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팬픽은 기존 캐릭터 설정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읏차."
비닐봉지를 더 세게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오늘 장을 너무 많이 봤는지 묵직하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면서 히마와리 곁을 지나쳐갔다. 히마와리가 든 비닐봉지는 10리터짜리를 꽉 채운 채 자그마치 10봉지였다. 정작 본인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음만 옮긴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과금을 한것 같기도 하다. 양쪽으로 나눠 들었던 봉지를 한손에 다 끌어안고 주머니를 뒤져서 메모지를 확인했다. 오늘 나데시코가 주문한게 꽤 많다. 뭐, 상관 없겠지. 시키는대로 하면 되니까.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고 보니 한손으로 드는게 더 편하다. 히마와리는 그대로 서커스를 하듯이 한 아름에 봉지들을 쌓아서 집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대충 벗어두고 바닥에 올라서자 그 모습을 보던 나데시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편하게 지내기로 했다고 벌써 신발을 막..."
"시키는대로 다 사왔어요. 확인해보세요."
사쿠라코가 앞으로 히마와리를 하인 취급하듯이 하면 다 물어 뜯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나데시코가 두 손 두 발 다 든지 3일이 지나서였다. 히마와리는 제법 구속에서 많이 벗어난 눈치였다. 말대꾸도 서슴없이 하고 자기 편한 쪽을 먼저 추구했다. 물론 그래도 0순위는 사쿠라코였지만.
"저걸 혼자서 다 들고 왔어?!"
"저 혼자 다녀왔는걸요, 누구랑 갔겠어요."
"아... 그렇긴 한데. 저걸 어떻게 들고 온거야..."
밑이 소란스럽자 위에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숙제를 하고 있던 사쿠라코가 아래로 내려왔다. 히마와리는 머리 너머로 물건을 쌓아올려서 이동중이었다.
"저...저..."
사쿠라코가 다급히 히마와리에게 뛰어들어 절반을 나누어 들었다.
"히마와린 가끔 보면 무슨 로봇 같아."
나데시코가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사쿠라코는 그 말에 괜히 마른 침을 삼켰다.
"영수증은 가져왔지?"
히마와리가 말 없이 영수증을 내밀자 목록을 흘끔 보던 사쿠라코가 휘청거렸다.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응, 나 오늘 쿠키가 먹고 싶어서."
"직접 가서 사먹으면 될 것이지 뭔 재료를!"
"손수 만들어서 먹는게 최고란 말이야. 히마와리는 미각의 여신이니까 한번 시켜보려고."
"제가요...?"
히마와리가 짐을 내려놓고 어리둥절하게 나데시코를 건너다보았다. 그동안 한번 맛 본 음식은 거의 정확하게 재현했으니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설마 쿠키까지 만들 수 있으려고.
"에, 에이, 안될걸."
사쿠라코가 헛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가로저으니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히마와리가 봉지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무게 때문에 탁자가 부러질듯이 덜컹거렸다.
"해볼게요."
"뭐야, 정말?"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히마와리가 적극적으로 두 팔을 걷었다. 사쿠라코는 멍한 표정으로 얼떨결에 심사위원으로 발탁되었고 나데시코는 신이 나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때마침 학원을 마치고 돌아온 하나코가 부엌 앞에서 멀뚱멀뚱 섰다.
"어, 하나코 왔니? 너도 심사위원 해봐. 히마와리의 한계를 시험해보려고."
"한계는 무슨. 지가 먹고 싶어서 시키는거면서."
하나코도 가방을 놓고 사쿠라코 옆에 앉았다. 나데시코는 히마와리에게 갈색 쿠키 하나를 건넸다.
"오늘의 과제야. 먹어봐."
"......"
비장하게 쿠키를 내려다보던 히마와리가 한입 맛보았다. 하나코가 히마와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하던 사쿠라코고 괜히 긴장이 돼서 마른침을 삼켰다. 말없이 맛을 보던 히마와리는 곧 무슨 생각에선지 재료들을 이것저것 꺼내서 순서대로 나열해놓기 시작했다.
"한번 더 맛볼게요."
