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유루유리
[쿄아야]너의 이름은
향유동화
2016. 11. 10. 23:02
살을 에는 추위에 코트를 꽉 여맸다. 대충 패딩이나 입고 나갈까, 했는데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꾸민답시고 입었지만 화장도 옷도 전부 내것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나 혼자 동떨어져있는것 같은 무안함, 서글픔이 몰려왔다. 한숨마저도 공기가 차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나는 어느새 카페 앞에 도착해있었다.
카페에서 혼자 있는 사람은 드물다. 혼자인걸까 싶은 사람들도 조금 기다리다보면 상대가 찾아와 반갑게 인사한다.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쓴걸 별로 좋아하지도 잘 먹지도 않지만 제일 맛없는걸 시키면 쓰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 덕에 자리에 제법 오래 버티고 있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와 동행한다.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 혹은 친구들과 함께. 함께 맞잡은 그들의 손에 비해 내 손은 너무나도 보잘것 없어보였다.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너도 이제 연애를 해야할 때가 되지 않았니, 어처구니 없는 파도타기에 휩쓸린 꼴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런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구일까, 그 마저도 잊혀진 기분이었다.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누구였더라.
"제발, 제발...."
나는 두 손을 꽉 맞잡고 커다랗고 하얀 종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나오는데 나는 아직이었다. 내 이름을 찾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스기우라... 스.... 스.....
"아야노!"
누가 나를 흔들었으나 나는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재차 흔들고 다시 내 이름 찾기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것 같아 집중력이 흩어졌다.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토, 토, 토시노, 쿄코?!"
"아 참, 우리 같은 대학교에 지원했잖아? 붙었어?"
토시노 쿄코는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이 태평했다. 나는 토시노 쿄코가 지원한 대학에 함께 지원했다. 결코 토시노 쿄코가 지원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이러고 있을 때야? 이름 찾아봐야지!"
"아야노, 왜그래? 울것 같은 표정이야."
토시노 쿄코가 내 말은 사뿐히 무시한 채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소리야?"
"울 것 같다구. 나 좀 봐."
"됐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다시 종이를 보려는 나를, 토시노 쿄코가 어깨를 잡아 돌아세웠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바보같이 입을 반쯤 벌린 채 토시노 쿄코를 바라보았다.
"이름 못찾을까봐 겁나?"
토시노 쿄코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날카롭게 나를 후벼파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아니, 토시노 쿄코가 날 잡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바보... 바보 아니야?"
"아야노?"
"이런걸... 이런걸 앞두고... 이렇게 중요한걸 앞두고 내 이름이 안보이잖아...."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을 집중해서 눈이 피로해졌다. 더이상 이름을 찾을 힘 조차 없었다.
"이 판에 내가 너처럼 웃을 수 있을것 같아? 대학에서 떨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아야노. 너는 여기 있잖아."
토시노 쿄코가 날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눈이 나를 도장처럼 이 자리에 찍어내리고 있었다.
"너 정말 바보야? 당연히 나는 여기...."
그러다가 문득 토시노 쿄코의 살랑거리는 금발 사이로 보였다. 스기우라. 아야노.
"...아... 붙었어...."
나도 모르게 비척비척 내 이름 앞으로 걸어갔다. 토시노 쿄코의 멍한 시선이 따라오는게 느껴졌다. 내 이름 바로 앞까지 걸어가서야, 가볍게 돌아섰다.
"나 여기에 있어, 토시노 쿄코!!"
살면서 내 이름이 그렇게 기쁘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던가. 내 뺨 위로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무언가가 듬뿍 흘렀다. 토시노 쿄코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그렇게 장황하게 나를 존재시켜놓고, 본인은 떨어진 사람이 있었던것 같다. 아메리카노가 어느새 내 손에 쥐여져 있었다. 검은 커피 안에 비춰진 내 머리카락 한올이 흔들거리면서 찬 바람이 끼쳐왔다.
"스기우라 아야노 씨?"
아. 나는 내 이름이 그렇게 불편하게 들릴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무거워진 마음으로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듯하게 정장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한 남자가 내 앞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나카모토 소타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 네.... 스기우라 아야노입니다."
