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그 날 밤의 일은, 누가 듣는다면 어쩌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제리아가 계속되고, 대학 생활과 과제와 시험에 익숙해졌을 때 즈음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정. 로제리아와 음악, 분명 우리에게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애써 외면해왔습니다. 그 손을 잡고 싶고, 얼굴을 쓰다듬고 싶고, 끌어안고 싶고,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싶어지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깨닫기 전까지 저는 마냥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언제부터 이랬냐고 묻는다면 이보다 훨씬 전부터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당신은 저에게 말했죠. 사요는 가끔 나한테 너무 야박하지 않아? 나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그렇게 구박할 필요는 없잖아~. 서운함 반, 농담 반의 그 목소리를 듣는 게 저는 많이 괴로웠습니다. 저는 당신을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것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죠. 안되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쓴소리를 하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집에 돌아가면서 한숨짓는 날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로제리아를 위해 모든 걸 걸었으니 그 이외의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당신은 느닷없이 저의 자취방에 놀러와서는, 함께 마실 술잔을 씻는 저를 뒤에서 끌어안았습니다. 혹시 오는 길에 이미 술 한잔하고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신은 쓸쓸해보였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사요, 나 너희가 너무 그리워. 다시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외로움 같은 거 안 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그런 말을 듣는 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무엇이든 척척 해내고 무슨 말을 들어도 하하 웃어 넘기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동시에 측은함도 들었습니다. 잔을 다 씻고 옆에 내려두고선, 저는 축축한 손으로 당신을 껴안았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 먼저 내 품에 안기다뇨. 당신은 내 목을 그러안고 한동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당신은 물을 마시듯이 술잔을 갈아치웠습니다. 이건 말려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당신이 비틀거릴 때 즈음에 당신의 손을 잡아 내렸습니다. 당신은 구슬픈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게 시작이었던 겁니다.
"사요, 좋아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잠시 멀뚱멀뚱 굳어있는 사이, 당신은 상을 치우고 저에게 쓰러지듯 안겼습니다.
"그냥, 나 좀 좋아해줘... 그렇게 돌부처같이 딱딱하게 굴지 말고, 나 좀 좋아해줘... 부탁할게."
"...이마이 씨."
"너는 항상 나에게 구박만 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질 않아서, 많이 아팠어."
당신은 내 품에서 고개를 들어올려 저의 표정을 확인하는 듯 했습니다. 그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듯이 위태로웠습니다.
"나 진짜 바보같지?"
"....."
"사요~"
다시 한 번 제 이름을 부르며 품을 파고드는 당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 수 초가 정말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서 답은 하나입니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응...?"
"좋아해도 되나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저는 당신을 품에 깊숙히 안았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술에 취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잠시 후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의 입술과 향기를 갈구할 때, 당신 역시 메마른 무언가를 적시려는 듯이 저를 꽉 안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로제리아와 음악,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없던 게 아니었나요. 저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웠습니다. 오로지 당신만 눈에 담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당신은 다음날, 옆자리에서 저를 발견하고 많이 당황한 듯이 머리 매무새를 어색하게 다듬으며 시선을 조금 피하는 듯 했습니다. 혹시 하룻밤에 그칠 고백이었을까. 역시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미안해, 사요. 어제 많이 당황스러웠지? 여전히 저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당신은 웃었습니다. 저보다 더 당황스러워하는 건 당신인데. 그 모습에 조금 웃자, 당신은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표정으로 살짝 다가와 입을 맞추었습니다. 어느때보다도 사랑스러운 아침이었습니다.
우리는 로제리아의 활동에는 차질이 없도록 하기로 약속했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날 이후로 연습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술도 중요하기에 여러가지 난이도가 높은 기술에 도전하기도 했구요. 이따금씩 연습하다가 당신과 눈이 마주칠 때 가끔씩 손가락이 삐끗한 걸, 아마 미나토 씨는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가 당신이라는 건 모르겠지만요.
"이마이 씨, 저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그 첫번째로 저는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해맑은 얼굴로 말합니다.
"사요를 꾸며보고 싶어."
"...네?"
"대학생이 됐는데도 화장을 안하는 편이잖아. 내가 화장도 시켜주고, 네일아트도 해주고, 목걸이랑 귀걸이도 빌려줄게."
"이, 이마이 씨, 그건..."
"내가 하고 싶은 건데, 안 해줄 거야?"
