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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Bang Dream

[사요리사]지금도

  사요는 마지막까지 친절했다.

  내가 먼저 제안해놓고, 그만 사요의 기분을 생각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침대 위에 누구랄 것도 없이 스르르 무너져내린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듣기 민망한 신음소리 뒤에 울음소리가 섞이자 사요는 놀라며 내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마이 씨?!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얼굴을 가리고 계속 울기만 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사요랑 참 좋았는데. 사요한테 참 고마웠는데. 사요에게 해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우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그게 나의 전부였다. 그렇다. 내가 사요에게 주었던 것은, 눈물 뿐이었다.

  사요는 내가 계속 눈물을 흘리자 곧 그 눈물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안절부절하던 모습을 차분히 지우더니, 위에서 날 내려다보던 시선 그대로 내 얼굴을 끌어안았다. 방금 전까지 사요가 깊숙히 끌어안고 있던 뜨거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울지 마세요, 이마이 씨."

  "...하지만..."

  "당신은 너무 착해요."

 

  나는 사요를 안을 수 없었다. 그저 계속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한동안 미안함, 측은함, 한심함,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치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를 부드럽게 껴안고 있는 사요가 온전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대로 그만둔다면 사요에게도 예의가 아니겠지. 나는 눈물을 닦고 사요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잠시 입술을 떼자 사요가 당황한 눈빛으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겠어요? 지금 상태로는 그만 두는 게..."

  "아니, 미안해. 내가 감정 조절을 잘 못했네. 계속 하자."

 

  사요는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나는 사요의 입에서 나온, 내가 착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저 이기적일 뿐이다. 정말 착해서 가여워보이기까지 하는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내 앞에서 그 깊은 눈동자에 나를 가득 담으며, 계속 물어보고 있다. 정말 괜찮아요? 이마이 씨가 싫다면 그만 둘게요. 그러나, 아니다. 나는 끝까지 이기적일 수 없었다. 내가 완강히 나가자 사요는 이내 다시 나를 감싸오기 시작했다. 사요의 손가락 끝, 머리카락 끝까지 느끼려고 안간 힘을 썼다.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마지막의, 이제 다시는 올 수 없는 순간을 기리는, 이기적인 사람의 최후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헤어졌다.

 

 

 

 

 

 

 

 

  자동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평소와 같이 안전벨트를 매고 정면을 주시했다.

 

  "오늘은 어디 갈래?"

 

  옆에서 묵직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공기중에 흩어지듯이 퍼졌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너 가고 싶은 대로."

  "그래서 저번에 바닷가 갔잖아. 이번엔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으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어. 그냥 출발하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삼켜냈다. 옆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리사,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요즘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조금 웃어보였다. 나의 남자친구, 카와시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거 아니야. 어제 잠을 못잤더니 조금 피곤해서."

  "그렇다면 다행인데."

 

  카와시마는 다정한 사람이다. 늘 나를 먼저 생각해주고, 나를 위해 희생해주고, 모든 것의 중심이 나인 사람이다. 왜, 대체 왜. 자꾸 그리워질 것 같은 사람들 천지인지. 나는 좀 더 나를 하찮게 여겨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제 더 이상은... 상냥한 사람은 싫다. 한동안 묻어왔던 사람의 이름이 다시 떠오를 것만 같다. 나의 성을 부드럽게 불러주던 그 목소리까지. 더 깊숙히 가슴에 차오르기 전에 급하게 지웠다. 지금와서 그 아일 생각해서 뭐 어쩌자는 거야.

 

  "그래서, 어디 가고 싶어?"

  "바다 가자."

  "바다? 저번에 갔는데?"

  "또 가고 싶어. 저번에 제대로 못봤거든."

 

  카와시마는 '그래?'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차를 몰았다. 차는 한동안 달린다. 그동안 카와시마가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걸어주었지만 나는 성의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밖의 날씨는 참 화창한데 마음은 꼭 비오는 날의 꿉꿉한 기분이다. 기괴한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다른 생각 다 떨쳐버리게.

