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달리기는 자신이 없다. 단숨에 허를 찌르는 순간적인 스피드로는 자신이 있었지만, 사요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긴 거리를 달리는 중이었다. 이렇게까지 길게 달려본 적은 없기에 달리면서 몇번 고꾸라질 뻔했지만, 이대로 쓰러지면 앞으로는 없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 매번 지쳐서 쓰러지려고 할 때마다 기억에 없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름도 잊어버린지 오래. 분명 밝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쏴!"
우거진 나무 틈 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곧 쫓아오던 군대의 지휘관 목소리다. 사요는 나무들 틈으로 숨는 대신 팔에 차고 있던 방패를 치켜들었다. 사요의 입에서 알아듣기 힘든 언어의 주문이 흘러나오고, 방패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받쳐들고 있을 수 없는 무게가 되었다. 높이만 3미터 쯤 되는 방패가 큰 소리를 울리며 땅에 박히자, 사요는 급한 숨을 몰아쉬면서 그 밑으로 수그렸다. 방패는 쏟아져 내려오는 화살들을 모두 튕겨냈다.
"저 빌어먹을 방패부터 뺏어야 한다니까!"
쏘라고 명령한 목소리가 화를 냈다. 화살 소리가 잠잠해지자 방패가 작아지고, 사요는 다시 뛰었다.
현상수배범이 된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기억에도 없는 사람을 찾으려 도박판에서 빠져나온지도 보름이 넘었다는 뜻이겠지. 지옥의 카타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드문 곳에서 점심을 때우고 있던 도중, 말을 걸어온 사람의 행색이 수상했다.
"방패가 정말 멋있네요."
겉보기에는 평범한 모험가처럼 보였지만 사요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목적이 있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방패라면 다른 사람이 들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지극히 널리고 널린 모양새인데 이 방패에 관심이 있다는 건 곧 카타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키메라라는 이름의 방패는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특수한 성능을 가진 방패로, 카타콤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는 총사령관이 가지고 있던 방패였다. 사요가 카타콤을 빠져나올 때 총사령관의 지휘실에서 훔쳐온 것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시죠?"
사요는 옆에 차고 있던 단검으로 살짝 손을 뻗었다. 밥을 배부르게 먹지 않길 잘했다. 수상한 행색을 한 사람은 다짜고짜 사요에게 칼을 겨눴고, 사요는 단검으로 쳐내는 게 고작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방패를 가지고 나오긴 했지만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서 방패를 썼다간 정체가 온 세상에 드러날 터. 사요는 숲으로 도망쳤다. 곧 한 무리의 군대가 들이닥쳐 사요를 잡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그렇게 쫓긴지 어느덧 한시간 째, 군대는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고 숲 속 구석구석까지 사요를 쫓아들어왔다.
점점 체력이 고갈되고 있는데 군대는 끈질기다. 그래도 많이 지쳤는지 따라오는 속도는 더뎠다. 어느정도 시야 밖으로 벗어나자 사요는 근처에 바위 틈으로 숨었다. 곧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라졌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나눠서 찾는다."
작전을 지휘하는 모양을 보니 총사령관과 그리 멀지 않은 관계인 것 같다. 군사들이 흩어진 지금,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일지도 모른다. 사요는 바위 틈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지휘관과 그를 보좌하는 군사 몇명이 남았을 때 칼을 겨눌 생각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요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한 순간에 반격해 상대의 목숨을 끊어놓는 것은 카타콤에서 지겹게 해보았다.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심장이 벌컥벌컥 울린다. 상대의 목을 겨눌 때만큼 흥분되는 때는 없다.
그런데, 주변을 계속 살피던 지휘관이 갑자기 경계를 풀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본 듯이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건내는 목소리도 한층 가벼워졌다.
"아, 이런 곳에 민간인이 있었군."
민간인? 민간인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요는 숨을 내쉬면서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뺐다. 곧 다정하고 상냥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 근처는 제가 사는 곳인데..."
"현상수배범을 찾고 있는데. 혹시 도와줄 수 있나?"
"현상수배범이요?"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현상수배범이라는 말을 듣자 상당히 놀라는 모습이었다. 당연하겠지. 현상수배범이라면 보통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일테니까. 어쩐지 조금 억울해졌다. 사요는 지금껏 카타콤에서 지시해준 마물이나 사람 이외에는 해쳐본 적이 없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요."
"음, 도울 건 없지만 이 근처를 수색할 수 있도록 협조 부탁하고 싶은데."
"이미 군사들 다 풀어놓으시고 그런 말씀 하시는 것도 좀 웃기네요."
상대는 군대의 지휘관인데 여자는 아무런 겁없이 대하는 태도였다. 저런 말을 아무렇게나 하다니. 지휘관도 조금 놀랐는지 헛기침을 했다. 사요는 조금 웃었다. 쌤통이다.
"저쪽은 없어요. 제가 저쪽에서 오는 길이었거든요. 아무도 없었어요."
"음... 그럼 다른 곳으로 가야겠군. 알려줘서 고맙네."
지휘관은 머쓱해졌는지 자신을 호위하던 군사들까지 모두 데리고 다른 길쪽으로 향했다. 민간인이라는 여자도 자리를 뜨는 것처럼 보였다. 사요는 한참 뒤에야 조심스럽게 바위 틈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살았....
"저기요."
뒤쪽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요는 화들짝 놀라며 칼을 겨누었다. 아까 그 민간인 여자였다. 반묶음 머리에 한쪽에는 사과가 든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빨간색 티셔츠에 어깨끈이 허리 밑에 늘어져있는 카키색 바지 차림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부츠를 신고 있었다. 꼭 어느 공군의 수리공 같은 모습인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부드럽다. 그렇게 상대방을 파악하던 사요는 어느새 자신의 마음이 풀어져있다는 걸 느꼈다.
여자는 무표정으로 사과를 내밀었다.
"먹을래요?"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사요는 칼을 거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저 안죽여요?"
"네?"
"현상수배범이잖아요, 저 사람들한테 내가 다 말하면 어쩌려구."
역시 만만치않은 사람이다. 사요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여자가 고양이입을 씰룩대면서 웃었다.
"말 안할테니까 죽이지 말아줄래요?"
"......."
"일단 허기진 것 같은데 이거 하나만 먹어요. 독은 안들었어요."
세상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밝게 웃어주는 사람만은 경계해야하는데. 사요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에 이끌려 사과를 건네받고 있었다. 손에 들린 사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언제 먹나 기다리고 있는 듯한 여자의 표정에 한입 베어물었다.
"어때요, 맛있죠?"
"맛있...."
달고 맛있는 사과였다. 맛있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사요는 먹던 사과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신음을 내며 머리를 감싸쥐다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어느새 웃음을 싹 지운 표정으로 사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 대신에 다른 게 들었지만요. 미안해요."
"...당신...!"
사요는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사요가 쓰러지는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여자는 허리를 숙여, 앞으로 쓰러져 보이지 않는 사요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틀림없는 현상수배범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자신의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여자의 한쪽 팔에는 사과가 든 바구니가 들리고 등 뒤에는 사요가 업혔다.
끙, 소리를 내며 여자는 이를 악물고 산길을 걸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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