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마사쿠]버스는 종착역을 지나 다시 온다
그냥, 우연이었다. 그저, 우연이었다.
친구들과 공부를 하기 위해 카페에 들렀을 뿐이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인산인해를 이루는 카페 안에서,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가운데에서, 그 녀석의 목소리를 탐지했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공책을 펴다가 멈칫했다.
작은 우연이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이란, 우스운 것이다.
"너... 다짜고짜 뭐야?"
어느새 내 손은 올라가 있었다. 녀석은 한 손으로는 커피를, 다른 한손으로는 뺨을 쥐었다. 내 친구들은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옆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말릴 필요성을 못느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한 행동의 정당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내 절실한 친구들이니까.
"너야말로. 지금 뭐하는거야?"
비죽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꼴에 친구들이라고 달고 다니는 것들도 전부 한통속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꾸미지만 속은 썩은 음식물 쓰레기보다도 더 시커멓고 냄새가 난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대게 얼마 가지 못하고 냄새를 풍기며 나 이런 사람이요, 하고 떠들고 다닌다. 참 멍청하다. 너도 결국 이렇게 될거였다면. 진작에 내 손으로 막았을텐데.
"카와시마 코지로."
나에게서 뺨을 맞은 남자아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느새 내 머리에서 두뼘이나 우뚝 서있다. 카와시마 코지로, 우리 과에서 그 이름에 빛나는 차석. 키도 크고 매너도 좋으며 공부도 잘해서 언제나 잘나가는 벤츠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넌, 내가 갖다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야.
"갑자기 왜 날 때렸는지 모르겠는데."
보란듯이 한번 더 웃어주었다. 아직 뺨을 때리지 않은 깨끗한 손은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따라 나와. 아니면 히마와리한테 전화할거야."
이번엔 녀석이 웃는다. 해볼대로 해보라는 표정이다.
남학생을 상대로 여학생이 기를 펴봐야 얼마나 펴보겠냐만, 내가 밟힌 껌이 되더라도 들은 것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을 들어야 겠다.
"얼마든지."
대학로에서 사람이 없는 곳은 드물다. 되는 대로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서 녀석과 마주보았다. 녀석은 뭔가 할말이라도 있냐는 듯 날 내려다본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녀석의 주머니를 뒤져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냈다.
"사람이 많다고 너무 안일했던것 같은데. 내가 너라면 창피해서 자살했을걸."
차마 펼쳐볼 용기는 나지 않아서 그대로 내 손 안에 구겨넣었다. 녀석은 귀를 한번 후비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귀가 유난히도 밝네."
"역시 너도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개똥만도 못한 애구나?"
"야. 너 저번부터 자꾸 그러는데."
녀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순간 식은땀이 나면서 이대로 도망칠까, 생각도 했다. 역시 나보다 한참 큰 남자애한테 덤비는건 무리였을까.
"니가 히마와리의 뭐라도 되냐?"
"....뭐?"
"그렇잖아. 히마와리 일에만 관련되면 이빨을 세워. 니가 뭔데."
소름끼치게 길고 예쁜 손이 내 어깨를 꾹꾹 눌렀다.
"히마와리 남자친구는 나거든."
"어, 그래?"
내 손으로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녀석에게서 빼앗아들었던 종이를 펼쳐서 잘난 면상 앞에 대주었다.
"이건 뭔데? 히마와리 남자친구라는 놈이 자기 여자친구를 데리고 짐승 새끼마냥 다같이 히히덕... 좋냐?"
"내가 히마와리를 데리고 뭘 하든 니가 뭔 상관이냐고. 너한테는 나한테 이럴 자격 없어."
"...더러운 새끼."
분하지만... 정말 분하지만 녀석이 한 말 중에 납득이 가는 말이 한마디 있다. 난 히마와리의 뭣도 아니다. 그저 아주 오래 된 소꿉친구이고... 히마와리가 연애를 하기 시작했을때부터는 말을 별로 안하는 사이. 데면데면한 사이다. 여자들끼리는 그런 현상이 매우 자연스럽다. 어울리고, 맞지 않는다 싶으면 떨어져나가고. 아무도 붙잡지 않고 애걸하지 않는다. 나 또한 히마와리에게 그랬다. 연애를 하니까 당연히 친구들과 자주 있을수가 없었겠지.
"야, 내가 부탁 하나만 하자."
내 입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말을 지껄인다. 녀석이 눈을 치켜뜬다.
"무슨 부탁?"
"너.... 이거나 먹고 히마와리랑 헤어져라."
"뭐?"
