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항상 미세하게 나보다 앞서서 걸었다.
"나오~ 그래서 말이야~"
옆에 있는 듯, 조금 앞서고 있는 나오는 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린한테 네일을 권했었는데, 그런건 부끄럽다면서~..."
분명 내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몇마디의 대꾸가 오기도 하고, 웃기는지 배꼽이 빠져라 웃기도 했다. 가끔 내가 말을 끊으면 고개를 옆으로 돌려 흘끔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악을 쓰며 걸음을 빨리 한 적이 있었지만 나오가 더 빨랐다. 우리는 어느새부턴가 경주를 하듯이 걷기 시작했고, 왠지 갈 길이 바빠보이는 나오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오~"
나오에게 손을 뻗어보았으나 나오는 무언가에 발이 걸린듯이 휘청하며 내 손을 피했다. 나오가 일으킨 작은 바람이 내 손을 할퀴고 지나갔다. 한순간 숨이 막혔다.
"나오. 그럴거면 먼저 가."
멍청하게 나를 돌아보는 표정을 옆으로 밀어내고 나는 오던 길을 돌아서 갔다. 급하게 쫓아오려는 나오에게 멈춰서서 가방을 휘둘렀다.
"넌 그리로 가. 난 이쪽으로 갈테니까."
"아니, 갑자기 왜?"
왜 그럴까, 정확한 이유를 찾으려 머릿 속 서랍에서 쌓아두었던 것들을 꺼내보았다. 내 주변으로 수많은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마땅한 이유는 없었다. 숨소리만 오가는 순간, 나는 그로부터 몇 분 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랑 있으면 숨이 차."
원래부터 나오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많았지만, 곧 트리아드 프리머스의 공연이 재개되는 스케쥴을 받았기에 그 시간은 조금 더 늘어났다. 학교가 끝나고 연습실로 가는 길,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시도 떨어질 틈이 없었다.
덕분일 것이다. 언제부터 그런 나오를 의식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오는 훨씬 이전부터 나보다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거나 혹은, 최근래 들어서 그렇게 된걸수도 있겠다. 걷는 속도를 맞춰달라고 하면 바보같으면서도 착한 나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속도를 맞춰줬을 것이다. 또 나도 모르게 이상한 것에 휘둘려 벌컥 화를 내버렸다. 빙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며, 성이 난 발걸음이 제 풀에 지쳐 힘이 빠졌을때 즈음, 다음 날 연습실에서 만나면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성급했다. 왜 그랬는지 모를 만큼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다음날, 무심하게 말했는데도 학교를 마치고 연습실에 도착하니 늘 그랬듯 나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는 나를 보더니 무언가를 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캔음료를 건넸다.
"숨 찬건 괜찮아졌어?"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캔음료를 받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혹시 다시 몸이 안좋아진거야?"
다시 답답해지기 시작하니 질문 하나하나가 너무 바보같고 하찮게 느껴졌다. 나는 정말로 숨이 찬것도, 몸이 나빠진것도 아니었다.
"정말 너는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줘야할지 모르겠어."
나오는 입을 한번 꾹 다물었다가 나에게 외면당한 캔음료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대체 어제부터 왜그러는거야? 아픈게 아니라면 뭔데?"
"나라고 뭐 만년 아프기만 한 줄 알아? 이제 신경 안써도 되잖아."
그동안 나오와 린이 나에게 베풀었던 걱정을 전부 짓밟은 꼴이 되어버렸다. 순간적으로 그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는 린이 떠올랐다. 살짝 섬뜩해졌다. 린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나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주워담을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나오를 쏘아보니, 나오가 자기 머리를 헝클였다.
"이유를... 이유를 말해줘. 또 내가 뭘 잘못한거야?"
"'또'라니, 무슨..."
이야기가 길어질것 같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득 벽면에 설치된 커다란 거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거울에 비춰진 나오의 표정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런 표정만 보여주고, 너도 참 너무해.
"...일단 연습 끝나고 이야기하자. 곧 린도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나오가 어디에선가 낡은 플레이어를 가져왔다.
"원래 쓰던거 조금 손봐야된대서 예전에 쓰던거 가져왔어. 먼지 좀 쌓였던건데 괜찮을거라고..."
