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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코바야시]작은 손

쿵, 코바야시는 자다가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집 밖에서 괴성이 들리고 있었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세상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작은 생물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코바야시의 집을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커다란 드래곤으로 변한 토르가, 오른쪽 허리에 칼을 꽂고 쓰러져있었다.

"토르!!!!!!!"

코바야시는 그렇게, 자다가도 가끔씩 두 번 눈을 떴다.






"물 드릴까요? 오늘 음식 맛은 어떠세요?"

토르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내일이면 그토록 바라던 코바야시와의 산책을 가장한 데이트다. 칸나도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코바야시는 근래에 부쩍 바빴고 토르, 칸나와의 시간이 없었던 것을 미안해하며 주말에 공원에라도 놀러가자고 약속을 잡았다.

"내일 놀러간다고 너무 들뜬 거 아니야?"

코바야시가 피식 웃었다. 척 보아도 꼬리에 힘이 잔뜩 실려있었다. 그렇게나 좋을까. 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으려다가 문득, 자신의 손에 눈이 갔다. 코바야시는 밥을 먹다가 말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또 손을 보고 계시네요."

토르가 걱정스럽게 코바야시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코바야시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일이 잦았다. 길을 걸을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집에 가만히 있을 때에도, 손을 내려다 보았다.
코바야시는 주먹을 다시 펼 생각도 않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응 이건 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코바야시답지 않게 한발 앞선 대답이었다. 칸나는 맞은편에서 포크를 씹다가 코바야시의 손을 넌지시 잡았다.

"힘내, 코바야시. 일이 힘들구나?"
"응? 어어, 그래. 힘내야지."

코바야시의 미소 끝이 굳어있다. 토르는 남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코바야시에게 무턱대고 물어볼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상처를 입히게 될 수도 있으니까.

"너무 남의 일까지 떠맡지 마세요. 코바야시 씨가 무리하면 저희도 마음이 무거우니까요."
"알았대도. 이만 출근할게."

일단 일 문제로 어물쩍 입을 맞춰주었지만. 토르는 여느때처럼 출근하는 코바야시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코바야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토르는 창에 바짝 붙어 코바야시를 배웅했다.
칸나는 토르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한 조각 남은 토르의 꼬리를 포크와 함께 씹었다.






혹시라도 일에 치여 데이트를 잊고 있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으나 코바야시는 평소처럼 피곤을 온몸으로 뿜으며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별다른 기운은 없어보인다. 토르는 그 즉시 코바야시 옆에 따라붙었다. 칸나도 방에서 나와 코바야시를 반겼다.

"코바야시~"
"물 받아놓을까요?"
"부탁해…"

내일 피곤하지 않게 얼른 재워야 한다. 토르가 재빨리 움직이려는 찰나, 코바야시가 느릿느릿 말꼬리를 늘렸다.

"토르. 오늘 셋이서 같이 잘까?"

다급히 움직이던 발소리가 멈췄다. 코바야시는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잔뜩 흥분한 토르의 꼬리가 허공에 굳어 있었다. 저 녀석, 또. 코바야시는 몸이 조금 흔들릴 정도로 웃음을 흘렸다.

"웬일이세요? 셋이서 다같이..."
"이따가 너희 방으로 갈게. 내 침대는 싱글이라서. 괜찮지?"
"그럼요, 그럼요!! 괜찮다마다요!"

토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황급히 욕실로 뛰어갔다. 얼굴이 빨개져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코바야시는 잠시 웃음을 머금었다가 힘없이 지웠다. 소파에 깊숙이 기댔다. 다 안다. 어리광도 피우고 싶을 거고, 무뚝뚝한 이쪽 성격에 서운하기도 했을 거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마음껏 힘을 발산하고 싶기도 하겠지.
다 아는데도 이정도밖에 못 해주는 나에게 토르는 사소한 것까지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코바야시. 손."

칸나가 코바야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응? 손?"