시시하게 엿이나 먹일거였으면 시작도 안했을 것이라는 용기가 샘솟았다. 아까 녀석을 가리켜 말한 짐승새끼 마냥, 한껏 이빨을 세우고 그 더러운 손을 있는 힘껏 물었다. 아니, 물어 뜯었다. 녀석이 울부짖는다. 발을 동동 구르며 내 머리를 밀쳐내다가, 때리다가, 내 발을 밟는다. 나는 놓지 않고 내가 맞은 만큼, 아픈 만큼 더 꽉 물었다. 손톱으로 그 얼굴을 할퀴고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미친 년이! 이거 놔!"
순간, 무슨 뜻이었는지 모를 그 찬란한 눈동자로 나를 보던 히마와리가 떠올랐다.
대답을 꼭 듣고 싶었지만... 내가 먼저 돌아서버렸다. 어차피 나는 안되니까. 다시 생각해도 나보단 차라리 카와시마가 나았을테니까.
'그냥... 그렇다고. 오래 가라.'
병신같이... 오래 가지 말라고 했었어야 했는데.
"아아아아!"
팔을 억세게 휘어잡는 힘에, 카와시마한테 얻어 맞았을때에도 나오지 않던 비명이 새어나왔다. 양갈래 머리가 성이 난 듯 한껏 뻗쳐있다.
"누구랑 싸웠냐구요!"
"알 바냐! 이거 놔!"
"얼굴이 이게 뭐예요? 여자 얼굴이!"
"아오, 좀!"
별 시답잖은 걱정을. 히마와리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팔을 놓았다. 차마 그 새끼를 조져놓고 히마와리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늦은 시간대에 빙 돌아왔는데 마주쳐버렸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아니, 그 전에 내가 왜 히마와리의 얼굴을 볼 수 없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쁜건 그 새끼잖아.
"따라와요."
"어디가는데."
"약국 가서 약 사와야죠!"
"나한테 이러지 말고 카와시마한테나 가."
툭, 생각 없이 던진 말에 히마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지했다. 이놈의 입은 그저 방정이다. 뒷목을 긁적이니 히마와리가 내 어깨를 한대 때렸다.
"여자가 겁도 없이 남자랑 싸워요?!"
"몰라..."
"왜 싸웠는데요?"
"그냥 지나가다가 시비 붙었어."
"코지로한테 무슨 짓을...."
그래, 이래야 여자친구 답지. 웃음이 새어나온다. 전개는 어차피 이렇게 된다.
"네네, 미안하네요. 본의 아니게 카와시마한테 시비를 걸었네요 제가. 네."
"대충 넘어갈 생각 말아요. 약국 갔다와서 캐물을거예요."
결국 히마와리를 따라 약국에 다녀왔다. 약을 들고 집으로 가겠다고 해도 한사코 끌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히마와리가 방 문을 닫고, 조용히 침대 위를 가리켰다. 군말 없이 침대에 앉았다. 이러는것도 참 오랜만이다.
"난 됐으니까 카와시마한테 가보라고. 내가 그 녀석 손을 다 물어 뜯어놨으니까."
"약이나 발라요."
"예, 예."
애당초 여자 주인공이 상처난 부분에 약을 다정하게 발라주는 전개같은건 기대하지 않았다. 스스로 약을 짜서 얼굴에 바르는데 그래도 좋은게 좋은거라고, 걱정해주는 김에 다정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히마와리한테 난 아무것도 아닌데, 참 건방진 생각이다.
열심히 거울을 보며 약을 바르고 있는데 거울 너머에서 팔장을 끼며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히마와리가 보였다.
"신경쓰여서 그러는데. 너, 가슴 줄이는 법 좀 알아봐."
"무슨 소릴..."
"여기저기 민폐잖아. 쓸데없이 크기만 하고."
"아직 덜 맞았군요?"
"미안합니다."
카와시마 녀석, 세게도 때렸다. 약을 바르는 족족 아프다. 여자를 상대로 이렇게 세게 때려도 되는거야?
"코지로도 잘못했네요. 여자를 때리다니."
"....손을 물어뜯는데 누가 제정신이겠냐."
"사쿠라코."
히마와리가 다가와서 내 옆에 앉았다.
"무슨 일 있는거죠?"
"일은 무슨."
"다짜고짜 싸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닌데요. 사쿠라코는."
"나에 대해서 잘 안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어렸을때부터 친구였는걸요."
"친구..."
너무 오랫동안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지 조금 생소하다. 약을 닫고 히마와리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마주보았다.
"그래, 친구지."
"잠깐 와봐요. 아직 덜바른데 있어요."
"내가 바를게."