안물어봤거든. 가방을 구석에 던져두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나오가 플레이어를 콘센트에 연결하다가 발을 삐끗해서 옆으로 넘어졌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을 뻔한 표정을 간신히 지웠다. 눈치도 없고 주변 사람 돌아볼 줄도 모르고, 음식점에 가면 상품으로 나온 피규어나 들여다보는 유치한 아이. 쌤통이다, 잠시나마 생각을 돌리며 나오를 있는 힘껏 미워했다. 이따가 연습이 끝나고 이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주기 위해 곱씹고 또 곱씹었다.
린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되는대로 먼저 연습을 시작했다. 나오가 음악을 틀었고 우리는 음악에 맞춰서 거울을 보고 안무를 되뇌었다. 집중하기 위해 억지로 동작을 크게 했더니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맽혔다. 두텀이 끝나고 잠시 쉬었다. 모든 것이 대화 한마디도 없이 이루어졌다. 나는 어느새 묵직한 공기에 어느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간만에 조용히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나오가 플레이어를 돌리러 간 사이에 잠시 주저앉아서 땀을 닦았다. 나오의 뒷모습에 아까 나오가 했던 말이 멤돌았다. '또'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 저번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나?
"어... 이거 왜 이러지?"
나오가 찰칵찰칵 플레이어를 다루는 폼이 어쩐지 불안해보였다. 슬그머니 일어나 나오에게 다가갔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보니 플레이어 뒤쪽에서 연기가 조금씩 나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깊게 깔려있던 침묵 속에서,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작게 소리가 나왔다.
"아, 연기..."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나오가 내 쪽으로 홱 돌아섰다. 나오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나오가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쩐히 잔뜩 굳은것 같은 나오는 그렇게, 잘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내 귀를 꽉 막았다.
나오와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오의 이마에서 땀 한방울이 턱으로 도르륵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내 귀를 막고 있는 나오의 손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짝, 짝짝, 짝, 카렌, 이쪽이야!
"카렌, 여기야 여기!"
눈 앞이 캄캄했다. 내 눈을 막은 수건은 하나의 룰이었다. 어렸을 적에 나와 나오, 그리고 친구들은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술래가 되는 놀이를 즐겼다. 좁은 방에서 헐떡이면서 주고받는 눈치게임은 정말 짜릿했다. 서로 잡히지 않기 위해 다른 친구가 있는 쪽으로 인형같은걸 던져 술래를 유도하기도 하거나 술래가 너무 갈피를 잡지 못하면 박수를 쳐서 힌트를 주기도 했다. 나는 유독 술래에 약해서 늘 바닥을 기면서 우왕좌왕했다. 아마 나오가 그런 내 모습에 제일 배꼽이 빠져라 웃었을 것이다.
"카렌, 나 여기있다!"
나오가 약올리며 박수를 쳤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일제히 소리를 멈춘 것이었다. 아, 술래 정말 싫다.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잔뜩 긴장하면서 어디에서 미세한 소리가 나나 집중하고 있었을 때였다.
"왁!"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친구들이 꺄르르 웃어댔다. 그런데 나는 손과 다리가 떨리면서 숨이 가빠졌다. 조심스럽게 눈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풀었다.
"어, 아직 게임 안끝났는데? 카렌 반칙이야!"
바로 옆에서 짜증나는 두꺼운 눈썹과 개털같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게 누군지 생각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 스스로도 방금 전에는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벌컥벌컥 빠르게 뛰면서 내 사고회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카렌? 괜찮아?"
나에게 다가오는 그 작은 손을 쳐냈다.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왜 놀래켜?"
"...어, 어??"
"왜 사람 놀래키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오가 멍한 표정으로 나에게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미, 미안. 많이 놀랐어?"
그 말을 무시하고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멋대로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심장이 조금 따끔했다. 나는 많이 약했다. 작은 일에도 숨이 차는 일이 잦았다. 아마 나오는 그때까지는 그걸 몰랐을 것이다.
이후 나오는 내 집에 찾아와 사과했다.
"다시는 놀래키지 않을게."
어린 나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나오를 끌어안으며 같이 울었다.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미안해, 속으로 수없이 사과했다. 나오의 품은 내 눈물샘을 쉴새없이 자극했다.
"카렌? 괜찮아?"
나오의 눈동자에 멍한 내 표정이 가득 담겼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귀를 따뜻하게 품던 나오의 손이 떠나갔다. 침묵이 깨졌다.
"와, 생각보다 크게 터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조금 낡았다 했더니, 먼지가 꽤 쌓였었던것 같은데."