하마터면 이마를 짚고 그대로 주저앉을 뻔 했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너무합니다.
"...알겠어요. 대신..."
"대신?"
"앞으로 그런 표정은 반칙입니다. 하지 마세요."
그렇게 이마이 씨의 프린세스 메이커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의 자취방에 입성했다는 기쁨과 설렘도 잠시, 이리저리 옷을 대보고 화장품을 꺼내오는 당신의 모습에 내심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잘 어울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마이 씨가 앞으로 꾸며주겠다고 하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줄 각오를 했습니다. 정말, 무슨 일이든.
당신이 언젠가 입었을 오프숄더를 입고, 얼굴 톤을 밝게 높이고, 눈가에 살짝 반짝이를 넣고, 입술을 붉게 하고, 귀걸이를 하고...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나올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본인이 실컷 꾸며놓고 당신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저를 빤히 쳐다보더군요. 그러더니 저를 거울 앞에 세워뒀습니다. 그 안에 있는 저를 보고 나서야 당신이 왜 그런 멍한 표정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히카와 사요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사요."
약간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를 더듬거리며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당신은 느닷없이 제 얼굴을 끌어당겼습니다.
"정말 예쁘다."
당신은, 저에게 입힌 색 그대로 흡수하듯이 가져갔습니다. 전부 가져갈 수 있도록 저는 있는 힘껏 몸을 맡겼습니다. 사요, 예뻐. 정말 예뻐. 사랑해. 그 말만 계속 반복하는 당신은 저를 더욱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웃을 수 있도록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으니까요.
"이번엔 사요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당신이 허리에 손을 올리며 어느날 말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끈질기게 제 대답을 기다립니다.
"음... 글쎄요."
"나랑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이마이 씨와 하고 싶은 것..."
그 눈을 바라보자 하고 싶은 게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좋아해줄지 의문이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의견이기 때문에. 저의 욕망이기 때문에. 당신이 저와 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원초적이고 하찮은 일이 될 수도 있기에. 아, 저는 어떻게 돼먹은 사람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저 딱 하나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제 눈빛을 보더니 웃습니다.
"사요, 하자."
"...네?"
"방금 우리, 좀 통한 것 같아."
"하지만 이마이 씨, 아직 대낮이고 그것보다 훨씬 의미있는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당신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뭐가 문제냐는 표정입니다.
"우리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그 한마디는 너무나도 완벽해서, 더이상 저를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당신을 끌어안고 깊숙히 숨을 들이쉬는 저를, 당신은 가만히 받아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이었나요? 끝도없이 저를 받아주고, 또 당신을 맡기며 무슨 생각을 했나요? 당신의 체취, 당신의 살갗, 당신의 목소리, 사요, 사요, 그 벅찬 울림. 그 모든 것이 저를 자극합니다. 당신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하고, 허리를 끌어당기고, 당신의 손길을 느끼는 것. 과연,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몸을 쓰다듬으면서 넌지시 물었습니다.
"이마이 씨, 지금 행복한가요?"
새삼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어딨냐는 듯이 당신은 말을 아꼈습니다. 그 대신, 저를 더 깊숙히 묻었죠. 따뜻하고 가슴이 벅찬 곳으로, 깊숙히.
저는 저를 기쁘게하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이마이 리사라는 사람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그렇게 느낀 것은 당신을 데리러 학교 앞에 갔을 때였습니다. 로제리아 연습 시간에 맞춰 잠시 데이트라도 하다가 가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한 무리의 친구들과 같이 나오는 당신은 누구보다도 돋보였습니다. 당신은 그 무리의 한 가운데에서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치 로켓이 분리되는 것처럼 친구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흩어지고 당신과 어떤 남자만 남아서 걸어옵니다. 저는 어느새 긴장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당신은 계속 저를 못본 건지 남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합니다. 눈도 마주치고, 가끔 웃으면서 어깨도 치고, 놀라면서 남자의 손을 만지작거리기도 했죠. 어디... 다친 곳을 봐주는 것처럼요. 그런 상황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 때, 당신은 남자의 손을 살짝 쥐고 있는 채로 저를 발견했습니다. 어쩐지 한숨이 나오더군요.
"사요!!"
당신은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곧장 남자의 손을 놓고 저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또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과 스킨십을 한 손으로 제 손에 깍지를 낍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던 남자가 제 앞에 다가오기 전까지.