손이 아파왔다. 코바야시의 손톱이 손바닥을 사정없이 파고들고 있었다. 칸나가 코바야시의 손을 잡았다.

"내일 우리, 놀러가는 거지?"

코바야시는 손에 힘을 풀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나게 놀자."







코바야시는 약속대로 베개와 이불을 들고 토르네 방을 찾아갔다. 토르와 칸나는 이미 침대 위에 자리를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토르가 방긋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코바야시는 그제서야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을 깨닫고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러나 잔뜩 기대하고 있는 두 드래곤을 두고 다시 돌아가는 게 더 창피한 일이 될 것 같다. 결국 잠자코 침대 끝에 누웠다. 칸나는 부모 사이에 끼어 자는 딸처럼 중간에 버티고 있었다.

"불 끌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칸나가 들뜬 목소리로 토르의 말을 따라했다. 뭐, 나쁘지 않네. 코바야시는 평소답지 않은 자신의 행동에 아무렇지 않게 맞춰주는 드래곤들이 기특했다. 갑자기 왜, 토르와 칸나가 생각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악몽을 꿔도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자면 그만이었는데.




아득히 잠이 들려던 그때, 쿵, 또다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코바야시는 다시금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으로 벌떡 일어났다. 칸나, 토르?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옆을 돌아보았으나 두 드래곤은 이미 없었다. 이번에도 꿈이겠지. 코바야시는 도로 잠을 청하기 위해 머리를 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코바야시 씨!!"

밖에서 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집이 심하게 흔들렸다. 코바야시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꿈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코바…"

재차 코바야시의 이름이 불리려던 찰나, 소란이 끊겼다. 코바야시는 버티려던 마음을 결국 걷어찼다. 허겁지겁 베란다로 뛰쳐나가 창문을 열자, 늘 보던대로 주변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토르는 쓰러져 있었다.

"토르…"

코바야시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인간이 참 싫다. 소중한 인연이 칼에 맞아 쓰러졌는데, 이 작은 손으로는 당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나는 한낮 작은 인간인걸. 지켜주고 싶어도 지켜줄 수가 없어.
차라리 흉측한 괴물이라도 되고 싶다. 토르와 칸나가 싫어하게 된대도 상관없다. 토르를, 그리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전멸시켜버릴 수 있는 힘만 있다면 평생 숨어 살아도 괜찮다.
분노가 가슴 속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아니, 이건 분노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다. 토르의 피가 어느새 코바야시의 발 끝에 입을 맞추었다.

"코바야시 씨."

코바야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똘망똘망한 오랜지 색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조명이 잔잔하게 코바야시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급하게 올라오던 숨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아, 아니야."

혹시 눈물이라도 흘렸나, 급하게 눈가를 훔쳐보니 다행히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토르는 안심하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신음하시길래 어디 안 좋으신 줄 알았어요."
"좀… 응… 그래."
"괜찮으신 거 맞죠? 이만 불 끌게요."

토르의 손길이 작은 조명으로 가려고 하자, 코바야시가 급하게 그 팔을 낚아챘다. 토르가 놀란 눈으로 코바야시를 돌아보았다.

"…코바야시 씨?"
"아 저기,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그런데 따뜻한 우유 한잔씩 안 할래?"
"우유요?"

토르는 별일이라는 듯이,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거실로 따라 나왔다. 새벽의 거실은 처음이다. 게다가 부엌은 늘 토르 담당이었는데. 코바야시는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데웠다. 그 뒷모습을 보고있자니 토르는 기쁜 마음도 잠시, 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표정이 떠올랐다.

"나 때문에 잠이 깼구나?"
"아… 아니에요. 원래 잠을 깊게 자는 편이 아니라서…"

코바야시가 우유를 건넸다. 컵을 쥐고 있는 가련한 손을 잠시 바라보던 토르가 우유를 받았다. 코바야시는 무거운 표정으로 토르 옆에 앉아 소파에 몸을 기댔다.