나오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서 플레이어를 만지작거렸다. 작은 폭발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잠시 다른 세상에 있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연습실도, 이 상황도, 나오도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놀란것 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나오가 흠칫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오, 카렌, 미안. 많이 늦었지?"
그때 문이 열리고 린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러다가 주저앉아있는 나와 엉거주춤한 나오, 조금 연기가 나는 플레이어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헉, 놀란 숨을 참았다.
"무슨 일 있었어? 왜그래?"
"아... 응... 플레이어가 조금 낡아서. 괜찮아. 별 일 없었어."
린이 팔을 걷고 직접 플레이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플레이어엔 별 이상 없는데.... 어?"
린이 고개를 콘센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오가 곧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연결이 안되어있었네. 잘 꽂았어야지."
린이 조금 꾸짖는 표정으로 나오에게 플레이어 선을 흔들어보였다.
멋쩍어하는 나오를 뒤로하고 린이 나를 일으켰다.
"많이 놀랐구나. 괜찮아?"
"응..."
사실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터지는것 보다도 나에게 다급하게 향하는게 우선이었던 나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단무지 눈썹이 그렇게 일그러지는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나저나, 어쩌지? 이 상태로는 연습을 못하는데..."
우리 셋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결국 나름 연장자인 나오가 총대를 맸다.
"옆 연습실 빌릴수 있는지 물어볼게."
단무지 눈썹이 축 처진 모습을 보며 나는 픽 웃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오늘 수고했어. 내일 봐."
린이 손을 흔들면서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나오는 웬일로 나보다 앞서지 않고 조금 뒤에서 걸었다.
"저... 카렌, 오늘은 이쪽 길로 가는거야?"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조금 괘씸하다.
"아까는 안놀랐어?"
일부러 돌아서지 않고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놀랐어.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거든..."
"마, 많이 놀랐어? 괜찮았어?"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웅크리니 나오는 나의 조금 뒤에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속으로 조금 웃었다. 이런것도 나름 짜릿하고 기분이 좋다.
"미안해. 내가 아까 콘센트에 꽂으면서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응..."
"아으... 카렌..."
나오가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나오의 팔과 살짝 스치는 순간,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오의 팔을 잡고 숨을 모두 토해내면서 웃었다. 나오는 어리둥절해하며 굳어있더니 곧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볼을 있는 힘껏 부풀렸다.
"아, 이런 장난 좀 그만 쳐! 놀랐잖아!"
"미안, 큽, 근데 나오 너무 재밌어."
"아까까지만 해도 말도 안걸더니."
실컷 다 웃고 숨을 골랐다. 눈물을 걷어내니 나오가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오."
"왜, 이번엔 또 뭐."
"고마워. 아까 귀 막아줘서."
"....어? 어, 응... 그래."
볼 부풀린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풀려서는 괜히 시선을 다른 곳이 두는게 느껴졌다.
"이런 길 걸을때도 조금 불안하다고. 걷다가 뭐라도 튀어나와서 바보같이 그때처럼 화들짝 놀랄까봐..."
정말 빨리도 알려준다. 급하게 변명하듯이 더듬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는 나오의 팔에 팔장을 끼웠다. 나오가 움찔하면서 이후에 나올 말을 아꼈다.
"나오는 정말 상냥해."
"거짓말 하지 마."
"응, 그만할게."
"야...!"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급하게 내 귀를 막아주던 나오는, 이제 잊지 않고 내 바로 옆에서 걸어줄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아득히 멀리에서 울려퍼지는 박수 소리와 나오의 울음소리를 나는 간신히 기억해냈다.
"....아!"
"아, 깜짝아. 왜그래?"
그러고보니 잊고 있던게 있었다. 주섬주섬 아까 메모해둔걸 펼치려다가, 웃으며 다시 넣어두었다. 나오를 있는 힘껏 미워하던 마음은 이제 필요가 없다. 가는 길에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
"아니야, 아무것도."
-FIN.
(플러스)
"나오. 이런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좀 그런데..."
"응?"
"있잖아... 이런 말 해도 되련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뭔데.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너, 면봉같아."
"아 뭐라는거야 진짜!!"
"아까 내 귀 막아주는거 딱 면봉같았어."
"다시는 귀 안막아줄거야!"
"어차피 또 해줄거면서~"
"아니거든!"
"헉, 나오, 앞에 커다란 개가...!"
"어디, 어디?!"
"지금 내 귀를 막은건 누구 손일까?"
