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는 앞서 두번 거절했다.
늘 당차고 낭랑했던 태도는 어디로 가고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 모습이 낮설었는지, 아니면 마음 깊숙히 숨어있는 양심이라는 것이 꿈틀댔던 탓인지, 나 역시 선배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맹세코 예전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이용해보려고 했다거나 장난이라던가... 추호도 없었다.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동안에 내 머릿 속에는 온통 지난날의 쿄코 선배 뿐이었다. 어느날 보았다. 함께 걷다가 내가 눈을 떼지 못하는 물건을 등 뒤에서 건넸을때.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싱긋 미소를 짓던 때. 내가 쫓던 것 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보물을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조용히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건물 건너편 유리에 비춰진 선배의 얼굴은 기뻐보였고, 또한 참담해보였다. 보이지 않는 캄캄한 길을 빛 하나에 의존해서 쫓는 사람 처럼, 그랬다.
"선배... 정말 안돼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깨끗이 지우리라. 선배는 신나게 밥을 먹다가 문득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덩달아 내려다 본 창 밖 사거리에는 신호등이 켜지고 있었다. 빨간 불에서 초록 불로.
"치나츠."
선배가 영롱하게 방긋 웃었다.
"미안해."
선배의 마음까지는 초록 불로 물들이지 못한 내 고백은 허공에 멤돌아 우리가 자리를 끝낼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왜, 날 좋아한다면서 왜 그토록 아프길 원하는걸까. 아직도 좋아한다면서 왜 스스로에게 칼을 대고 있을까.
쿄코 선배는 끝까지 밝고 영롱했다.
그리고 참담해보였다.
"왜 그럴까, 쿄코...."
아카리가 자판기에서 꺼낸 음료수를 나에게 건네고 커피를 땄다. 이제 블랙 커피를 제법 물처럼 마시는 아카리였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세번이나 거절한건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해."
"그걸 모르겠어. 너라면, 곁에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주면 굉장히 기쁘지 않겠어?"
"당연히 기쁘겠지."
"도대체..."
몇년이 지나도 알 수 없는 사람. 음료수를 단번에 들이켰다.
"음... 근데 사실 난 되게 놀랐어. 쿄코가 왜 갑자기 좋아졌을까, 해서."
아카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료수 캔을 손 안에서 구겼다. 그래 확실히 나는 유이 선배가 좋았다. 매일 함께하고 싶었다.
"갑자기가 아니야."
하지만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닿지 않는, 자꾸 부족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곰팡이처럼 퍼져나가는 그 알 수 없는 기분을 결국 유이 선배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별을 쫓는 기분이라."
밝지만 어두웠던 지난 날 쿄코 선배의 눈빛을 떠올렸다. 줄곧 나는 그 길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쿄코 선배가 좋아진 이유도 거기에 있을것만 같았다.
나의 모습이 그 눈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쳐서 흘러내릴것 같은 그 어둠이...
"아마 말해도 모를거야."
"아, 응... 도움이 못돼서 미안해."
"아니야. 들어줘서 고마워."
고개를 들었다. 쿄코 선배가 또 어디선가 내 눈빛을 읽어내고선 선물을 건넬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외로운 표정으로 웃을것만 같았다.
이거 갖고 싶었잖아, 하면서.
빙수 그릇에 하얗게 깔린 얼음이 어느새 곱디 고운 눈으로 내리는 계절이었다. 연말 파티를 하기 위에 오락부가 다시 모였다.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전원을 집에 초대했다. 언니가 사둔 음료수와 케이크, 갖가지 간식들이 식탁을 채웠다.
"집 빌려줘서 고마워, 치나츠."
유이 선배가 음료수를 따라주면서 웃었다.
"또 쿄코 덕분에 이렇게 모였네."
"이렇게 모여서 놀면 좋잖아? 밖에 눈도 오고 따뜻하게 분위기 잡아서."
쿄코 선배는 코타츠에서 얼굴만 내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모임을 조장한건 쿄코 선배, 때마침 집이 비어 공간을 제공한건 나. 하지만 누구 집 비는 곳 있어, 하고 쿄코 선배가 손을 들며 물어올때 내 손이 갑자기 들린건 의문이었다. 집이 빈다는걸 안 것은 그 날 집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예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맞물리려고 하듯이 자연스러웠다. 무언가가 맞물리려는 듯이....
"치나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카리가 나에게 포크를 내밀었다. 어느새 촛불이 꽂힌 케이크도 대령했다.
"아카리, 불!"