뒷목을 살며시 잡고 멋쩍게 인사를 건넨 뒤 우리는 착석했다. 나카모토라는 사람은 듣던 대로 반듯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매너도 좋아서 말이 없는 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즐겁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내 시선은 줄곧 창 밖에 있었다. 이런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 마법소녀 미라쿠룽이야!"
뒷자리에서는 모녀의 이야기가 두런두런 울려퍼지고 있었다. 미라쿠룽... 아직도 나오고 있구나. 정말 꾸준하네. 나도 모르게 입고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런 나를 보고 나카모토 씨가 방긋 웃었다.
"아, 웃으셨다. 방금 이야기가 재밌었나보네요, 다행이에요."
못들었지만 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라쿠룽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미라쿠룽은 왜 등장할때 자기 이름을 부르는걸까? 그러면 악당들이 다 도망가잖아."
"그러게, 왜 그럴까?"
아이가 꽤나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미라쿠룽은 항상 등장할때 '마법소녀 미라쿠룽!'하고 외친다. 내가 악당이었으면 벌써 줄달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 그건 말이야, 꼬마 아가씨."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내 바로 뒤로 찬 바람이 다시 훅 끼쳐왔다.
"미라쿠룽은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야!"
아메리카노를 연거푸 입에 들이부었다. 쓴 맛이 단번에 목에 차오르며 연신 기침이 났다.
"스, 스기우라 씨, 괜찮으세요?"
"아... 네... 뭐..."
마치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을때의 그 기분이었다. 나는 떨고 있었고, 금방에라도 눈물이 차오를것 같았다. 나를 모르고 지나가겠지. 내 이름은 그 하얀 곳에 적히지 못하고 스쳐가겠지. 주먹을 꽉 쥐어서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났다.
"스기우라?"
검은 잉크가 번지지 않고 정확하게 적어내려갔다. 스기우라. 그리고 그 다음은...
"아야노!"
내 이름이, 온전히 적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긴 금발 대신에 목 언저리에서 찰랑대는 천진한 웃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아이가 서 있었다.
"토, 토시노... 쿄코...."
나카모토 씨가 의아하게 우리 둘을 바라보다가 토시노 쿄코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 누구...세요?"
토시노 쿄코가 바보같은 목소리로 묻자, 나카모토 씨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 했다.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토시노 쿄코에게 그 말을 들려줘서는 안될것 같았다. 아니, 안된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죄송합니다."
무작정 토시노 쿄코를 밖으로 끌어냈다. 토시노 쿄코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토시노 쿄코는 아무 말 없이 끌려왔다.
"와, 이게 얼마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여전히 여기 근처에 사는거야? 이사갔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벗어나던 길을 멈추었다. 토시노 쿄코를 놓고 뒤돌자, 토시노 쿄코가 소매 속에 손목을 감추고 쓰다듬는게 보였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너는 또 웃음 속에 너를 감추는구나.
"나 안반가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데..."
"어... 응.... 반가워. 오랜만이야."
"근데 저 사람은 누구야? 남자친구?"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이내 나를 똑바로 바라봐주는 그 눈빛에 진한 향수가 밀려왔다. 우리는 서로를 이렇게 봤었다. 토시노 쿄코는 내 주변까지 담뿍 담은 표정으로, 그리고 난 어쩐지 너만 보이는것 같은 착각으로.
"근데 너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거야?"
"아, 이거? 가끔 변화를 주는것도 나쁘지 않잖아? 시원하게 잘랐지."
뭔가 한층 더 가볍고 발랄해진 모습이었다.
"대학은 무사히 졸업한거지?"
"응. 그런데... 넌... 어때? 어떻게 지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토시노 쿄코는 그날 결국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 자리에 못박아주고, 자신은 홀연히 허허 털어내며 돌아섰다.
"아, 나는 대학 안갔어. 지금은 작은 사이트에서 만화 연재하고 있거든. 원고료 조금 받고."
토시노 쿄코가 코 끝을 무심히 쓸었다.