".....너 진짜 싫어."
"나오~ 그래서 말이야~"
옆에 있는 듯, 조금 앞서고 있는 나오는 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린한테 네일을 권했었는데, 그런건 부끄럽다면서~..."
분명 내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몇마디의 대꾸가 오기도 하고, 웃기는지 배꼽이 빠져라 웃기도 했다. 가끔 내가 말을 끊으면 고개를 옆으로 돌려 흘끔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악을 쓰며 걸음을 빨리 한 적이 있었지만 나오가 더 빨랐다. 우리는 어느새부턴가 경주를 하듯이 걷기 시작했고, 왠지 갈 길이 바빠보이는 나오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오~"
나오에게 손을 뻗어보았으나 나오는 무언가에 발이 걸린듯이 휘청하며 내 손을 피했다. 나오가 일으킨 작은 바람이 내 손을 할퀴고 지나갔다. 한순간 숨이 막혔다.
"나오. 그럴거면 먼저 가."
멍청하게 나를 돌아보는 표정을 옆으로 밀어내고 나는 오던 길을 돌아서 갔다. 급하게 쫓아오려는 나오에게 멈춰서서 가방을 휘둘렀다.
"넌 그리로 가. 난 이쪽으로 갈테니까."
"아니, 갑자기 왜?"
왜 그럴까, 정확한 이유를 찾으려 머릿 속 서랍에서 쌓아두었던 것들을 꺼내보았다. 내 주변으로 수많은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마땅한 이유는 없었다. 숨소리만 오가는 순간, 나는 그로부터 몇 분 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랑 있으면 숨이 차."
원래부터 나오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많았지만, 곧 트리아드 프리머스의 공연이 재개되는 스케쥴을 받았기에 그 시간은 조금 더 늘어났다. 학교가 끝나고 연습실로 가는 길,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시도 떨어질 틈이 없었다.
덕분일 것이다. 언제부터 그런 나오를 의식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오는 훨씬 이전부터 나보다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거나 혹은, 최근래 들어서 그렇게 된걸수도 있겠다. 걷는 속도를 맞춰달라고 하면 바보같으면서도 착한 나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속도를 맞춰줬을 것이다. 또 나도 모르게 이상한 것에 휘둘려 벌컥 화를 내버렸다. 빙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며, 성이 난 발걸음이 제 풀에 지쳐 힘이 빠졌을때 즈음, 다음 날 연습실에서 만나면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성급했다. 왜 그랬는지 모를 만큼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다음날, 무심하게 말했는데도 학교를 마치고 연습실에 도착하니 늘 그랬듯 나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는 나를 보더니 무언가를 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캔음료를 건넸다.
"숨 찬건 괜찮아졌어?"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캔음료를 받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혹시 다시 몸이 안좋아진거야?"
다시 답답해지기 시작하니 질문 하나하나가 너무 바보같고 하찮게 느껴졌다. 나는 정말로 숨이 찬것도, 몸이 나빠진것도 아니었다.
"정말 너는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줘야할지 모르겠어."
나오는 입을 한번 꾹 다물었다가 나에게 외면당한 캔음료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대체 어제부터 왜그러는거야? 아픈게 아니라면 뭔데?"
"나라고 뭐 만년 아프기만 한 줄 알아? 이제 신경 안써도 되잖아."
그동안 나오와 린이 나에게 베풀었던 걱정을 전부 짓밟은 꼴이 되어버렸다. 순간적으로 그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는 린이 떠올랐다. 살짝 섬뜩해졌다. 린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나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주워담을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나오를 쏘아보니, 나오가 자기 머리를 헝클였다.
"이유를... 이유를 말해줘. 또 내가 뭘 잘못한거야?"
"'또'라니, 무슨..."
이야기가 길어질것 같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득 벽면에 설치된 커다란 거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거울에 비춰진 나오의 표정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런 표정만 보여주고, 너도 참 너무해.
"...일단 연습 끝나고 이야기하자. 곧 린도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나오가 어디에선가 낡은 플레이어를 가져왔다.
"원래 쓰던거 조금 손봐야된대서 예전에 쓰던거 가져왔어. 먼지 좀 쌓였던건데 괜찮을거라고..."