쿄코 선배는 어느새 일어나 폭죽을 들고 서있었다. 아카리가 재빨리 불을 끄고, 우리는 모두 일렁이는 촛불을 마주했다.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내내내년에도 함께하자!"
쿄코 선배의 외침과 함께 폭죽이 터졌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듯이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그 이후에는 본인 자유였다. 내 집은 놀이공원이라도 된 듯이 자유이용권을 끊은 세 명의 손님이 점령했다. 나는 내 집이라서 그런건지, 어쩐지 잘 어울릴수가 없었다. 두 손을 꽉 맞잡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쿄코 선배는 그렇게도 짖굳었던 내가 질리지도 않는지 신경쓰지 않고 평소대로 유이 선배에게 구박을 받았다.
나같은게 신경쓰일 리가 없겠지. 좋아한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세번씩이나 뻥뻥 차올렸으니.
"아... 과자 다 떨어졌어."
아카리가 과자 봉지를 탈탈 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사올게. 혹시 더 먹고싶은거 있어?"
"아이스크림 먹고싶어!"
쿄코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카리가 오케이 사인을 내리고 현관으로 나가려다가 도로 들어왔다.
"유이, 같이 갈래?"
"나? ...응, 그러지 뭐."
아카리가 유이 선배와 함께 나가다가 나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난 정말 민폐다. 유이 선배에게도, 아카리에게도, 쿄코 선배에게도....
"아아, 재밌다. 그치?"
쿄코 선배가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에 나도 긴장이 풀려 헛웃음 지었다.
"그러다가 저번에 캠핑 갔을때 처럼 배부르다고 징징대는건 아니죠?"
"아직 한창이지! 더 먹을수 있어."
작은 배를 두드리면서 선배가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덩달아 웃어주지 못하고 남은 케이크 크림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치나츠는 별이야."
문득, 그 말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건물에 비치던 그 표정일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릴수가 없었다.
"미안해. 힘들게 말한건데 번번이 거절해서."
꽉, 입술을 깨물었다.
"왜... 거절했어요?"
"말했잖아. 치나츠는 별이라고."
"그러니까 왜...."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이윽고 돌아 본 쿄코 선배는, 나에게 선물을 건네줄 것 처럼 웃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다. 시도 때도 없이 실실, 하하호호, 사람이 그렇게 바보로 보일까.
"지금... 속으로 비웃고 있죠?"
"응?"
"왜 이제와서 이러냐고, 거 참 꼴 사납다고, 비웃고 있잖아요!"
"아, 아니, 난... 미안. 화났어?"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깨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쿄코 선배의 손일 것이다.
"미안해요. 놀러왔는데 소리질러서..."
선배가 조금씩 내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우는 줄 알고 달래주려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눈물이 말라버려서 눈이 뻐근할 정도였다. 가슴에서만 불이 치솟았다. 이런 답답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왜 갑자기 다시 보기 시작해서는, 일을 이렇게 만드는지.
"사실... 어느날 봤어. 치나츠가 유이를 어떻게 보는지."
"....에?"
손을 슬쩍 내렸다. 선배는 이제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무, 완전히 무(無)의 상태였다. 생각을 비운듯이, 선배는 차분히 보따리를 풀었다.
"나보다 유이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는건 알고 있었어. 내가 너무 치근덕대기도 했고, 유이의 늠름한 모습은 나도 좋아하니까. 그런데 유이를 좋아한다던 치나츠의 표정은... 매번 너무 괴로워보였어."
"그건..."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야, 정말 좋아서 홍조를 띠고 있는 순간에도 뒷면이 보였어."
아무런 말도 할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날 뿐더러, 그걸 지켜봤다니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것 같아 무안해졌다.
"그런 표정을 봤는데 내가 어떻게 널 받아들일 수 있었겠어. 난 치나츠가 더 다가가서 웃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정말 바보 아니야."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아주 많다. 나는 결국 선배와 완전히 마주보고 앉았다. 선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는 지금 자기 표정이나 좀 보시지. 그렇게 말할 자격 있어요? 가끔씩 세상 혼자 사는것 같이 외로운 얼굴이나 하면서."
"치나츠....?"
"내가 그런 표정을 짓는게 안쓰러워서, 더 응원해주고 싶어서, 그저 보듬어주는 마음 이상으로는 다가갈수가 없다?"
"아... 아니..."
"그렇게 되면 자꾸 선을 넘으려는 나는 뭐가 되는거예요, 도대체...?"
