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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유루유리

[히마사쿠]피그말리온 효과 (prologue)

빨간 불이 들어왔다. 비상사태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옆에 걸린 흰 가운을 걸치려다가 이를 악 물고 뛰었다. 가운은 무슨, 이런 상황에서 가운이 무슨 의미라고!
짧았던 밝은 갈색의 머리는 이미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덕분에 뛰는 동안 세차게 뺨을 때려준다. 그동안 숨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왔다. 오직 이 날을 위해,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살아왔다. 그렇게 구박 받아가면서 하기 싫어했던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런데, 또다시 같은 결과물을 맞이해야 하다니...

캡슐이 있는 방은 경고문으로 가득 물들었다. 성급하게 문을 열었다가는 안에 가득 퍼진 열기 때문에 손잡이에 손이 달라붙어 익을 수도 있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매번 닥쳐온 상황이었지만 지난번과는 다르게 예감이 좋았는데. 실망이 커진 만큼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너 여기서 뭐하는거야!"

옆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손에 이끌려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고개 숙여!"

투박한 손이 이번엔 얼굴을 밑으로 짓누른다. 몸을 웅크리고 눈을 꼭 감았다.
굉음과 함께 실험실이 폭파되는 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늘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했다. 엄청난 폭발이 지나간 후에 몸을 일으켜 자신을 구해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하하... 니시가키 선생님."

그 이름을 부르자 더 허탈해진다. 두 사람 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서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넌 최선을 다했어."

니시가키가 망연자실한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이제 그만하자. 내가 아무리 폭파시키는걸 좋아해도, 니가 이러는 모습 보면서까지 이 실험을 하고싶지 않아."
"...."
"너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거 잘 아는데, 이제 그만 잊고..."
"도대체 왜 기억을 못하시는거예요...?"

비틀비틀 일어나 니시가키를 바라보았다. 니시가키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생 가능한 눈빛이 아니다. 살아가고는 있지만 죽은 몸이나 다름 없다.

"왜 그때처럼 못 만드시는거냐구요..."
"그건 어쩌다가 탄생한거야. 계획된게 아니라고! 몇번을 말해!"
"그래도 선생님이 만드신거잖아요.  하나도 기억이 안 날수가... 그것만 기억해내시면 이런 개고생은 할 필요가 없다구요..."

힘없이 돌아섰다. 실패 끝에 몰려오는 배신감과 다툼은 어쩔수 없다.

"저는 절대 포기 안해요. 이런 저를 생각해서라도 꼭 다시 기억해내주세요. 꼭이요."
"사쿠라코."
"그 이름 부르지 마세요."

생기 없던 눈은 어디로 가고 금세 니시가키를 해치기라도 할것 처럼 날카로워졌다.

"저는 오오무로 사쿠라코가 아니라구요. 더이상..."

그녀의 발 밑에 흰 가운이 지긋이 밟혔다. 폭발할때 먼지가 쌓여 참 볼품없다. 눈물이 흐른다. 성질 죽이고 살으라고 그 녀석이 그렇게 말했는데... 어김없이 분노에 눈물이 차오른다.
가운을 밟고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니시가키는 붙잡지 않았다. 사쿠라코가 밟고 지나간 가운을 집어들어 조심스럽게 털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잡아보니 한장의 사진이었다.

"사쿠라코... 난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사진을 내려다보는 니시가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다가 이내 피식,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창 밖에서는 사쿠라코가 잠시 머물러 눈물을 훔치는가 싶더니 걸음을 재빠르게 옮겨 사라졌다.

[한번만 더 너의 손을 잡아볼 수 있다면.
통째로 사라져버린 그 해의 여름을 위해 나는 평생을 바치는 중이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