"이 쿄코님에게 대학 따위 별거 아니거든!"
그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토시노 쿄코가 대학에 붙지 못한게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미라쿠룽 좋아하는구나?"
"당연하지! 이 세상에 정의란 미라쿠룽 뿐이야! 난 그렇게 믿어!"
토시노 쿄코는 여전히 주먹을 불끈 쥐고 당차게 외쳤다. 하마터면 헛웃음이 터질 뻔 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는데, 문득 아까 카페 안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데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이야?"
"응? 뭐가?"
"미라쿠룽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이유."
"아, 그거?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거?"
토시노 쿄코가 두 손을 주머니에 푹 파묻었다. 찬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었다.
"생각해봐. 아야노가 세계를 지키는 마법소녀가 됐어. 그런데 악당 앞에서 당당하게 '스기우라 아야노! 화려하게 등장!'하고 외칠수 있겠어?"
"....뭐?"
아까 그 아이의 질문 만큼이나 멍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토시노 쿄코는 빙긋 웃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미라쿠룽도 사실 많이 두려울거야. 늘 새로운 사건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마음을 다스리는거야. 자기 자신을 부르면서."
토시노 쿄코가 주머니에 꽂았던 두 손을 빼고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미라쿠룽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내 어깨가 들썩이는게 느껴졌다. 찬 공기에도 아랑곳 않고 마구 숨을 불어넣고 내쉬었다. 토시노 쿄코는 그런 나를 보더니 잠시 멈칫하다가 같이 웃었다. 토시노 쿄코는 여전히 바보같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치는 듯 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토시노 쿄코는 바보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맞는것 같아. 네가 맞아."
"아야노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의미에서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응?"
뭐든 부탁하라는 뿌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토시노 쿄코에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카페로 들어가야하는데..."
토시노 쿄코가 내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밝던 표정이 조금씩 무너졌다. 내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야노..."
"그러니까...."
"아... 응.... 알겠어..."
뭘 알겠다는걸까. 토시노 쿄코는 내가 지나갈수 있게 조금 비켜주었다. 가라는걸까. 이대로 나를 보내는걸까. 나는 가야하는걸까.
"내가 시간 너무 많이 끌었지? 미안해."
"......"
"그런데... 울지 마, 아야노."
눈가를 훔쳤다. 이제 눈물을 보이는건 토시노 쿄코 앞에서 더이상 창피하지 않았다.
"나 이대로 가?"
"안에 사람 기다리잖아."
"정말, 이대로 가?"
"...아야노?"
토시노 쿄코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울지 않게... 도와줘...."
왜 우냐고 묻지도 않았다. 마치 나를 다 안다는 듯이, 토시노 쿄코는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서 안아주었다.
"지금 아야노의 이름을 찾고 있구나."
"........"
"괜찮아. 그때도 말했잖아. 너는 여기에 있어."
토시노 쿄코의 찬 겉외투를 한아름 안았다. 더욱 끌어안았다. 그 안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아야노. 우리 도망갈까?"
"...응?"
토시노 쿄코가 나를 놓더니, 떨어진 눈물이 채 가시지 않은 내 손을 꽉 잡았다.
"지금 술래가 쫓아오고 있는거야! 도망가자!"
"어, 어, 토시노 쿄코?!"
우리는 갑작스럽게 달렸다. 귀가 얼어서 터질것만 같았지만 손만은 따뜻했다. 어린 시절, 늘 나를 앞서 달려가던 긴 금발의 토시노 쿄코가 있었다. 그 발걸음을 쫓아가기가 너무나도 버거웠다. 무언가가,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듯이 무겁게 나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나를 앞서 달려가는 짧은 금발의 토시노 쿄코가 있다. 다만 이제 내 발걸음도 함께다. 나는 카페에 두고 온 내 외투와 쓰디 쓴 아메리카노를 잊은 채 토시노 쿄코가 이끄는대로 달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신호등 마저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멀리, 저기 멀리 달아났다. '스기우라 아야노'라는 이름이 멀리서 보였다. 잠시 멈춰있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찬 바람에 쓸려 엉망진창이 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나카모토 씨가 멍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화난것 같기도 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외투를 들고, 더이상 필요 없는 쓰디 쓴 아메리카노를 버렸다.