답은 정해져있다. 쓰레기. 양심도 없는 년. 나는 그런 사람이다. 유이 선배가 좋을 적엔 그렇게 멸시하고 징그러워하던 사람을, 나와 비슷한 부분을 보았다고 해서 덜컥 마음에 품어버렸다. 짝사랑에 지쳐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돌렸다.
아아, 쿄코 선배가 나를 거절한 이유는 바로 그것일 터이다. 사람은 아우라를 벗어날수가 없다. 나는 그런...
"아니야. 그런거 아니니까."
바닥이 슬슬 일렁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몸이 앞으로 스르르 무너졌다. 손목이 따뜻했다. 코 끝에 노란색 머리카락이 닿았다.
"나는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받아들일거고, 그렇게 행동할거고, 그렇게 웃을거야."
그 숨이 내 귓가에 멤돌았다. 또 세상에서 혼자만 외로운 듯이.
그러나.
"오래걸려서 미안해."
별을 쫓는 기분이라. 아마 말해도 모를거야. 아카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한 그 별과 선배가 생각하는 그 별이 같을까. 이 사람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생각할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 있던 톱니바퀴가 맞물려 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몸을 조금 일으켰다. 선배는 활짝 웃었다. 그렇게 소원하던, 눈으로만 쫓던 무언가를 찾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다녀왔.... 어...."
어느새 현관 문이 열리고 유이 선배와 아카리가 들어오는 중이었다. 유이 선배는 앞서 들어오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자리에 굳었다. 아차 싶어서 몸을 허둥지둥 일으키려고 할때에는 이미 유이 선배의 손에 하드바 하나가 쥐여진 뒤였다.
"쿄코!! 또 치나츠한테!!"
"악! 아, 아니, 들어봐 유이!"
"다시는 둘만 있게 하지 않을거니까, 허튼 수작 못부리게!"
"먹는 걸로 장난치면 못써 유이땅!"
"시끄러! 이상하게 부르지 마!"
곧 잡아먹힐 닭 처럼 후닥닥 꽁지를 빼는 쿄코 선배의 모습에 옆에 있던 아카리를 붙잡고 허리가 빠지도록 웃었다. 아카리도 함께 웃다가 내 손에 자기 손을 살포시 얹었다.
"무언가 찾은 눈빛인데?"
웃느라 눈가에 맽힌 눈물을 훔쳤다.
응, 둘 다 찾았어. 그토록 바라던 빛을.
-FIN.
늘 당차고 낭랑했던 태도는 어디로 가고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 모습이 낮설었는지, 아니면 마음 깊숙히 숨어있는 양심이라는 것이 꿈틀댔던 탓인지, 나 역시 선배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맹세코 예전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이용해보려고 했다거나 장난이라던가... 추호도 없었다.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동안에 내 머릿 속에는 온통 지난날의 쿄코 선배 뿐이었다. 어느날 보았다. 함께 걷다가 내가 눈을 떼지 못하는 물건을 등 뒤에서 건넸을때.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싱긋 미소를 짓던 때. 내가 쫓던 것 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보물을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조용히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건물 건너편 유리에 비춰진 선배의 얼굴은 기뻐보였고, 또한 참담해보였다. 보이지 않는 캄캄한 길을 빛 하나에 의존해서 쫓는 사람 처럼, 그랬다.
"선배... 정말 안돼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깨끗이 지우리라. 선배는 신나게 밥을 먹다가 문득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덩달아 내려다 본 창 밖 사거리에는 신호등이 켜지고 있었다. 빨간 불에서 초록 불로.
"치나츠."
선배가 영롱하게 방긋 웃었다.
"미안해."
선배의 마음까지는 초록 불로 물들이지 못한 내 고백은 허공에 멤돌아 우리가 자리를 끝낼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왜, 날 좋아한다면서 왜 그토록 아프길 원하는걸까. 아직도 좋아한다면서 왜 스스로에게 칼을 대고 있을까.
쿄코 선배는 끝까지 밝고 영롱했다.
그리고 참담해보였다.
"왜 그럴까, 쿄코...."
아카리가 자판기에서 꺼낸 음료수를 나에게 건네고 커피를 땄다. 이제 블랙 커피를 제법 물처럼 마시는 아카리였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세번이나 거절한건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해."
"그걸 모르겠어. 너라면, 곁에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주면 굉장히 기쁘지 않겠어?"
"당연히 기쁘겠지."
"도대체..."
몇년이 지나도 알 수 없는 사람. 음료수를 단번에 들이켰다.
"음... 근데 사실 난 되게 놀랐어. 쿄코가 왜 갑자기 좋아졌을까, 해서."