"혹시 저번에 말했던 친구야?"
남자가 웃으면서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더 화사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응, 히카와 사요. 오늘 같이 가기로 했거든."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조심히 가."
"잘 가~"
남자는 무척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저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모습에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당신은 줄곧 남자를 쫓고 있는 제 눈을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길게 늘리며 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뭐야 사요, 저 애가 혹시 사요 스타일이야?"
사람 속도 모르고 장난이나 치는 당신이 살짝 미워졌습니다. 저는 짐짓 화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조금 놀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웃었습니다.
"아, 농담이야~ 히카와 사요한테 나 이외의 사람이 마음 속에 있을 리가 없지~"
"...이마이 씨."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생긴 것 같은데 당신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모두 사라졌습니다. 저는 팔장을 껴오는 당신의 다부진 손에 이끌려 둘만의 길을 걸어갑니다. 맞습니다. 저는 당신을 가둬둘 수 없습니다. 저만 바라봐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당신을 믿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거겠죠. 당신이 이마이 리사로 지낼 수만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당신은 행복해야하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시험 기간이 겹쳐서 함께 저의 자취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날따라 유난히 멍해보였습니다. 좀체 집중을 하지도 못하고, 저와 눈을 마주쳐주지도 않고, 페이지는 줄곧 넘어가지 않은 채로 무거운 공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분명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겠죠. 저는 당신을 달래주고 싶었습니다. 세상 살아가다보면 힘든 일도 생기지만 결국 다 지나가는 법이라고. 사실 저도 그걸 마음 속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없는 말보다는 낫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위로해주려고 하는 순간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요, 내가... 너무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것 같아?"
저에게 있어서 힘든 일이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어련히 그런 일일거라고 넘겨짚은 것입니다. 어느 남자의 손을 걱정스럽게 만지작거리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저에게, 당신이 말합니다.
"내가 분별력이 없는 사람 같아?"
당신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이마이 리사라는 사람을 돌아보았습니다. 당신은 확실히 모두에게 친절합니다. 로제리아 멤버들에게 하는 것만 봐도, 우리 둘이 사귀는 걸 다른 멤버들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 모두에게 다정하고 활기찬 사람입니다. 쿠키를 만들어주고, 피곤한 기색이 있으면 안마도 해주고, 가끔 볼에 키스도 해주는, 당신은 저만이 아닌 모두에게 사랑을 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는 일이었던가요?
"아뇨, 저는 이마이 씨가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애인이라서 그렇게 말해주는 건 아니지?"
"절대 그런 건 아니예요."
당신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저의 눈을 바라봅니다. 참 이상합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그런 서글픈 눈을 보는 순간, 저는 마치 제가 방금 한 말이 정말 애인이라서 선심쓰듯이 해준 말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던 겁니다. 그 날, 저를 뒤에서 끌어안고 외롭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것과는 다른 무엇이 있기라도 한 듯이.
"너는 화 안나? 내가 아무한테나 뽀뽀하고 팔장끼고 쓰다듬는데..."
"딱히 화가 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게 이마이 씨의 모습이니까."
"으음..."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을까요. 당신은 이후로 줄곧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난감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어느정도 공부를 끝내고, 저는 본격적으로 당신의 고민을 들어볼 생각이었습니다.
"이마이 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세요."
속상한 일이 있거나 쓸쓸하면 제 품에 안겨오던 당신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당신이 들어올 수 있도록 품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구요. 그런데 당신은 저의 신호에도 미동도 없이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마이 씨?"
슬슬 불안해지려는 찰나. 당신은 주섬주섬 가방을 싸더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미안, 사요. 오늘 기분이 좀 별로라... 나중에 연락 줄게."
당신은 저를 살짝 안아주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정황을 생각해볼 새도 없이 지나가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게 풀이 죽어있는 당신의 모습을 처음 본 저로서는 그저 마음이 아프고, 무엇보다도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아, 저는 그 날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요. 제가 아무리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생각해도, 제가 해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요.
당신이 저로 인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또한 결국, 저의 오만이었을까요.
***
"사요, 혹시... 리사랑 싸웠어?"
쉬는 시간에 앉아서 기타를 멍하게 만지다가 사요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유키나가 걱정스럽게 사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요는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아뇨."
"둘이 며칠 전부터 말도 한마디 안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해서."