마치 강아지가 마약을 탐지하듯이 여러번 기억을 더듬어 재료를 꺼내던 히마와리가 이윽고 재료를 하나 둘씩 까기 시작했다. 버터, 설탕, 밀가루, 달걀, 초콜릿, 베이킹 파우더 등등... 초콜릿을 중탕하는 히마와리는 여전사 같았다. 사쿠라코는 열심히 저어가면서 중탕하는 히마와리의 모습에서 이마에 반짝거리는 땀을 보았다. 로봇에게서 땀이 흐를 리가 없겠지만.
한참을 이것 저것 섞었다가, 잘못 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가, 재료를 한쪽에 모았다가를 반복하던 히마와리가 드디어 반죽을 오븐 안으로 직행시켰다.
"오오, 냄새 그럴듯 해."
사쿠라코가 킁킁거리면서 뚫어질 듯 오븐을 바라보았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작품이 공개됐다.
"심사위원 분들, 심사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데시코가 마치 제 것인 양 쿠키를 마음대로 덜어서 하나코와 사쿠라코 앞에 두었다. 한쪽에는 히마와리가 만든 쿠키가, 다른 한쪽에는 다른 쿠키가 놓였다. 히마와리가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이건 뭐야?"
하나코가 방금 꺼내온 쿠키가 아닌 쪽을 가리켰다.
"내가 히마와리한테 맛보라고 준 쿠키. 얼마나 비슷한가 보라고."
"잔인하네... 무슨 쿠키 만들기 대회냐."
사쿠라코가 별 생각 없이 동시에 두개의 쿠키를 하나씩 집어서 입에 털어넣었다. 잠시 멈칫하던 사쿠라코는 어깨를 들썩였다.
"맛있네."
금방 먹고 꿀꺽 삼키더니, 또 양쪽의 쿠키를 사이좋게 씹었다. 부엌에는 사쿠라코가 쿠키를 씹는 소리로 가득 찼다.
"맛있으니까 다들 멍하게 서있지 말고 얼른 먹어."
"뭐야, 비교해보라니까 왜 두개를 동시에 먹고 있어?"
"귀찮아 그런거... 대충 입 안에서 섞이면 그만 아니야? 하나의 맛만 나니까 된거지."
그냥 시중에서 파는 쿠키 맛이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대단한건가? 하나코도 맛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했고, 나데시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흡족해했다.
"아무래도 언니 머릿속에는 메뉴얼이 저장되어있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음식을 이렇게 만들수는 없어..."
하나코가 감탄했다. 어디서 뭐하다가 온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쿠라코의 곁에 이런 똑똑한 친구가 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사쿠라코한테 아까운 친구야.
"오늘부터 히마와리를 우리 집 공식 제빵사로 인정한다."
"또 또, 일 시키려고."
"천만에. 히마와리는 장차 엄청난 요리사가 될게 분명해. 우리가 도와주는거야."
사쿠라코가 혀를 찼다. 하여간 갖다 붙이는것도 잘해요. 히마와리는 아까부터 계속 이쪽이 떠드는 이야기에 멍한 표정이다.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전부터 습관처럼, 원래 그랬던 것 처럼 해오던 일이라 그동안 잘 못느꼈다. 음식을 그대로,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재현할 수 있다는게 이렇게 소름돋는 일이라는 것을. 그것도 몇번 맛본것 만으로...
"아, 이상한거 시키지 말고 해산이나 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사쿠라코가 쿠키 몇개를 챙겼다. 쿠키나 내려놓고 말하지. 하나코도 픽 웃으면서 일어났다.
"뭐해? 올라가자."
사쿠라코가 히마와리의 소매를 잡아당기려다가 멍하게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열심히 해서 손이 아픈가?
"히마와리! 괜찮아?"
"네?! 네, 네..."
그제서야 멍한 정신에서 깨어난 히마와리가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질렀다. 뭐야, 이상해.
"올라가자."
방에 올라온 사쿠라코는 마저 과제를 하려다가 이내 옆으로 치워버렸다. 쿠키로 배가 불러버려서 집중이 안된다. 간만에 마음 잡고 해보려고 했더니, 망할 나데시코.
"저기... 제빵사라는건 쿠키나 빵을 만드는 사람이죠?"
"뭐, 그런거겠지."
"아까 제가 만든 쿠키 맛있었어요?"
"빵집에서나 팔것 같은 맛이었지."
히마와리가 활짝 웃었다.
"그거 칭찬이죠?"
"...응?! 아니 뭐..."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히마와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달음에 사쿠라코에게 다가가 손을 꽉 맞잡았다.
"흐엑! 뭐야!"