아카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료수 캔을 손 안에서 구겼다. 그래 확실히 나는 유이 선배가 좋았다. 매일 함께하고 싶었다.
"갑자기가 아니야."
하지만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닿지 않는, 자꾸 부족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곰팡이처럼 퍼져나가는 그 알 수 없는 기분을 결국 유이 선배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별을 쫓는 기분이라."
밝지만 어두웠던 지난 날 쿄코 선배의 눈빛을 떠올렸다. 줄곧 나는 그 길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쿄코 선배가 좋아진 이유도 거기에 있을것만 같았다.
나의 모습이 그 눈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쳐서 흘러내릴것 같은 그 어둠이...
"아마 말해도 모를거야."
"아, 응... 도움이 못돼서 미안해."
"아니야. 들어줘서 고마워."
고개를 들었다. 쿄코 선배가 또 어디선가 내 눈빛을 읽어내고선 선물을 건넬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외로운 표정으로 웃을것만 같았다.
이거 갖고 싶었잖아, 하면서.
빙수 그릇에 하얗게 깔린 얼음이 어느새 곱디 고운 눈으로 내리는 계절이었다. 연말 파티를 하기 위에 오락부가 다시 모였다.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전원을 집에 초대했다. 언니가 사둔 음료수와 케이크, 갖가지 간식들이 식탁을 채웠다.
"집 빌려줘서 고마워, 치나츠."
유이 선배가 음료수를 따라주면서 웃었다.
"또 쿄코 덕분에 이렇게 모였네."
"이렇게 모여서 놀면 좋잖아? 밖에 눈도 오고 따뜻하게 분위기 잡아서."
쿄코 선배는 코타츠에서 얼굴만 내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모임을 조장한건 쿄코 선배, 때마침 집이 비어 공간을 제공한건 나. 하지만 누구 집 비는 곳 있어, 하고 쿄코 선배가 손을 들며 물어올때 내 손이 갑자기 들린건 의문이었다. 집이 빈다는걸 안 것은 그 날 집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예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맞물리려고 하듯이 자연스러웠다. 무언가가 맞물리려는 듯이....
"치나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카리가 나에게 포크를 내밀었다. 어느새 촛불이 꽂힌 케이크도 대령했다.
"아카리, 불!"
쿄코 선배는 어느새 일어나 폭죽을 들고 서있었다. 아카리가 재빨리 불을 끄고, 우리는 모두 일렁이는 촛불을 마주했다.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내내내년에도 함께하자!"
쿄코 선배의 외침과 함께 폭죽이 터졌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듯이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그 이후에는 본인 자유였다. 내 집은 놀이공원이라도 된 듯이 자유이용권을 끊은 세 명의 손님이 점령했다. 나는 내 집이라서 그런건지, 어쩐지 잘 어울릴수가 없었다. 두 손을 꽉 맞잡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쿄코 선배는 그렇게도 짖굳었던 내가 질리지도 않는지 신경쓰지 않고 평소대로 유이 선배에게 구박을 받았다.
나같은게 신경쓰일 리가 없겠지. 좋아한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세번씩이나 뻥뻥 차올렸으니.
"아... 과자 다 떨어졌어."
아카리가 과자 봉지를 탈탈 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사올게. 혹시 더 먹고싶은거 있어?"
"아이스크림 먹고싶어!"
쿄코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카리가 오케이 사인을 내리고 현관으로 나가려다가 도로 들어왔다.
"유이, 같이 갈래?"
"나? ...응, 그러지 뭐."
아카리가 유이 선배와 함께 나가다가 나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난 정말 민폐다. 유이 선배에게도, 아카리에게도, 쿄코 선배에게도....
"아아, 재밌다. 그치?"
쿄코 선배가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에 나도 긴장이 풀려 헛웃음 지었다.
"그러다가 저번에 캠핑 갔을때 처럼 배부르다고 징징대는건 아니죠?"
"아직 한창이지! 더 먹을수 있어."
작은 배를 두드리면서 선배가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덩달아 웃어주지 못하고 남은 케이크 크림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치나츠는 별이야."
문득, 그 말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건물에 비치던 그 표정일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릴수가 없었다.
"미안해. 힘들게 말한건데 번번이 거절해서."
꽉, 입술을 깨물었다.
"왜... 거절했어요?"
"말했잖아. 치나츠는 별이라고."
"그러니까 왜...."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이윽고 돌아 본 쿄코 선배는, 나에게 선물을 건네줄 것 처럼 웃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다. 시도 때도 없이 실실, 하하호호, 사람이 그렇게 바보로 보일까.