"아무 일도 없습니다. 기타 연습이 잘 안돼서 답답한 것 뿐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유키나가 자리를 비켜주고, 사요는 한숨을 내쉬면서 벽에 등을 기댔다. 리사는 물을 마시고 오겠다며 연습실을 잠시 벗어난 상태였다. 언제부턴가 리사가 없는 연습실이 더 편해지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 상태로 괜찮을 걸까. 그런 고민도 잠시, 사요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싫어졌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시작한 사이니까 아무 말 없이 끝나기 마련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사요는 결국 리사가 그 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리사는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사요를 대하기 시작했고, 사요는 자신이 해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고 함부로 리사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오만이라고 판단했다. 리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해결해주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만이었다. 세상에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왜 지금에야 깨달았을까.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진실되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막막하기만 하다.
리사가 물을 마시고 들어오자, 다시 연습이 시작되는 분위기였다. 모두들 담당 악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쭉 연습실을 둘러보다가 벽에 기대어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는 사요의 모습이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사요, 연습 시작하자! 라며 손을 끌어줬을 텐데. 다가기가 어렵다.
"저, 이마이 씨."
린코가 리사에게 다가왔다.
"응, 무슨 일이야?"
"다름이 아니라..."
린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사요 씨 말이에요... 이제 연습 시작하니까, 합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내가?"
린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보통 연습이 다시 시작되면 유키나가 '이제 연습 시작하자'고 말하거나, 아코가 드럼 스틱을 세게 부딫히며 신호를 보냈었다. 그런데 마치 화해라도 시켜주려는 듯이 사요에게 말을 걸어주라고 하다니. 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수는 없다. 멤버들이 이상하게 보고 있으니 얼른 상황을 정리하는 게 맞겠지.
"저기, 사요..."
간신히 용기를 내어 사요 앞에 선 리사는, 자신이 부르는 소리에도 멍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요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연습 시작하니까 이제 자리로 가자."
사요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리사를 바라보았다.
"...네."
정말 오랜만이다. 목소리를 섞어본 게 얼마만이더라. 사요는 힘을 쥐어짜서 기타를 들고 일어났다. 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대화가 문제없이 진행된 것에 대해 왜 안심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제리아의 연습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나머지 멤버들도 사요와 리사의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버렸다. 결국, 그 날 연습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덧 집 방향이 비슷한 두 사람은 함께 걷고 있었다. 여전히 한마디 대화도 없는 분위기. 리사는 이렇게 된 게 전부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결국 털어놓지 못했다. 사요가 딱히 캐묻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속상한 일이 좀 있었어. 미안해. 해결됐으니까 이제 괜찮아. 그런 문자를 주고받고서는 줄곧 이런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이렇게 큰 화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리사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개인적인 일에 사요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못내 사요의 그 대답이 신경쓰였다. '딱히 화가 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게 이마이 씨의 모습이니까.'
"와, 덥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갈래?"
바닥을 보고 걷던 사요가 리사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아니면 커피도 좋구. 어때?"
싫다고 하면 어쩌지. 용기를 낸 말이었는데. 리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요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요는 입을 뻥긋거리더니, 이윽고 목소리를 냈다.
"네. 그러죠."
아무래도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에는 탁 트인 카페는 조금 불편하다. 다 지난 이야기이기도 하고, 리사는 사요에게 전부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고른 장소는 룸카페였다. 두 사람은 커피를 시켜 나란히 앉았다. 그러나 말은 섞지 않고,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창 밖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방에 막힌 벽이 조금 답답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텐데.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까? 기타 연습은 잘 되냐고 물어볼까? 아니, 웃길 것 같다. 그런 말 말고 다른 건 없을까... 리사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사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떻게 된 걸까요."
차분하고 힘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리사는 어쩐지 목까지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사요를 돌아보았다. 사요 역시 언제부턴가 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멎었다.
"예전부터 계속 말해보고 싶었어요. 우리는 어떻게 된 건지."
"...그러게. 우리는..."
사요의 두 손이 서로 깍지를 꼈다.
"일은 해결이 잘 된 건가요?"
"...으응, 덕분에..."
리사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아차, 했다. 사요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마이 씨라면 어려운 일도 잘 헤쳐나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행이네요."
"사요..."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일이 있겠죠, 분명. 세상에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니까."
리사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려다가 황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사요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일이라니?"
