 꽤 넓었다. 여기저기 먼지가 쌓인 상자들, 검게 그을린 자국, 과연 험한 소문이 돌 만한 곳이었다.
"어!"
바로 옆에 교실이라도 있는건지, 문 하나가 나타났다. 특별 교실은 두개의 교실이 맞붙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사쿠라코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여기 계세요?"
문을 살짝 열자,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다. 눈이 부셔서 살짝 비껴서자 빛은 바닥을 타고 쭉 퍼져나갔다. 마치 물처럼 일렁이는것 같기도 했다.
잠시 망설이던 사쿠라코는 결국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마저 열었다. 눈이 익숙해지자 바로 보이는 것은 형광등이 달린 캡슐이었다.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길게 세워져 있었는데, 알수 없는 기계가 잔뜩 달려있었다.
"오오! 신기해!"
다가가서 캡슐을 만져보니 유리로 되어있었다. 회색으로 칠을 한 것인지 투명하지는 않았다.
"똑똑~ 누구 계세요?"
소리도 좋다. 은은한 종소리를 듣는 것 같다. 재미들린 사쿠라코가 한바퀴 빙 돌면서 계속 캡슐을 두드렸다.
"누구 계세.... 음?"
어느 정도 돌았을때, 회색 벽이 사라지고 투명한 유리가 나타났다. 물이 들어있는 것 같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족관인가?"
시선을 올리는 순간, 밝았던 사쿠라코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어어?!"
어디서 많이 본 물체가 있다. 열개의 발가락, 쭉 뻗은 다리, 웅크리고 있는 허리, 목, 그리고 머리... 분명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 등을 돌리고 캡슐 안에 들어가있었다.
"으, 으, 으...!"
공포라는걸 모르던 사쿠라코였지만 난생 처음으로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소름이 돋았다. 뭐지, 이건? 영화에나 나올것 같은 장면이잖아!
"아, 으, 으, 으..."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뒷걸음을 치다가 발을 헛디뎌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파할 새도 없이 사쿠라코는 또다시 캡슐 안의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몸이 점점 이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길다. 너울너울 미역처럼 춤을 추던 머리카락은 몸이 점점 돌아가면서 숨기고 있던 얼굴을 조금씩 드러내었다.
얼굴이 절반 남짓 드러난 찰나,
"누구냐!"
사쿠라코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과학 선생이 어느새 하얀 가운을 걸치고 사쿠라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저, 준비물 가지러...!"
"준비물을 가지러 왔으면 얌전히 가지고 가야지,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 그게 아니라, 저는..."
"너 이 녀석!"
과학 선생의 뒤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순간 과학실 괴담이 생각났다. 과학실 안에서 누군가를 해부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사, 사, 살려주세요! 아무것도 못봤어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할게요! 해부하지 말아주세요--!!"
과학 선생이 거칠게 사쿠라코의 팔을 잡고 바깥으로 끌었다. 사쿠라코는 엉엉 울면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끌려나갔다.
"어이, 그만 울어."
캡슐이 들어있던 방에서 나오자 과학 선생이 사쿠라코를 놓아주었다.
"누굴 해부한다는거야? 살려달라고? 난 살인마가 아니거든."
"서... 선생님..."
"아아 너, 오오무로 사쿠라코구나? 맨날 내 수업 시간에 조는 녀석."
과학 선생이 사쿠라코의 머리에 꿀밤을 한대 쥐어 박았다.
"악!"
"방금 니가 본거."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요!"
"아니, 말 해도 되는데?"
"...네?"
사쿠라코가 꿀밤 맞은 곳을 어루만지며 어리둥절 과학 선생을 올려다보았다.
"저 캡슐 안에 들어있는 녀석, 내 조수가 될 참이거든. 조만간 완성이 될 것 같은데 가장 처음으로 본게 너라니... 다 완성되고 나면 서프라이즈로 해주고 싶었는데."
"......?"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학교에서 썩을 위인이 아니란 말이야. 그렇지 않니, 오오무로?"
아직도 뭐가 뭔지 파악을 못한 사쿠라코를 두고 과학 선생은 불을 켰다. 사쿠라코가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볼일이 있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앞으로 문 단속을 잘 해야겠어. 뭐, 어쨌든. 너한테만 특별하게 쟤 이름을 알려줄게."
과학 선생이 씨익 웃으면서 허리에 손을 얹었다.
"히마와리. 해바라기라는 뜻이야."
하얀 가운에 대충 찔러넣은 명함이 반짝였다.
니시가키 나나.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