"지금... 속으로 비웃고 있죠?"
"응?"
"왜 이제와서 이러냐고, 거 참 꼴 사납다고, 비웃고 있잖아요!"
"아, 아니, 난... 미안. 화났어?"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깨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쿄코 선배의 손일 것이다.
"미안해요. 놀러왔는데 소리질러서..."
선배가 조금씩 내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우는 줄 알고 달래주려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눈물이 말라버려서 눈이 뻐근할 정도였다. 가슴에서만 불이 치솟았다. 이런 답답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왜 갑자기 다시 보기 시작해서는, 일을 이렇게 만드는지.
"사실... 어느날 봤어. 치나츠가 유이를 어떻게 보는지."
"....에?"
손을 슬쩍 내렸다. 선배는 이제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무, 완전히 무(無)의 상태였다. 생각을 비운듯이, 선배는 차분히 보따리를 풀었다.
"나보다 유이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는건 알고 있었어. 내가 너무 치근덕대기도 했고, 유이의 늠름한 모습은 나도 좋아하니까. 그런데 유이를 좋아한다던 치나츠의 표정은... 매번 너무 괴로워보였어."
"그건..."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야, 정말 좋아서 홍조를 띠고 있는 순간에도 뒷면이 보였어."
아무런 말도 할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날 뿐더러, 그걸 지켜봤다니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것 같아 무안해졌다.
"그런 표정을 봤는데 내가 어떻게 널 받아들일 수 있었겠어. 난 치나츠가 더 다가가서 웃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정말 바보 아니야."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아주 많다. 나는 결국 선배와 완전히 마주보고 앉았다. 선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는 지금 자기 표정이나 좀 보시지. 그렇게 말할 자격 있어요? 가끔씩 세상 혼자 사는것 같이 외로운 얼굴이나 하면서."
"치나츠....?"
"내가 그런 표정을 짓는게 안쓰러워서, 더 응원해주고 싶어서, 그저 보듬어주는 마음 이상으로는 다가갈수가 없다?"
"아... 아니..."
"그렇게 되면 자꾸 선을 넘으려는 나는 뭐가 되는거예요, 도대체...?"
답은 정해져있다. 쓰레기. 양심도 없는 년. 나는 그런 사람이다. 유이 선배가 좋을 적엔 그렇게 멸시하고 징그러워하던 사람을, 나와 비슷한 부분을 보았다고 해서 덜컥 마음에 품어버렸다. 짝사랑에 지쳐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돌렸다.
아아, 쿄코 선배가 나를 거절한 이유는 바로 그것일 터이다. 사람은 아우라를 벗어날수가 없다. 나는 그런...
"아니야. 그런거 아니니까."
바닥이 슬슬 일렁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몸이 앞으로 스르르 무너졌다. 손목이 따뜻했다. 코 끝에 노란색 머리카락이 닿았다.
"나는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받아들일거고, 그렇게 행동할거고, 그렇게 웃을거야."
그 숨이 내 귓가에 멤돌았다. 또 세상에서 혼자만 외로운 듯이.
그러나.
"오래걸려서 미안해."
별을 쫓는 기분이라. 아마 말해도 모를거야. 아카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한 그 별과 선배가 생각하는 그 별이 같을까. 이 사람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생각할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 있던 톱니바퀴가 맞물려 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몸을 조금 일으켰다. 선배는 활짝 웃었다. 그렇게 소원하던, 눈으로만 쫓던 무언가를 찾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다녀왔.... 어...."
어느새 현관 문이 열리고 유이 선배와 아카리가 들어오는 중이었다. 유이 선배는 앞서 들어오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자리에 굳었다. 아차 싶어서 몸을 허둥지둥 일으키려고 할때에는 이미 유이 선배의 손에 하드바 하나가 쥐여진 뒤였다.
"쿄코!! 또 치나츠한테!!"
"악! 아, 아니, 들어봐 유이!"
"다시는 둘만 있게 하지 않을거니까, 허튼 수작 못부리게!"
"먹는 걸로 장난치면 못써 유이땅!"
"시끄러! 이상하게 부르지 마!"
곧 잡아먹힐 닭 처럼 후닥닥 꽁지를 빼는 쿄코 선배의 모습에 옆에 있던 아카리를 붙잡고 허리가 빠지도록 웃었다. 아카리도 함께 웃다가 내 손에 자기 손을 살포시 얹었다.
"무언가 찾은 눈빛인데?"
웃느라 눈가에 맽힌 눈물을 훔쳤다.
응, 둘 다 찾았어. 그토록 바라던 빛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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