  그렇게 우리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나름 관광지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발을 담그며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니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날씨 좋다!"

 

  카와시마가 옆에서 내 손을 잡아왔다. 그런데, 그 때. 이마이 씨, 날씨가 참 좋네요. 이상한 음색이 귓가를 간질였다. 나는 흠칫 놀라서 그만 손을 빼버렸다. 카와시마가 당황하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아 그러게! 오늘 날씨 좋네~"

 

  다시 아무렇지 않게 카와시마의 손을 잡았다. 오늘따라 너무 이상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안고 그렇게 카와시마와 해변을 산책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광경에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한참을 걷다가 많이 더워진 날씨에 손사래를 치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와시마는 늘 먹던대로 스무디를 시켰고, 나는 쓴 게 마시고 싶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아무래도 정신을 좀 차릴 필요가 있다.

 

  "잠깐 올라가 있을래? 나 잠깐 손만 씻고 갈게."

  "알겠어. 2층에 올라가있을게."

 

  카와시마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갔다. 세수를 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열기를 식히고 싶었다. 정신 차리자, 이마이 리사. 후회할 짓 하지 마.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머리와는 다르게 왜 마음에서 계속 그 목소리가 떠오를까. 이마이 씨, 오늘 비 오니까 우산 챙기세요. 이마이 씨, 햇살이 뜨거운데 썬크림은 발랐나요? 이마이 씨, 오늘 참 예쁘네요.

  한숨을 쉬며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참 초췌해보인다. 초췌해져도 할 말이 없다. 지금껏 잊으려고 그렇게 노력해왔는데 이렇게 되면 지난날의 선택은 뭐가 되는 건지.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

 

  나는 카페 안의 화장실인 것도 잊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거울 한쪽 귀퉁이에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말도 안돼, 이건... 정말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

 

  "이마이... 씨?"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려야 하는데, 내 이름이 불렸는데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최대한 당황한 기색을 숨겼다. 이미 거울을 통해서 내 표정을 다 봤겠지만...

 

  "어... 어...."

 

  말을 더듬다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홱 돌려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녕! ...사...요..."

 

  사요는 휴지로 물기 묻은 손을 닦고 있었던 건지 휴지를 꽉 쥔 채로 한동안 미동이 없었다. 사요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겠지. 몇년만의 재회인가. 관광지를 찾아올 사람들 중에 사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요의 손가락 끝에서 물방울이 느리게 떨어졌다. 시간이 잠시 멈춘 기분이었다.

 

  "이,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기괴하네~!"

 

  더듬거리며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한 말이 고작 기괴하네, 라니. 아차 싶었지만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사요가 표정을 조금 풀었다. 평소에 내가 알던 차분한 사요가 나타났다.

 

  "단어 선택을 잘못하셨네요. 기괴한 게 아니라 우연이라고 하는 거겠죠."

  "아, 아하하, 여전히 날카롭네, 사요..."

  "이 곳엔 어쩐 일로..."

 

  아, 차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어쩐 일로 왔냐는 말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관광지에, 당연히 놀러오지! 뭐하러 오겠어?"

  "...그, 그런가요...?"

 

  이어 사요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그러나 입을 오물거리며 삼키는 것 같았다. 사요의 말을 기다리다가 문득 사요를 너무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사요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요즘 날씨가 덥더라구~ 바다로 오기 딱 좋은 날씨 아니야?"

  "그렇죠."

  "아 혹시 사요, 운전면허 딴 거야? 여기서 사요가 사는 곳까진 꽤 멀..."

 

  그렇게 말하려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과거의 향기가 나는 것들은 함부로 꺼내면 안 된다. 그게 예의 아닌가. 나도 모르게 예전 사요의 집 주소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요 역시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휴지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기분 나쁘게 들리시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어, 응... 그렇지...?"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카와시마한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사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휴대폰만 꽉 쥐고 있었다. 이대로 전화를 받아버리면 왠지 사요가 그대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왜 사요가 떠날 것을 염려하고 있는지 깊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사요는 내 휴대폰을 내려다보더니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재밌게 놀다 가세요. 그럼 전 이만."