"안녕히계세요!"
저는 제 자리가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FIN.
카페에서 혼자 있는 사람은 드물다. 혼자인걸까 싶은 사람들도 조금 기다리다보면 상대가 찾아와 반갑게 인사한다.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쓴걸 별로 좋아하지도 잘 먹지도 않지만 제일 맛없는걸 시키면 쓰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 덕에 자리에 제법 오래 버티고 있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와 동행한다.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 혹은 친구들과 함께. 함께 맞잡은 그들의 손에 비해 내 손은 너무나도 보잘것 없어보였다.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너도 이제 연애를 해야할 때가 되지 않았니, 어처구니 없는 파도타기에 휩쓸린 꼴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런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구일까, 그 마저도 잊혀진 기분이었다.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누구였더라.
"제발, 제발...."
나는 두 손을 꽉 맞잡고 커다랗고 하얀 종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나오는데 나는 아직이었다. 내 이름을 찾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스기우라... 스.... 스.....
"아야노!"
누가 나를 흔들었으나 나는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재차 흔들고 다시 내 이름 찾기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것 같아 집중력이 흩어졌다.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토, 토, 토시노, 쿄코?!"
"아 참, 우리 같은 대학교에 지원했잖아? 붙었어?"
토시노 쿄코는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이 태평했다. 나는 토시노 쿄코가 지원한 대학에 함께 지원했다. 결코 토시노 쿄코가 지원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이러고 있을 때야? 이름 찾아봐야지!"
"아야노, 왜그래? 울것 같은 표정이야."
토시노 쿄코가 내 말은 사뿐히 무시한 채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소리야?"
"울 것 같다구. 나 좀 봐."
"됐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다시 종이를 보려는 나를, 토시노 쿄코가 어깨를 잡아 돌아세웠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바보같이 입을 반쯤 벌린 채 토시노 쿄코를 바라보았다.
"이름 못찾을까봐 겁나?"
토시노 쿄코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날카롭게 나를 후벼파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아니, 토시노 쿄코가 날 잡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바보... 바보 아니야?"
"아야노?"
"이런걸... 이런걸 앞두고... 이렇게 중요한걸 앞두고 내 이름이 안보이잖아...."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을 집중해서 눈이 피로해졌다. 더이상 이름을 찾을 힘 조차 없었다.
"이 판에 내가 너처럼 웃을 수 있을것 같아? 대학에서 떨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아야노. 너는 여기 있잖아."
토시노 쿄코가 날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눈이 나를 도장처럼 이 자리에 찍어내리고 있었다.
"너 정말 바보야? 당연히 나는 여기...."
그러다가 문득 토시노 쿄코의 살랑거리는 금발 사이로 보였다. 스기우라. 아야노.
"...아... 붙었어...."
나도 모르게 비척비척 내 이름 앞으로 걸어갔다. 토시노 쿄코의 멍한 시선이 따라오는게 느껴졌다. 내 이름 바로 앞까지 걸어가서야, 가볍게 돌아섰다.
"나 여기에 있어, 토시노 쿄코!!"
살면서 내 이름이 그렇게 기쁘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던가. 내 뺨 위로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무언가가 듬뿍 흘렀다. 토시노 쿄코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그렇게 장황하게 나를 존재시켜놓고, 본인은 떨어진 사람이 있었던것 같다. 아메리카노가 어느새 내 손에 쥐여져 있었다. 검은 커피 안에 비춰진 내 머리카락 한올이 흔들거리면서 찬 바람이 끼쳐왔다.
"스기우라 아야노 씨?"
아. 나는 내 이름이 그렇게 불편하게 들릴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무거워진 마음으로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듯하게 정장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한 남자가 내 앞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나카모토 소타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 네.... 스기우라 아야노입니다."
