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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유루유리

[히마사쿠]피그말리온 효과-03

*본 팬픽은 기존 캐릭터 설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향수 냄새가 곳곳에서 퍼져 올때면 습관처럼 너의 향기를 찾아보고는 한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시간을 받아들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후각에만 의존해서 너를 찾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너는 여기에 없다.

 

"저기..."

 

사쿠라코가 멋쩍게 뒷목을 긁적였다.

 

"굳이 안이래도 되는데."

 

뒷짐을 지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매장을 둘러보고 있던 치나츠가 고개를 홱 돌리며 눈을 흘겼다.

 

"무슨 소리야! 오늘 네 생일인데 이야기만 하다가 가려고 했어?"

"아.... 음...."

"괜찮으니까, 내가 골라주는 대로 대보고 입고 와봐. 일단 기다려. 마음에 드는게 없네..."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옷을 사본 기억이 딱히 없었다.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기 위해 갖가지 매력을 뽐내고 있는 물건들, 낯선 냄새에 사쿠라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몸이 굳어 있었다. 옷을 보는 안목도 없거니와 니시가키가 쇼핑을 가자고 할 인물도 아니었기에 누가 옷을 골라주는건 참 오랜만이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미 옷을 둘러보느라 멀찍이 떨어져버린 치나츠가 외쳤다. 사쿠라코는 보일듯 말듯 고개만 끄덕이면서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 곳은 활기차다. 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이 추운 겨울의 행진을 잠시 붙잡고 있는 듯 하다. 가족 단위로 많이 왔다. 그리고... 연인들도.

 

"이거 자기한테 잘 어울릴것 같은데."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옷을 대본다. 하늘색 외투다.

 

"아냐, 이런거는 때 잘 탄단 말이야. 다른거 보자."

 

연인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지나갔다. 사쿠라코는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남자가 여자에게 대본 하늘색 외투 쪽으로 다가갔다. 그 녀석에게 하늘색이 참 잘 어울렸는데. 조금 만져보니 두께도 꽤 있다. 이런 날씨에 딱이겠다.

 

"어서오세오 손님, 누가 입으실건가요?"

 

점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당황한 사쿠라코가 옷에서 급하게 손을 뗐다.

 

"아... 아뇨, 그냥 구경한거예요."

"천천히 둘러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점원이 지나가고 사쿠라코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 녀석을 회상하는 일은.

 

"사쿠라코, 여기서 뭐해?"

 

치나츠가 헉헉거리며 나타나 사쿠라코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너한테 어울리는 옷 찾았어! 얼른 와서 입어봐, 누가 집어갈라!"

"아, 아, 잠, 잠깐! 천천히!"

 

치나츠에게 끌려가면서도 외투에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곧 어떤 여자가 와서 그 외투를 보더니 집어간다.

회상거리 하나가 또 사라졌다.

 

 

 

 

 

 

 

 

 

***

 

머리카락이 하늘색이었다. 사쿠라코는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밝은 갈색이 왠지 모르게 하늘색에게 밀리는것 같다. 하늘색, 예쁘지. 이 밝은 갈색은 그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

한동안 멍하게 하늘색 생각을 하던 사쿠라코는 문득 과학 선생이 생각나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아!!"

 

분하다. 한순간은 진심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과학자가 되겠다는 사쿠라코의 대답을 들은 니시가키는 다짜고짜 사쿠라코에게 꿀밤을 날렸다. 내 수업시간에 졸지나 마라!...라며.

 

"과학자같은거 안될거야! 바보! 멍청이! 공부 안하고 평생 놀고 먹을거야!"

 

실천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당장 책상 서랍에 숨겨두었던 과자를 꺼냈다. 봉투를 거칠게 뜯고 우적우적 씹어먹으니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것 같기도 하다.

 

"시끄러워 사쿠라코!"

 

사쿠라코의 언니, 나데시코가 방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다 싫어! 저리 가버려!"

"한밤중에 웬 고함이야, 머리가 어떻게 됐냐?"