"무슨 꿈을 꾸셨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코바야시는 우유를 조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토르는 우유를 손에 든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든 악몽을 꾸잖아. 신경 쓸 거 없어."
"알려주세요."
"그럴 거 없대도."
"…코바야시 씨는 항상 그래요."

움찔, 코바야시가 멍하게 토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동공이 날카로워져 있다. 혹시 화난 걸까.

"다른 용들이나 인간들한테는 몰라도 저한테는 조금만, 코바야시 씨를 알려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아니, 그게…"
"봤어요. 코바야시 씨가 늘 손을 꽉 쥐면서 쓸쓸한 표정을 짓는 거. 늘 궁금했단 말이에요. 근데 말 걸 틈을 안 주시니까."

아, 내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던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요즘 코바야시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지내고 있었다. 토르는 우유를 내려놓고 코바야시의 손을 맞잡았다.

"알려주세요. 알려주시지 않으면 우유를 다 마셔도 편하게 못 잘 것 같아요."

토르가 말 끝을 흐렸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코바야시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칼에 맞아 쓰러지는 꿈을 꿨어."

토르의 꼬리가 꿈틀댔다. 옆구리가 다시 쓰려오는 듯 하다. 그 기억이 되살아날새라, 코바야시가 토르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근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야.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용으로 변할 수도 없어. 그렇다고 용사도 아니야. 늘 쓰러지는 네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는 꿈이었어."
"저는… 괜찮아요."
"알아. 근데, 뭐랄까."

코바야시가 돌연 피식 웃었다.

"왠지 네가 인간을 하등시하는 이유가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토르가 고개를 들었다. 코바야시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토르는, 무서울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요. 코바야시 씨는 다른 인간들이랑 다르다구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지만, 나도 결국은 인간이야."
"코바야시 씨는 아무것도 못하는 작은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 거겠지만, 그날 코바야시 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오갈 데 없이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코바야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웃었다. 토르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맽혀 있었다. 하늘보다 높게 올라가던 그날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 그랬지."

대화는 자연스럽게 허공에 스며들었다. 토르가 기를 세워줬지만 그럼에도 답답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코바야시는 한숨 섞인 말을 꺼냈다.

"그래도, 나는 너나 칸나가 위험해졌을 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갑자기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확,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볼에 말랑말랑한 무언가가 닿았다.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눈 앞에 드리워졌다.

"이미 충분히 제 마음 속에서 보탬이 되어주고 계셔요. 그리고…"

토르의 손이 아기를 어르듯이 코바야시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니까 절대, 코바야시 씨 앞에 쓰러질 일은 없어요. 제가 쓰러진다면 그건 제 버팀목인 코바야시 씨가 제 마음 속에서 쓰러졌을 때겠죠."
"…토르."
"그러니까 부디 쓰러지지 마세요. 코바야시 씨가 제 힘이에요."

코바야시가 토르의 품 안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진정되자, 토르가 코바야시를 놓았다.

"아, 그리고 이건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요…"

머릿속에 물음표가 막 떠오르려던 찰나 코바야시의 이마에 따뜻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 악몽 꾸지 말라고 제가 마법을 걸어 두었어요. 절대 키스같은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토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기뻐 보이기도 하다. 코바야시는 잠시 그 자리에 굳었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들어가서 잘까요?"

우유를 단번에 마시고 두 사람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방 문을 열자마자,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토르와 코바야시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 칸나가 몸부림 치다가 침대 끝에 매달려서 자고 있었다.
코바야시는 토르 옆에 누웠다. 꼿꼿이 천장을 바라보며, 아까보다는 가라앉은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쓰러지지 마세요. 토르의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



토르에게 안기던 순간의 향기가 머리를 간지럽혔다. 포근한 느낌에 눈을 떴다.

"아, 코바야시 깼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광활한 잔디밭에, 토르의 무릎 위에 누워, 칸나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코바야시는 다시 눈을 감았다. 토르의 마법이 확실히 효과가 있나 보다.
잠깐 눈에 담았던 하늘이 참 푸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