뒷목을 살며시 잡고 멋쩍게 인사를 건넨 뒤 우리는 착석했다. 나카모토라는 사람은 듣던 대로 반듯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매너도 좋아서 말이 없는 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즐겁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내 시선은 줄곧 창 밖에 있었다. 이런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 마법소녀 미라쿠룽이야!"
뒷자리에서는 모녀의 이야기가 두런두런 울려퍼지고 있었다. 미라쿠룽... 아직도 나오고 있구나. 정말 꾸준하네. 나도 모르게 입고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런 나를 보고 나카모토 씨가 방긋 웃었다.
"아, 웃으셨다. 방금 이야기가 재밌었나보네요, 다행이에요."
못들었지만 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라쿠룽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미라쿠룽은 왜 등장할때 자기 이름을 부르는걸까? 그러면 악당들이 다 도망가잖아."
"그러게, 왜 그럴까?"
아이가 꽤나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미라쿠룽은 항상 등장할때 '마법소녀 미라쿠룽!'하고 외친다. 내가 악당이었으면 벌써 줄달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 그건 말이야, 꼬마 아가씨."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내 바로 뒤로 찬 바람이 다시 훅 끼쳐왔다.
"미라쿠룽은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야!"
아메리카노를 연거푸 입에 들이부었다. 쓴 맛이 단번에 목에 차오르며 연신 기침이 났다.
"스, 스기우라 씨, 괜찮으세요?"
"아... 네... 뭐..."
마치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을때의 그 기분이었다. 나는 떨고 있었고, 금방에라도 눈물이 차오를것 같았다. 나를 모르고 지나가겠지. 내 이름은 그 하얀 곳에 적히지 못하고 스쳐가겠지. 주먹을 꽉 쥐어서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났다.
"스기우라?"
검은 잉크가 번지지 않고 정확하게 적어내려갔다. 스기우라. 그리고 그 다음은...
"아야노!"
내 이름이, 온전히 적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긴 금발 대신에 목 언저리에서 찰랑대는 천진한 웃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아이가 서 있었다.
"토, 토시노... 쿄코...."
나카모토 씨가 의아하게 우리 둘을 바라보다가 토시노 쿄코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 누구...세요?"
토시노 쿄코가 바보같은 목소리로 묻자, 나카모토 씨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 했다.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토시노 쿄코에게 그 말을 들려줘서는 안될것 같았다. 아니, 안된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죄송합니다."
무작정 토시노 쿄코를 밖으로 끌어냈다. 토시노 쿄코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토시노 쿄코는 아무 말 없이 끌려왔다.
"와, 이게 얼마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여전히 여기 근처에 사는거야? 이사갔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벗어나던 길을 멈추었다. 토시노 쿄코를 놓고 뒤돌자, 토시노 쿄코가 소매 속에 손목을 감추고 쓰다듬는게 보였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너는 또 웃음 속에 너를 감추는구나.
"나 안반가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데..."
"어... 응.... 반가워. 오랜만이야."
"근데 저 사람은 누구야? 남자친구?"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이내 나를 똑바로 바라봐주는 그 눈빛에 진한 향수가 밀려왔다. 우리는 서로를 이렇게 봤었다. 토시노 쿄코는 내 주변까지 담뿍 담은 표정으로, 그리고 난 어쩐지 너만 보이는것 같은 착각으로.
"근데 너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거야?"
"아, 이거? 가끔 변화를 주는것도 나쁘지 않잖아? 시원하게 잘랐지."
뭔가 한층 더 가볍고 발랄해진 모습이었다.
"대학은 무사히 졸업한거지?"
"응. 그런데... 넌... 어때? 어떻게 지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토시노 쿄코는 그날 결국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 자리에 못박아주고, 자신은 홀연히 허허 털어내며 돌아섰다.
"아, 나는 대학 안갔어. 지금은 작은 사이트에서 만화 연재하고 있거든. 원고료 조금 받고."
토시노 쿄코가 코 끝을 무심히 쓸었다.
"이 쿄코님에게 대학 따위 별거 아니거든!"
그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토시노 쿄코가 대학에 붙지 못한게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미라쿠룽 좋아하는구나?"
