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유루유리

[히마사쿠]피그말리온 효과-11

향유동화 2016. 2. 20. 19:37
*본 팬픽은 기존 캐릭터 설정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어....뭐야."

정신이 조금씩 맑아졌다. 눈을 뜨고 일어나보니 나데시코가 방금 일어난 몰골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리와 어깨가 뻐근하다. 허리에는 이불이 살짝 걸쳐져있었다.

"너 설마 여기서 잔거야?"
"...응?"

놀라며 몸을 일으키고 보니 거실 위의 소파였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났다. 히마와리에게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에 대해 끝없이 실망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던것 같다. 이불은 누가 가져다준거지?

"왜 방에서 안자고? 혹시 히마와리랑 무슨 일 있었어?"
"그런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감싸쥐는데 기지개를 켜며 내려온 히마와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이 시간부터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나보다. 서둘러 시선을 돌리니 히마와리도 부엌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평소와 다름 없는 아침이 시작됐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신없는 아침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히마와리는 밥을 조금 남기고 먼저 일어났다. 끝까지 기다리다가 가족들이 식사를 다 마치면 그때서야 정리를 시작하는 히마와리였는데, 사쿠라코를 제외한 하나코와 나데시코가 놀라며 히마와리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다 먹었어?"
"죄송하지만 오늘 아침 설거지는 조금 늦게 해도 될까요? 도시락은 싸두었으니까 각자 가져가세요."
"으, 으응..."

히마와리가 윗층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동안 사쿠라코는 턱이 아플때까지 힘껏 음식을 씹었다. 아무래도 어제 일은 사과하는게 맞는것 같다.

"나도 먼저 일어날게."
"응?"

식사를 마치고 여전히 놀라있는 나데시코와 하나코를 지나쳐 히마와리를 따라 올라갔다. 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히마와리의 머리카락이 이불 밖으로 빼꼼 튀어나온게 보였다. 바닥에 이불은 치워놓고 사쿠라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려오라고 심술부렸겠지만...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디 아파?"
"...오늘은 휴식이에요."
"음... 있잖아. 어제는... 히마와리."

돌아누워있던 히마와리가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서 자면 어떡해요. 안추웠어요?"
"....응? 어? 어..."
"데려오려고 했는데... 그냥 뒀어요."
"왜?"

히마와리가 몸을 돌려 사쿠라코와 마주보았다. 어제 밤에 그렇게 뛰쳐나가서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길래 거실로 내려갔었다. 소파 위에서 잠들어있는 사쿠라코를 보고 안아올리려고 했는데, 아직 잠들지 않은 세상의 빛이 희미하게 쏟아져오는 거실에서 사쿠라코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건지 어깨를 들썩이면서 찡그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이불을 갖고 내려와 덮어주고 다시 서둘러 올라왔다.

"미워서요."
"...미안해. 어제는 내가... 생각이 없었나봐."
"사과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왔는지. 사쿠라코가 픽 웃자 히마와리도 표정을 풀었다.

"사쿠라코한테 제일 축하받고 싶었어요."
"왜...?"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히마와리가 베시시 웃었다. 칭찬 받아서 쑥스러워하는 어린아이 같다.

"저 한번만 안아주세요."
"응? 갑자기?"
"화해의 표시로요."

머리를 긁적이던 사쿠라코가 어쩔수 없이 히마와리 쪽으로 팔을 뻗었다. 히마와리가 사쿠라코의 품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처음으로 싸웠네요, 우리."
"그런가?"
"사쿠라코와 감정 상하기 싫어요. 앞으로 싫으면 뭐가 싫다, 정확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뭐...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지 않아도 괜찮잖아."

사귄다....라. 머릿속에 입력은 되어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단어다. 바늘 끝이 손가락을 콕 찌른 것 처럼 전율이 돋았다. 갑자기 숨이 벅차오른다.

"사귄다는건 뭐예요?"
"어... 그러니까... 호감을 가지고 합의 하에 만나는거?"

히마와리가 사쿠라코의 품에서 벗어났다. 정확히는 사귄다는게 뭔지 모르는건 아니었지만 사람은 좋아하면 왜 굳이 사귀어야 하는건지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게 다예요?"
"그렇지 뭐."

단지 좋아해서 사귄다는건 뭔가 어설프다.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사귀는거라면,

"사쿠라코, 제가 싫어요?"
"응?! 아니, 저, 싫다기 보단, 아니 그렇다고 막 그렇게 좋은건..."

사쿠라코가 벌떡 일어났다. 오늘따라 왜이렇게 집요한지 모르겠다. 사사건건 간섭하는게 꼭 진짜 사귀는것 같기도 하다.

"심장이 뛰어야지. 내가 말하는 호감이라는건, 같이 있으면 미칠것 같은걸 말하는거야."
"미쳐요....?"
"아, 나도 몰라. 누굴 좋아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히마와리의 눈에서 호기심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이상한 쪽으로 당한것 같다.

"학교 갈거야."

더 있다간 붙잡힐 것 같다.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밑으로 내려갔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사쿠라코를 보며 히마와리는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로봇이라 심장이 없는건지, 사쿠라코를 미칠듯이 좋아하는건 아닌건지 심박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귀는건 안되나보네..."

사귄다는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증만 깊어져간다. 왜 굳이 합의를 해야하는건지, 그렇게 해서 얻는건 무엇인지. 결혼은 평생 산다는 보장이 있는거지만 사귄다는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판 위를 걷는 것.
굳이 말해야한다면, 사귀는것 보다 바로 결혼을 약속하는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히마와리였다.






