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유루유리

[히마사쿠]어디에서 내리세요?

향유동화 2016. 6. 28. 02:12
나는 사자를 때려잡고 있었다. 멀리서 활을 겨냥해서 쏘아 사자를 넘어뜨렸다. 그러나 동물의 왕 사자는 그냥 넘어지는 법이 없다. 곧바로 일어나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를 덮쳐왔다. 나는 재빨리 품 안에서 칼을 꺼내 사자의 가슴 깊이 푹 찔렀다. 그리고 순간.

"저기요, 어디서 내리세요?"

사자가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놀라서 내 몸 위로 힘없이 엎어지는 사자를 밀쳐냈다. 고개를 홱 뒤로 젖힌 사자는 다시 말했다.

"어디서 내리시냐구요."

어디서, 뭘 내린단 말인가?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눈을 비볐다. 천천히 눈을 다시 뜨니, 내 앞에 터질것 같은 복숭아가 하얀 봉투에 담겨져있는게 보였다. 아니, 실례. 눈을 들어보니 가슴이었다. 사자를 밀쳐내듯이 뒤로 확 물러났다. 덜컹덜컹 지하철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기댈데 없이 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두 팔은 서로 감긴지 꽤 됐는지 제 체온에 달아올라 후끈거렸다.
내 앞의 여자가 다시 물었다.

"어디서 내리세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처음 보는 여자가 검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지하철은 정차했고, 대답하지 않고 바로 내렸다. 도착할 역에서 한참 전 역이라는건 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고개를 숙이니 바닥이 흔들렸다. 너무 피곤하다. 그 와중에도 꿈속에서 사자를 때려잡는 수고를 했다니.




지방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따라 수도권으로 올라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일을 새로 배운다는 것은, 적응한다는 것은 정말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 하루 종일 열심히 뛰면서 배웠다. 나름 적응도 해나가던 차였으나 쉴 시간 없이 일을 하는 것에는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며칠째 만원 지하철에서 선 채로 졸고 있었다.
지하철이 흔들릴때마다 내 몸도 정처없이 흔들리고, 꿈도 흔들렸다. 꿈 속에서는 항상 무언가를 때려잡고 있었다. 어느날은 원숭이를 새총으로, 어느날은 고래를 낚싯대로, 어느날은 사자를 칼로. 어쩌면 내가 잡고 있었던 것은 동물이 아니라 밤 늦게까지 빛내고자 노력했던 나의 미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 잡을 뻔한 내 미래는 항상 그 여자가 흩뜨려놓았다.

"어디까지 가세요?"

팔장을 끼고 있던 팔이 후끈해질때 즈음에 항상 들리던 말이었다. 눈을 뜨면 항상 그 여자가 앞에 있었다. 몽롱한 정신에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지 어언 일주일 째였다. 나는 항상 내리던 역이 달랐고 그 타이밍은 내가 내리기 한참 전이거나 내릴 곳에서 한참 지난 후였다. 대체 제 때에 내린 적이 없었다. 아마 그 여자도 내가 내리고 나면 어이없어서 웃었을 것이다. 매일 내리는 역이 다르다. 그리고 묻는 말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는다.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미래를 붙잡고 있는 나에게 묻는다.

"어디에서 내리세요?"

눈을 비볐다. 조금 정신이 맑아졌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딘가에서요."

여자가 픽 웃었다. 내가 내리고 나서 지었을 법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목소리를 들어보네요."

나는 여전히 선 채였다. 여자도 서있었다. 검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로.

"항상 어딘가에서 내리더라구요."
"지하철에 탄 이상 어디에서든 내리게 되어있죠."

여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전히 잠이 깨지 않아 여러차례 하품을 하고 눈을 비볐다. 일주일 동안 보던 얼굴이라 그런지 이제 옆집에 사는 듯이 친숙해졌다.

"늘 넘어갈듯 안넘어가서 계속 뒤에 서있었어요. 혹시나 넘어지면 붙잡아두려구요."
"아. 감사하네요."
"그만큼 위험했다는거예요. 제발 잠은 집에서 주무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도 자고 지하철에서도 자고 뭐 그런거지요, 라고 대꾸하려다가 그대로 삼켰다. 나도 제발 잠은 집에서만 자고 싶다.

"근데 매일 어디에 다녀오시는거예요? 매번 제 곁에 계시네요."

여자가 입을 앙다물고 살짝 웃었다. 뭐, 세상 사는게 다 그렇지요,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두 말이 필요 없는 지하철에서의 대화. 대체 어디에서 뭘 하는지 모르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 두 여자의 대화.

"어디서 내리세요?"

나도 물었다. 어디에서 내리길래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항상 곁에 있어주는 걸까.
여자의 대답은 뻔했다.

"어디에선가요."

두 사람이 동시에 작게 웃었다. 아, 과연 그렇군요. 나는 내 뒤를 봐주던 여자가 왠지 모르게 그리워졌다.
문득 다음 역이 안내방송 되었다. 이번에는 정말 내가 내려야 할 역이었다. 기지개를 짧게 켜고 작별인사를 하려던 찰나 여자도 가방을 고쳐멨다.

"저는 가볼게요. 집 가서 푹 주무세요."

나는 새삼 세상 사는게 다 그런거지요, 하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저도 이번 역에서 내리거든요."

그렇다면 여자는 나를 위해 내가 역을 지나쳤더라도 곁을 지켜주었다는 것이리라. 여자가 가방 끈을 조금 세게 쥐었는지 손이 하얘졌다.
우리는 결국 서로가 예고하지 않은 곳에서 내려 뜻밖의 인연을 만들어냈다. 좌우지간 우리는 내렸다. 어디에선가 내렸다. 다 무너진 역이더라도, 철도가 없는 곳이라도, 어쨌든 탔으면 내려야하는 법이다.
더 이상 눈을 비비지 않아도 될 만큼 정신이 맑아져있었다. 하얬던 여자의 손은 다시 혈색이 돌아와있었다. 이제 앞으로 지하철에서 만나도 어디에서 내리세요, 하는 질문은 무색해질 것이다. 그러나 왠지 그럴것 같은 느낌이다. 여전히 서로에게 속으로 묻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어디로 가세요?
오늘은 무슨 꿈을 꾸고 계신가요?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