안물어봤거든. 가방을 구석에 던져두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나오가 플레이어를 콘센트에 연결하다가 발을 삐끗해서 옆으로 넘어졌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을 뻔한 표정을 간신히 지웠다. 눈치도 없고 주변 사람 돌아볼 줄도 모르고, 음식점에 가면 상품으로 나온 피규어나 들여다보는 유치한 아이. 쌤통이다, 잠시나마 생각을 돌리며 나오를 있는 힘껏 미워했다. 이따가 연습이 끝나고 이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주기 위해 곱씹고 또 곱씹었다.
린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되는대로 먼저 연습을 시작했다. 나오가 음악을 틀었고 우리는 음악에 맞춰서 거울을 보고 안무를 되뇌었다. 집중하기 위해 억지로 동작을 크게 했더니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맽혔다. 두텀이 끝나고 잠시 쉬었다. 모든 것이 대화 한마디도 없이 이루어졌다. 나는 어느새 묵직한 공기에 어느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간만에 조용히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나오가 플레이어를 돌리러 간 사이에 잠시 주저앉아서 땀을 닦았다. 나오의 뒷모습에 아까 나오가 했던 말이 멤돌았다. '또'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 저번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나?
"어... 이거 왜 이러지?"
나오가 찰칵찰칵 플레이어를 다루는 폼이 어쩐지 불안해보였다. 슬그머니 일어나 나오에게 다가갔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보니 플레이어 뒤쪽에서 연기가 조금씩 나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깊게 깔려있던 침묵 속에서,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작게 소리가 나왔다.
"아, 연기..."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나오가 내 쪽으로 홱 돌아섰다. 나오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나오가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쩐히 잔뜩 굳은것 같은 나오는 그렇게, 잘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내 귀를 꽉 막았다.
나오와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오의 이마에서 땀 한방울이 턱으로 도르륵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내 귀를 막고 있는 나오의 손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짝, 짝짝, 짝, 카렌, 이쪽이야!
"카렌, 여기야 여기!"
눈 앞이 캄캄했다. 내 눈을 막은 수건은 하나의 룰이었다. 어렸을 적에 나와 나오, 그리고 친구들은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술래가 되는 놀이를 즐겼다. 좁은 방에서 헐떡이면서 주고받는 눈치게임은 정말 짜릿했다. 서로 잡히지 않기 위해 다른 친구가 있는 쪽으로 인형같은걸 던져 술래를 유도하기도 하거나 술래가 너무 갈피를 잡지 못하면 박수를 쳐서 힌트를 주기도 했다. 나는 유독 술래에 약해서 늘 바닥을 기면서 우왕좌왕했다. 아마 나오가 그런 내 모습에 제일 배꼽이 빠져라 웃었을 것이다.
"카렌, 나 여기있다!"
나오가 약올리며 박수를 쳤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일제히 소리를 멈춘 것이었다. 아, 술래 정말 싫다.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잔뜩 긴장하면서 어디에서 미세한 소리가 나나 집중하고 있었을 때였다.
"왁!"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친구들이 꺄르르 웃어댔다. 그런데 나는 손과 다리가 떨리면서 숨이 가빠졌다. 조심스럽게 눈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풀었다.
"어, 아직 게임 안끝났는데? 카렌 반칙이야!"
바로 옆에서 짜증나는 두꺼운 눈썹과 개털같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게 누군지 생각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 스스로도 방금 전에는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벌컥벌컥 빠르게 뛰면서 내 사고회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카렌? 괜찮아?"
나에게 다가오는 그 작은 손을 쳐냈다.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왜 놀래켜?"
"...어, 어??"
"왜 사람 놀래키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오가 멍한 표정으로 나에게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미, 미안. 많이 놀랐어?"
그 말을 무시하고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멋대로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심장이 조금 따끔했다. 나는 많이 약했다. 작은 일에도 숨이 차는 일이 잦았다. 아마 나오는 그때까지는 그걸 몰랐을 것이다.
이후 나오는 내 집에 찾아와 사과했다.
"다시는 놀래키지 않을게."
어린 나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나오를 끌어안으며 같이 울었다.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미안해, 속으로 수없이 사과했다. 나오의 품은 내 눈물샘을 쉴새없이 자극했다.
"카렌? 괜찮아?"
나오의 눈동자에 멍한 내 표정이 가득 담겼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귀를 따뜻하게 품던 나오의 손이 떠나갔다. 침묵이 깨졌다.
"와, 생각보다 크게 터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조금 낡았다 했더니, 먼지가 꽤 쌓였었던것 같은데."