"당연하지! 이 세상에 정의란 미라쿠룽 뿐이야! 난 그렇게 믿어!"
토시노 쿄코는 여전히 주먹을 불끈 쥐고 당차게 외쳤다. 하마터면 헛웃음이 터질 뻔 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는데, 문득 아까 카페 안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데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이야?"
"응? 뭐가?"
"미라쿠룽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이유."
"아, 그거?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거?"
토시노 쿄코가 두 손을 주머니에 푹 파묻었다. 찬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었다.
"생각해봐. 아야노가 세계를 지키는 마법소녀가 됐어. 그런데 악당 앞에서 당당하게 '스기우라 아야노! 화려하게 등장!'하고 외칠수 있겠어?"
"....뭐?"
아까 그 아이의 질문 만큼이나 멍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토시노 쿄코는 빙긋 웃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미라쿠룽도 사실 많이 두려울거야. 늘 새로운 사건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마음을 다스리는거야. 자기 자신을 부르면서."
토시노 쿄코가 주머니에 꽂았던 두 손을 빼고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미라쿠룽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내 어깨가 들썩이는게 느껴졌다. 찬 공기에도 아랑곳 않고 마구 숨을 불어넣고 내쉬었다. 토시노 쿄코는 그런 나를 보더니 잠시 멈칫하다가 같이 웃었다. 토시노 쿄코는 여전히 바보같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치는 듯 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토시노 쿄코는 바보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맞는것 같아. 네가 맞아."
"아야노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의미에서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응?"
뭐든 부탁하라는 뿌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토시노 쿄코에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카페로 들어가야하는데..."
토시노 쿄코가 내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밝던 표정이 조금씩 무너졌다. 내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야노..."
"그러니까...."
"아... 응.... 알겠어..."
뭘 알겠다는걸까. 토시노 쿄코는 내가 지나갈수 있게 조금 비켜주었다. 가라는걸까. 이대로 나를 보내는걸까. 나는 가야하는걸까.
"내가 시간 너무 많이 끌었지? 미안해."
"......"
"그런데... 울지 마, 아야노."
눈가를 훔쳤다. 이제 눈물을 보이는건 토시노 쿄코 앞에서 더이상 창피하지 않았다.
"나 이대로 가?"
"안에 사람 기다리잖아."
"정말, 이대로 가?"
"...아야노?"
토시노 쿄코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울지 않게... 도와줘...."
왜 우냐고 묻지도 않았다. 마치 나를 다 안다는 듯이, 토시노 쿄코는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서 안아주었다.
"지금 아야노의 이름을 찾고 있구나."
"........"
"괜찮아. 그때도 말했잖아. 너는 여기에 있어."
토시노 쿄코의 찬 겉외투를 한아름 안았다. 더욱 끌어안았다. 그 안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아야노. 우리 도망갈까?"
"...응?"
토시노 쿄코가 나를 놓더니, 떨어진 눈물이 채 가시지 않은 내 손을 꽉 잡았다.
"지금 술래가 쫓아오고 있는거야! 도망가자!"
"어, 어, 토시노 쿄코?!"
우리는 갑작스럽게 달렸다. 귀가 얼어서 터질것만 같았지만 손만은 따뜻했다. 어린 시절, 늘 나를 앞서 달려가던 긴 금발의 토시노 쿄코가 있었다. 그 발걸음을 쫓아가기가 너무나도 버거웠다. 무언가가,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듯이 무겁게 나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나를 앞서 달려가는 짧은 금발의 토시노 쿄코가 있다. 다만 이제 내 발걸음도 함께다. 나는 카페에 두고 온 내 외투와 쓰디 쓴 아메리카노를 잊은 채 토시노 쿄코가 이끄는대로 달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신호등 마저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멀리, 저기 멀리 달아났다. '스기우라 아야노'라는 이름이 멀리서 보였다. 잠시 멈춰있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찬 바람에 쓸려 엉망진창이 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나카모토 씨가 멍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화난것 같기도 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외투를 들고, 더이상 필요 없는 쓰디 쓴 아메리카노를 버렸다.
"안녕히계세요!"
저는 제 자리가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