"말 들어요."
강아지를 혼내는 주인 같은 매서운 표정이다. 하는 수 없이 히마와리에게 약을 맡겼다. 히마와리 손가락에 얹어진 차가운 약이 내 귀쪽 부분에 닿았다. 너무 안쪽이라 차마 살필수 없었던 부분이다.
"코지로랑 헤어질거예요."
내가 카와시마를 다짜고짜 때렸던것 처럼, 히마와리의 말이 내 뺨을 거세게 쳤다.
"...어?! 뭐라고?"
"움직이지 마요. 코지로랑 헤어질거라구요."
"왜? 잘 사귀고 있었잖아."
히마와리가 약 뚜껑을 닫고 한숨을 쉬었다.
"자꾸... 신경쓰이는게 있어서요."
"뭐가?"
"있잖아요, 사쿠라코... 정말 미안해요."
정적이 흘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감 조차 잡히질 않는다.
"그 날에 대한 대답...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히마와리가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다. 어디에선가 포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코 끝에 겨울을 막 걸친 날씨였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던 초겨울. 그날도 나와 히마와리는 이렇게 마주보고 있었다.
'소울메이트... 있어?'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바보같이 내뱉은 말이었다. 히마와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요?'
'그냥. 얘랑은 영혼까지 연결되어 있는것 같다, 뭐 그런 애 있냐고.'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어딨어요. 대학 준비 해야죠.'
'참 팍팍하게도 산다. 소울메이트 같은거 한명 쯤 있어도 괜찮잖아.'
'그러는 사쿠라코는 있어요?'
겨울 하늘은 높고 창창했다. 그날따라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가끔 그럴때가 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빨려들어갈 듯이 아찔한 느낌. 너무 무서워서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은데, 황홀한 느낌에 이끌려 결국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매번 올려다볼 때마다 다른 짜릿함이 오간다.
그날은 그 짜릿함이 사고회로를 망쳐놨을 것이다.
'있어.'
새까만 밤하늘은 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고, 하얀 별들의 잔상이 내 눈앞을 왔다갔다하며 시야를 방해했다. 히마와리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 너 좋아하는것 같아.'
버스가 도착했다. 엔진 소리에 내 말소리가 묻혀서 히마와리가 잘 듣지 못했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히마와리는 내 말을 똑똑히 들었다. 다만,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할때 내가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대답이 무서웠다. 이미 카와시마가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였다. 나는 출발이 늦었다. 카와시마가 이겼다.
"그 날의 대답... 아직 못해줬잖아요."
약간 덥기도 했던것 같은 그날의 날씨가 어느새 묻히고, 방 안의 따스한 공기가 숨결을 타고 흘렀다.
"너, 이거 죄다. 카와시마한테 죄 짓는거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히마와리의 손 끝이 내 턱을 잡아당겼다. 내 팔은 바보같이 허둥대다가 히마와리 어깨에 안착했고, 곧 입술이 뜨거워졌다. 숨이 벅차올랐다. 별을 보지도 않았는데 눈 앞에 잔상이 생겼다.
히마와리가 잠시 입술을 떼더니,
"벌 받으면 돼요."
다시 다가왔다. 아직까지도 내 둔한 머리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내가 히마와리랑 이러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히마와리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자, 잠깐. 이건... 아니, 잠시만... 아..."
히마와리를 떼어놓고 눈을 마주칠수가 없어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침대 밑에서 히마와리의 발이 꿈틀대다가 내 발 옆으로 다가오는게 보였다.
"카와시마랑 헤어질거예요."
히마와리가 다시 내 턱을 잡아당겼다. 카와시마라고 했다. 코지로라는 다정한 말 대신에 카와시마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입이 열린 것도, 손이 히마와리의 살결을 훑는 것도, 그 향기를 맡는 것도 어느 날의 꿈처럼 그려졌다. 쑤시고 따끔했던 얼굴의 상처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기분 좋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한참을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히마와리가 내 몸을 안아오는동안 눈을 감았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종착역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 새벽의 버스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건데. 나한테 했던거 카와시마한테 배웠다던가 그런거 아니지?"
"....네?"
"그런거야?!"
"아~... 그랬으면 어떨것 같아요?"
"으씨, 카와시마 다시 물어뜯으러 갈거야!"
"사쿠라코가 처음이니까 걱정 말아요."
"거짓말."
"아, 그래요? 사실 코지로랑..."
"아니야! 잘못했어. 제발 코지로라고 하지 마..."
"알겠으니까 이불이나 제대로 덮어요. 아무리 방이어도 그러고 있으면 춥잖아요."
"응..."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