다시 돌아온 지긋지긋한 과학시간, 니시가키가 다크서클이 내려온 피곤해보이는 몰골로 교실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쿠라코는 가방에서 연필과 교과서를 꺼냈다. 오늘부터는 반드시 수업을 따라갈 것이다. 히마와리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주인이라는 사람이 공부 하나 제대로 못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업 시작한다."

니시가키는 어디가 불편한건지 수업 중간중간에 어깨를 풀거나 손목을 돌렸다. 가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치다가 멈칫하기도 했고, 학생들에게 문제를 풀도록 시킨 뒤에는 멍하게 있다가 하품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요즘 과학실에 가질 않았으니 뭘 하고 사는지도 모르는 양반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교재를 정리하던 니시가키와 멀거니 니시가키를 건너다보던 사쿠라코의 눈이 마주쳤다. 니시가키는 예전의 그 '매일 잠만 자는 제자가 귀여워 미치겠다는' 표정 대신에 지루한 표정으로 사쿠라코의 시선을 지나쳐갔다.

"니시가키 선생님 어디 아프신가?"

아카리가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사쿠라코는 두 귀를 막을까 생각하다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보이는 그 시선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나... 잠깐."
"응?"

사쿠라코가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니시가키가 걱정돼서가 절대 아니었다. 캡슐 안에 들어있던 히마와리에 대해 떠들던 니시가키, 주인 취급에 대해 떠들던 니시가키, 돈을 받아들고 시원하게 웃던 니시가키, 그 모든 니시가키에게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있었다. 그런 니시가키를 대하던 사쿠라코는 늘 지옥을 보고 있으면서도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어, 사쿠라코."

과학실 문을 열자 니시가키가 힘없이 사쿠라코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오랜만이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주스를 꺼내왔다. 오늘은 오렌지 주스다.

"앉아."

과학실에 오면 니시가키와 마주 앉아서 주스를 한잔씩 하는게 관례처럼 되어버렸다. 사쿠라코는 군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히마와리는 잘 지내니?"
"...네."
"다행이구나."

많이 지쳐보여서 그런지 말투도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걱정돼서 와준거야? 이런 고마울데가."
"....."

니시가키가 웃었다. 왠지 그 얼굴을 보고 있을수가 없어서 사쿠라코는 고개를 숙였다.

"뭐, 너는 말해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른의 고충을 어떻게 알겠니."

기껏 찾아와줬더니 하는 말이라고는. 저번에도 그렇고 계속 어린애 취급을 받는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사쿠라코가 아무 대꾸가 없자 입이 근질해진 니시가키가 결국 스스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야. 요즘 연구가 잘 안되고 있거든. 매일 실패하고... 터뜨리고... 되는 일이 없어. 실적을 내야 과학자들 사이에서 누락이 안되는데 말이야."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데요?"
"안드로이드...에 대한거라고 해야할까."

사쿠라코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니시가키는 피곤한 기색이 간데없이 깨끗한 표정이었다. 연구에 대한 열정일까.

"요즘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욕심쟁이야. 휴먼 무슨무슨호, 이런거에 관심을 끊은지가 오래란 말이야. 현대인들의 지식 수준은 기대 수준과 비례해. 우리는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과학을 발전시키는거야."
"....."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니시가키가 일어나더니 사람의 뼈 구조를 매달아놓은 모형을 가지고 왔다.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건, 바로 인간이야."
"인간을... 만든다고요?"
"그렇지. 살과 뼈와 심장, 내장 기관을 모두 갖추고 지식 또한 인간의 수준으로 가진."

사쿠라코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자, 니시가키가 사쿠라코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히마와리가 그 결과물이야."

갑자기 숨이 멈춘 기분이었다. 사쿠라코가 벌떡 일어났다.

"히마와리는 그냥 제 친구예요!"
"아아, 물론이지. 안드로이드같은게 아니야. 그렇지?"

사람을 놀리는건지, 니시가키는 마치 독사처럼 혀를 낼름거렸다.

"너만 좋다면 말이야. 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불쌍한 몰골을 하고 있다고 해도 절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네 친구는 어찌저찌 만들었는데 말이야, 학계에 낼 보고서가 필요한데 네 친구 이상으로 만들수가 없어. 그래서 말인데."

니시가키가 다시 바짝 다가왔다.

"네 친구 좀 잠시 빌려줄수 있겠니? 물론 보수도 있단다."

사쿠라코가 니시가키를 쏘아보았다.

"아, 나쁜 일은 아니야. 어떻게 히마와리를 제작했었는지 조금 살펴보려고. 그래야 다른 안드로이드도 만들수 있지 않겠니."
"싫어요."
"잘 생각해봐. 절대 피해는 없어. 사람 한명 살리는 셈 치고 히마와리를 나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돼."

사쿠라코가 벌떡 일어났다. 주스는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싫어요."

그 말만 남기고 사쿠라코는 과학실을 뛰쳐나갔다. 복도에 다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쟁쟁히 울려퍼졌다. 악마의 꾀임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된다. 분명 히마와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거야.

"히마와리는 누구도 못건드려."

비로소 다리가 후들거리며 눈가가 뻐근해졌다. 뜀박질은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으로 이어졌고 이윽고 멈춰섰다.
히마와리가 보고싶다. 당장 수업을 째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