나오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서 플레이어를 만지작거렸다. 작은 폭발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잠시 다른 세상에 있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연습실도, 이 상황도, 나오도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놀란것 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나오가 흠칫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오, 카렌, 미안. 많이 늦었지?"
그때 문이 열리고 린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러다가 주저앉아있는 나와 엉거주춤한 나오, 조금 연기가 나는 플레이어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헉, 놀란 숨을 참았다.
"무슨 일 있었어? 왜그래?"
"아... 응... 플레이어가 조금 낡아서. 괜찮아. 별 일 없었어."
린이 팔을 걷고 직접 플레이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플레이어엔 별 이상 없는데.... 어?"
린이 고개를 콘센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오가 곧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연결이 안되어있었네. 잘 꽂았어야지."
린이 조금 꾸짖는 표정으로 나오에게 플레이어 선을 흔들어보였다.
멋쩍어하는 나오를 뒤로하고 린이 나를 일으켰다.
"많이 놀랐구나. 괜찮아?"
"응..."
사실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터지는것 보다도 나에게 다급하게 향하는게 우선이었던 나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단무지 눈썹이 그렇게 일그러지는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나저나, 어쩌지? 이 상태로는 연습을 못하는데..."
우리 셋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결국 나름 연장자인 나오가 총대를 맸다.
"옆 연습실 빌릴수 있는지 물어볼게."
단무지 눈썹이 축 처진 모습을 보며 나는 픽 웃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오늘 수고했어. 내일 봐."
린이 손을 흔들면서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나오는 웬일로 나보다 앞서지 않고 조금 뒤에서 걸었다.
"저... 카렌, 오늘은 이쪽 길로 가는거야?"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조금 괘씸하다.
"아까는 안놀랐어?"
일부러 돌아서지 않고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놀랐어.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거든..."
"마, 많이 놀랐어? 괜찮았어?"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웅크리니 나오는 나의 조금 뒤에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속으로 조금 웃었다. 이런것도 나름 짜릿하고 기분이 좋다.
"미안해. 내가 아까 콘센트에 꽂으면서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응..."
"아으... 카렌..."
나오가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나오의 팔과 살짝 스치는 순간,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오의 팔을 잡고 숨을 모두 토해내면서 웃었다. 나오는 어리둥절해하며 굳어있더니 곧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볼을 있는 힘껏 부풀렸다.
"아, 이런 장난 좀 그만 쳐! 놀랐잖아!"
"미안, 큽, 근데 나오 너무 재밌어."
"아까까지만 해도 말도 안걸더니."
실컷 다 웃고 숨을 골랐다. 눈물을 걷어내니 나오가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오."
"왜, 이번엔 또 뭐."
"고마워. 아까 귀 막아줘서."
"....어? 어, 응... 그래."
볼 부풀린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풀려서는 괜히 시선을 다른 곳이 두는게 느껴졌다.
"이런 길 걸을때도 조금 불안하다고. 걷다가 뭐라도 튀어나와서 바보같이 그때처럼 화들짝 놀랄까봐..."
정말 빨리도 알려준다. 급하게 변명하듯이 더듬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는 나오의 팔에 팔장을 끼웠다. 나오가 움찔하면서 이후에 나올 말을 아꼈다.
"나오는 정말 상냥해."
"거짓말 하지 마."
"응, 그만할게."
"야...!"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급하게 내 귀를 막아주던 나오는, 이제 잊지 않고 내 바로 옆에서 걸어줄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아득히 멀리에서 울려퍼지는 박수 소리와 나오의 울음소리를 나는 간신히 기억해냈다.
"....아!"
"아, 깜짝아. 왜그래?"
그러고보니 잊고 있던게 있었다. 주섬주섬 아까 메모해둔걸 펼치려다가, 웃으며 다시 넣어두었다. 나오를 있는 힘껏 미워하던 마음은 이제 필요가 없다. 가는 길에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
"아니야, 아무것도."
-FIN.
(플러스)
"나오. 이런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좀 그런데..."
"응?"
"있잖아... 이런 말 해도 되련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뭔데.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너, 면봉같아."
"아 뭐라는거야 진짜!!"
"아까 내 귀 막아주는거 딱 면봉같았어."
"다시는 귀 안막아줄거야!"
"어차피 또 해줄거면서~"
"아니거든!"
"헉, 나오, 앞에 커다란 개가...!"
"어디, 어디?!"
"지금 내 귀를 막은건 누구 손일까?"
".....너 진짜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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