"일 잘 해결됐잖아요?"
"그렇긴 한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사요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리사는 사요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동안에 볼 수 없던 표정이다.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리사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속이 울렁거린다.
"사요?"
"저는 그걸로 됐어요. 잘 해결됐다니까... 괜찮아요."
사요가 커피를 들어 한모금 마시고 내려놓다가, 웃음을 지우고 눈을 크게 떴다. 앞에 앉아있는 리사의 눈에, 컵을 잠깐 들어올렸다가 내리는 사이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사요가 몸을 들썩였다.
"이마이 씨, 눈물이... 휴지 가져올까요?"
"나... 여러 사람한테 너무 잘해준다고 오해를 받고 있었어."
리사가 일어나려는 사요의 손을 잡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사요는 리사의 뜻밖의 말에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리사의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는데...
"그것도 제일 친했던 친구한테... 하고 다니는 행색도 그렇고,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너무 스스럼없다고, 남들이 보면 오해하지 않겠냐고..."
"......"
"그래서 말다툼이 있었어. 나는 로제리아 멤버들한테도 모두 그렇게 하고 다녔고, 고등학생 때도 그랬으니까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걸 오해하는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
리사가 잠시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어느날 일이 터진거야. 내가 알던 남자애의 여자친구가 나한테 쫓아와서 남자친구가 바람을 폈다고, 그게 내가 아니냐고 그러더라."
설마, 그 남자가. 사요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리사가 마무리지었다.
"그걸로 끝이었어. 어른은 참 어렵네... 인간관계가 참 어려워."
사요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리사가 애써 웃었다.
"알고보니 뒤에서 내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애들을 친구라고 뒀더라구. 그러니까 이제 신경 안 써. 나도 참 바보같다. 그치?"
"이마이 씨는 바보가 아니예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리사가 시선을 조금 내렸다.
"그래도 일이 잘 끝나서 다행..."
"대체 뭐가 잘 끝난 일인지 잘 모르겠네요. 어딜 봐서 잘 끝난 일이죠?"
리사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사요는 잔뜩 화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사요가... 화를 내고 있다.
"제가 바보였네요. 이마이 씨가 아니라, 제가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다가가기 겁나서, 혼자 잔뜩 시무룩해서, 이마이 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제가 한심해요."
"아니야 사요, 그건..."
"그 일이 있고부터 저는 이 세상에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라고. 하지만 이제 보니 오만이어도 괜찮았을 것 같네요. 오만이어도, 저는 당신을 사랑했어야 했어요."
사요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당신을 사랑할까요. 저는 왜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을까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삭히며, 사요는 한편으로는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꼈다. 이제야 사건이 모두 정리된 느낌이다.
리사가 손을 뻗어 사요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사요의 눈물은 뜨겁다.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너를 끌어들이기 싫어서, 혼자있고 싶어서 입을 닫았어. 널 멀리했어. 미안해, 사요. 내가 나쁜 거야. 넌 아무 잘못 없어."
사요는 대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격앙되어있었다.
"사요가 그랬잖아. 그런 모습이 나의 모습이니까,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난 솔직히 그게 거짓말인 줄 알았어. 그동안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전부 내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 했으니까. 너도 속으로는 질투하고 화나있으면서 날 위해 그냥 해주는 말인 줄 알았어."
리사가 여전히 눈물이 맺힌 눈으로 웃었다.
"나도 오만했네. 그치?"
리사의 손가락에 사요의 분노가 닿아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사요도 어느샌가 조금 웃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오만했네요. 반성해야겠어요."
"...응."
리사가 사요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사요는 안도의 숨을 삼켰다.
"그럼,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한테 너무 과한 친절은 삼갈게."
"그럴 필요는..."
"아니야. 나도 이번 일로 느낀 게 있으니까. 날 받아주는 건 로제리아와, 히카와 사요밖에 없다고 생각할래. 그게 앞으로 행동을 결정짓기 편해."
사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더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이마이 씨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해라는 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요."
"고마워."
리사가 다시 울듯이 눈시울을 붉혔다.
"사요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사요가 몸을 일으켜 탁자 너머에 앉아있는 리사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리사는 말없이 사요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맡겼다. 짧고도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사요는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있는 그대로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오만이어도, 벌을 받을 일이어도, 제가 모자란 사람이어도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당신을 사랑할까요.
저는 여전히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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