 

  벨소리가 우렁차게 계속 퍼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희미하게 바깥의 빛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을 때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그, 그래,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다음에 이야기하지 않을래?"

 

  사요가 멈칫했다.

 

  "내 번호 그대로니까... 연락 줘."

 

  사요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야 하죠? 우리가 뭐라고? 질타가 쏟아지는 눈빛을 그대로 받으며 시선을 내렸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이기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말이었다. 오늘따라 나, 정말 이상하다. 그런데 자꾸 가슴이 뛰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이 후회가 되지 않았다.

 

  "...조심히 가세요."

 

  사요는 대답을 조금 회피했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차라리 거절해주지, 사요. 그러면 안 된다고 화라도 내주지. 문은 조용히 닫혔다. 나는 갇힌 공간에 한동안 홀로 남아있었다.

  벨소리는 곧 끊겼다.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내가 맡아서 할게."

 

  대학 팀플 과제에 치이는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곧 기말고사가 코앞이다. 나는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며 최고점을 향해 열심히 연구하다가 강의실에서 대충 저녁을 때우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카와시마도 시험기간이라 서로 연락을 자제하고 있는 기간이라 어쩐지 조금 쓸쓸해졌다. 어둠 속에서 시험이라는 짐을 가득 진 학생들만이 좀비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교문을 빠져나왔다.

  카와시마에게 문자라도 보내볼까, 휴대폰 데이터를 켰다. 금방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카와시마에게서 온 거겠거니 했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그대로 모른 척 하려다가 유독 눈에 띈 첫 문장이 내 숨을 난데없이 꽉 쥐었다.

 

  '이마이 씨.'

 

  그렇게 시작하는 문자였다. 문자를 눌러볼 용기도 없었거니와, 굳이 눌러볼 필요도 없었다. 문자의 내용은 너무 간결해서 미리보기에 전부 다 떠있었다.

 

  '제가 예전에 살던 곳이 기억나시면 와줄래요?'

 

  나는 즉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큰 도로로 달려나갔다. 좌우를 살펴보다가 오는 택시를 잡아 탔다. 사요가 예전에 살던 주소가 매우 명확하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기로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했다. 아저씨, 죄송한데 빨리 가주시면 안될까요? 급한 일이라서요. 나는 어쩐지 서두르고 있었다. 만나서 어찌할 것도 아닌데, 자동차 시트에 기대지도 못하고 발을 굴렀다. 나는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이마이 리사, 안 되겠다. 그런 마음이 깊숙한 곳에서 나를 향해 비웃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요가 사라질까봐.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값을 지불한 뒤 택시에서 내리고 사요의 집 쪽으로 뛰었다. 혹시 길이 엇갈리는 건 아닐까, 스쳐 지나가고 있는 사람이 사요는 아닐까, 몇번이고 멈춰서 확인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요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요!"

 

  숨을 헐떡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급하게 뛰는 심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사요는 크게 헐떡이는 나를 보며 잠시 멍하게 서있었다.

 

  "...뛰어왔어요?"

  "어, 응, 아니.... 음.... 응...."

 

  자꾸 왜 그러시죠? 저한테 뭘 바라는 건가요? 그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잔뜩 움츠러들었는데 사요는 잠자코 길을 안내했다.

 

  "일단 가시죠."

 

  우리가 간 곳은 근처의 작은 카페였다. 생긴지 얼마 안됐는지 깔끔하고 새 건물 냄새가 났다. 깊숙한 곳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나는 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사요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아메리카노는 잘 안마시지 않았나요?"

 

  그러더니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과거와 이어져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사요도 그렇게 느꼈는지 이후에 별 말이 없었다.

  한동안 음료를 홀짝이다가 아무래도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은 것 같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요, 아직도 거기서 살고 있었구나? 놀랐어."

 

  사요는 느리게 나와 눈을 맞췄다. 얼음이 아메리카노 안에서 서로 부딫히듯이, 사요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부딫혔다.

 

  "...이사하는 건 번거로우니까요."

  "그렇지, 번거롭지."