"솔직하게 말해줘요, 정말 맛있었어요?"
"왜이렇게 집요해? 그냥 너 평소에 음식 만드는것 같은 그런거잖아."
가만히 잡고만 있으면 참 좋을텐데 손을 자꾸 만지작거린다. 손바닥에서 땀이 날것 같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이, 이거 놓고..."
히마와리의 눈동자에서 맑은 구슬 하나가 또르륵 굴러갔다. 익숙하지 않은 텐션이다.
"마, 맛있었어! 맛있었다고!"
됐겠지, 싶었는데 이번에는 사쿠라코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난데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 허둥대면서 허공에 발차기만 하던 사쿠라코가 결국 다리에 힘을 주고 거세게 제동을 걸었다.
"대체 왜이러는거야?"
"모르겠어요, 기분이 이상해요."
"난 니가 더 이상해..."
히마와리는 사쿠라코가 제동을 거는 대로 얌전히 멈춰섰다.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쿠키를 먹어주는 하나코와 사쿠라코의 모습이..."
"뭐라는거야?"
"저, 제빵사 해볼래요."
"해. 우리집에서 마음껏."
나데시코의 술수에 넘어간건가. 그런데 이번에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상기돼서 빨개진 얼굴, 계속 귀에 걸려있는 입고리. 오늘의 히마와리는 정말 이상하다.
"진짜 제빵사 말이에요!"
"....뭐?"
히마와리가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해온 음식도 물론 뿌듯했지만 오늘이 가장 뿌듯했다. 자꾸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다. 반죽을 누르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오븐 앞에서 쿠키를 기다리고 싶다.
"제빵사가 돼서 맛있는 쿠키 많이 만들어드릴게요."
방긋 웃는 히마와리 모습에서 사쿠라코는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나데시코의 술수대로 흘러가고 있어서가 아니다. 갑자기 속이 쓰리다.
그대로 펼쳐두었던 교과서가 깊은 한숨을 쉬면서 입을 닫았다. 히마와리의 손을 맞잡고 있던 사쿠라코의 손에 힘이 빠진다. 누군가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해야 정상일텐데...
"...하지 마."
사쿠라코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활짝 웃고 있던 히마와리의 표정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왜 그래요...?"
"제빵사는 뭐 아무나 되는 줄 알아?"
"열심히 공부해야죠. 당연한 말을..."
"누군 머리 좋아서 좋겠네."
방금 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서 입을 막았다. 서둘러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전의 말은 심했다. 히마와리의 얼굴을 마주 볼수가 없다. 히마와리의 발 끝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사쿠라코의 손을 놓았다.
"갑자기 왜 그러는거예요? 저는... 제빵사가 되면 안돼요?"
"......"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고싶은게 생겼는데... 방금 전의 그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해요...?"
히마와리의 발치가 부르르 떨린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어서 수습해야 하는데...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 옆에만 있어. 이대로 그냥, 우리 가족이랑 있어."
"명령하지 마세요. 명령하지 않겠다고 한건 사쿠라코였어요."
"싫어, 싫다고! 전부 다 싫어!"
생각 따로 말 따로다. 히마와리가 손으로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뭐가 문제예요...?"
"...나도 몰라."
사쿠라코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던 히마와리는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제일 축하받고 응원받고 싶은 친구였는데, 그렇게 질색이라는 표정으로 대할줄은 몰랐다.
"사쿠라코..."
거실로 내려간 사쿠라코는 우두커니 소파에 앉았다. 무슨 감정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적당히 응원이나 해주고 끝낼 것이지, 서로 얼굴을 붉히게 만들다니.
"나는.... 나는...."
사쿠라코가 입을 움찔대다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나는 멍청이인데."
아까 히마와리의 쿠키를 처음 먹었을때 느낌이 되살아났다. 가슴이 저릿했다. 당장 팔아도 될 것 같은 훌륭한 쿠키였지만, 이상하게 칭찬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음식을 내놓고 그렇게 긴장한 히마와리는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모습에 원하는 답을 들려주기가 싫었다. 괜히, 그랬다.
가슴을 팡팡 내려쳤다. 과제를 해가지 않아서 야단 맞으면서도, 말썽을 부려서 혼나면서도, 수업을 제대로 안따라가서 따로 불려가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이었다. 드디어 솔직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히마와리도 하는데 나는 뭐야...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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