  "이마이 씨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 기세였다. 나는 재빨리 사요의 말을 가로챘다.

 

  "난 이사 갔어. 아무래도 대학교에 가깝게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대학교에서 여기까지 멀진 않았나요?"

  "음... 좀 걸리긴 했지만 괜찮아."

 

  괜찮다니, 난 대체 왜 괜찮은 걸까. 뭐가 괜찮은 걸까. 머리가 아파왔다.

 

  "선뜻 와주셔서 좀 놀랐어요."

 

  나도 내가 여기까지 단숨에 달려와서 좀 놀랐어.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뭔가요?"

  "...응?"

 

  나는 잠시 내가 예전에 조심없이 흘린 말을 잊고 있었다. 맞아, 화장실에서 나가려는 사요를 붙잡은 건 나였다. 다음에 이야기하지 않을래, 라면서. 막상 마주치고 있으니 입을 열기가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사요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조차 잘 모르겠다.

  내 대답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는 사요에게 차마 어색한 말을 지어낼 수는 없다.

 

  "미안... 사실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사요는 진실을 확인하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이마이 씨, 쓸데없는 참견일 수도 있지만... 과거에 너무 미련을 두지 마세요."

 

  숨이 막혔다. 괜히 플라스틱 컵을 꽉 쥐었다. 음료와 바깥 공기의 온도차로 물이 흥건히 손바닥을 적셔왔다. 나는 흥건한 이 물처럼 당장에라도 흘러버릴 것 같은 마음인데. 사요는 너무나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과거에 미련을 둘수록 주변 사람은 불행해질 겁니다. 특히... 남자친구 분은."

 

  아, 화장실에서 내 전화의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던 걸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잊으세요. 오늘 그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했어요."

 

  그 말을 듣자 애써 외면해왔던 이 괴롭고 조바심이 나는 감정이 무엇인지 직면할 용기가 생겼다. 나는 히카와 사요가 그리웠던 것이다. 히카와 사요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사요는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게 느끼자, 처음에는 숨이 막혔던 것이 뚫리면서 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한마디로 오기가 생긴 것이다. 고개를 들었다.

 

  "나도 노력 많이 했어. 근데... 안 되는 걸 어떡해..."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사요는 별안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눈을 크게 뜨더니 음료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탕, 유리잔이 탁자와 세게 부딫혔다. 사요는 바깥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가요? 이제와서? 끝내자고 한 것도 당신이잖아요. 어처구니가 없군요."

  "...사요..."

  "저는 이만 일어날게요."

 

  그대로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안간심을 쓰는 듯이 사요가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나는 한 모금도 못마신, 밍밍해져버린 아메리카노를 버리고 사요를 뒤쫓아갔다. 사요의 발걸음은 빨랐다. 여기까지 달려온 간절한 심정으로 이윽고 사요의 팔을 잡았다.

 

  "사요!"

 

  사요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는 공간을 주시했다. 내가 혐오스럽겠지.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나도 지금의 내 모습이 구역질이 나는데 사요라고 다를까.

 

  "사요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줘."

 

  그제서야 사요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방 하나만 잡아줄래? 나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들었으니까 그건 사요가 해줄 수 있지?"

  "....."

  "사요 집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

 

  사요의 시선이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내 마지막 말에 납득한 건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사요는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먼저 내 곁을 홱 지나갔다. 나는 잰걸음으로 사요를 따라갔다. 앞서가는 사요의 뒷모습,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면 늘 앞에서 이끌어주던 사요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까까지 차오르던 오기가 시야를 일렁이는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 이젠 만질 수조차 없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멍청한 과거의 이마이 리사가 모두를 괴롭게 했다. 사요도, 나도.

  침대 하나와 화장실, 그리고 텔레비전. 딱 그렇게만 있는 깔끔하고도 작은 방이 주어졌다. 사요는 방 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내가 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요는 이제 임무를 다 마쳤다는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안녕히 가세요."

 

  잘 자라는 말 대신에 잘 가라는 말. 문고리를 틀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요...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다시 사요를 붙잡았다. 사요가 발걸음을 멈췄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순환하고 있는 바쁜 복도의 공기 속에서 사요의 머리카락 끝이 조금 꿈틀댔다.

 

  "나 좀 안아주고 가면 안 될까?"

 

  드디어 단단해보이던 그 등이 뒤돌아섰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뻥긋거리던 사요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내 얼굴만 비추던 그 눈에서는 무언가가 차오르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 알겠다. 사요의 눈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서글픔이었다.

 

  "왜... 왜 울어요, 이마이 씨..."

 

  나는 이게 뭐라고 울고 있는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사요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발을 뒤로 돌렸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나를 앞서 빠르게 걷던 그 모습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온 사요는 망설임 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몸이 뒤로 잠시 휘청거렸다.

 

  "제발 그렇게 떠났으면 돌아보지 말라고요. 괴롭게 하지 좀 말고..."

  "나... 나... 잘못된 거 아는데... 그래도..."

 

  방금 전의 상황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 안에서 쏟아질 말이 있었다. 사요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진정시켜주려는 듯 했다.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다 사요 같아서... 너무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이라... 다시 내치고, 내치고..."

  "......"

  "계속 네가 따라다녔어. 어딜 가든, 어떤 사람이랑 사귀든, 항상 네가 있었어."

  "...저도..."

 

  나를 껴안고 있는 사요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저도... 당신을 잊어보려고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항상 당신이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고개를 들어 사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요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눈물을 참았는지 눈은 빨개진 채로.

 

  "그랬구나."

 

  우리는 왜 이렇게 둘 다 바보 같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손을 들어 사요의 눈 밑을 훔쳐냈다. 나는 어쩌면,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요도 똑같이 나를 생각한다는 것.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진실을 갈구하는 눈빛을 보냈다는 걸. 그래서 사요가 다시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고 이 곳까지 뛰어올 용기가 생겼던 것이다. 내가 날카롭다고 느낀 모든 것들은 사요가 나를 확인하는 눈빛이었을까. 나를 시험해보기 위한 태도였을까. 사요는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공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흐른다. 우리가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어져있는 것이다. 나는 사요의 얼굴을 들어 그 입에 입술을 맞추었다. 사요는 짧게 숨을 삼키더니 이내 내 얼굴을 잡고 내 입술을 깨물었다. 사요의 안에 갇혀있던 것들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벽을 짚었다. 사요가 그대로 나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잔뜩 달아오른 손이 내 옷깃을 만지작거리다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다시 마지막의 그 순간으로 돌아와있었다. 우리는 맨몸으로 서로를 껴안았다. 사요가 내 살갗을 훑고 나의 모든 곳에 입을 맞추었다. 벅차오르는 숨을 사요의 입 안으로 불어넣었다. 그러자 물 한방울이 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사요... 울어?"

 

  내가 울었던 것처럼 사요도 울고 있었다. 아, 그 때 날 달래주던 네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울지 마, 사요."

  "이마이 씨..."

  "넌 너무 착해."

 

  사요가 조금 웃었다.

 

  "이대로 괜찮겠어? 다음에 하는 게..."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사요는 거세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부드럽게 내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렸다.

 

  "사랑해요, 이마이 씨. 지금도."

 

  나도, 사랑해.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다시 내 몸 곳곳에 사요의 흔적이 닿았다. 말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벅차게. 나 역시 사요의 몸에 후회없을 과거를 새겼다. 좋았던 모든 것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외면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솔직하게 마주하자. 나는 히카와 사요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지만 그 뿐이었다. 나는 사귀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이별을 통해 매번 느꼈다. 그렇게 세월이 안겨준 채찍은 나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다. 히카와 사요에게 돌아가. 히카와 사요를 잊지 마. 히카와 사요의 손을 잡아, 라고.

  내 밑에서 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사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내 이름. 너의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듣고 싶었어. 그 가슴에 입을 맞추니 사요의 향기가 듬뿍 끼쳐왔다. 사요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너무나도 닮은 심장이. 비로소 목소리가 트였다.

 

  "사랑해, 사요. 지금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