"몰라! 으아아아아!"

 

나데시코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바로 옆에 있는 하나코를 내려다보았다.

 

"귀신은 뭐하나, 저런거 안 잡아가고."

 

 

 

 

 

 

 

다음날, 니시가키의 수업시간. 사쿠라코는 대놓고 엎어져서 교과서에 낙서 중이었다. 이제부터는 이전보다 훨씬 철저하게 무시를 해주마! 일부러 종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우개를 쓰기도 하고, 연필로 책상을 쾅쾅 찢기도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니시가키는 수업에 더 열중했다. 평소에 수업도 제대로 안하면서 괜히 수업 하는 척이야. 사쿠라코가 입을 삐죽거렸다.

열심히 낙서를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아카리가 사쿠라코의 낙서를 흘끔 건너다보더니 웃으면서 속삭였다.

 

"사쿠라코, 그건 누구야?"

"....응? 뭐가?"

 

그러고나서 그린 것을 보니 캡슐 안에 들어가있는 히마와리였다. 뭐, 뭐지? 내가 왜 이걸 그리고 있지?

 

"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급하게 지우개로 지우다가 북, 소리를 내며 교과서가 찢어졌다. 니시가키가 사쿠라코를 발견하고는 칠판을 탕탕 두드렸다.

 

"거기, 장차 위대한 과학자가 되실 오오무로씨! 이 문제 한번 맞춰봐라."

"네?!"

 

낭패다. 교실에 있던 친구들이 사쿠라코를 돌아보면서 킥킥댔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는데 영 처음 보는 문제다.

 

"어... 그게..."

"진짜 과학자라도 될 모양인가보지? 수업시간에 졸지 말라고 꿀밤 때렸더니 진짜 안 조네."

"으....!"

 

학우들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아카리와 치나츠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쿠라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치나츠가 공책에 문제 풀이를 써서 몰래 사쿠라코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사쿠라코가 보기도 전에 니시가키가 먼저 알아차렸다.

 

"치나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자꾸 그렇게 해주면 저 녀석 과학자 못돼."

"...과학자 안될건데요."

"어어, 그래? 안타깝구나. 그럼 이 문제를 풀 필요는 없지."

 

니시가키가 앉으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사쿠라코는 댓발 나온 입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지루한 수업은 한동안 이어졌다.

니시가키의 수업이 끝난 뒤에 하교할 시간이 될때까지 사쿠라코는 내내 낙서만 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수업을 듣는것도 아니지만 손은 계속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누구를 그리고 있는거야?"

"그냥, 사람."

 

치나츠와 아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인것 같은데? 친구야?"

"사람 아니야."

"아까는 사람이라면서?"

"...사람인데, 사람은 아니야."

 

여전히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사쿠라코를 보며 아카리가 미소지었다.

 

"그래도 수업시간에 사쿠라코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게 기뻐."

"그건 그렇네. 안잔것 만으로도 반은 온거야."

 

사쿠라코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씨익 웃었다.

 

"저기, 오늘도 두 사람 먼저 갈래? 난 볼일이 있어서..."

"오늘도? 급한 일이야?"

"미안. 내일부터는 꼭 같이 갈게."

 

사쿠라코가 합장을 하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아냐, 같이 가는게 뭐 대단한 일이라구. 먼저 갈게! 일 얼른 끝내고 집 가."

"고마워!"

 

두 사람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사라지자 사쿠라코는 여느때처럼 조용히 가방을 들춰메고 과학실 쪽으로 갔다. 니시가키를 골탕먹여야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니시가키를 골탕먹일 수 있는 일이 딱 한가지가 있었다. 가방을 살짝 열어서 체육복이 잘 있는지 보고, 심호흡을 했다. 일단 아직 들어갈 시간이 아니니 기회를 엿봐야 한다.

바로 과학실로 향하는 대신에 옆 교실에 들렀다. 음악부가 쓰는 부실이었는데 몇몇 학생들이 남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미안, 잠깐만 여기 있어도 돼?"

"응, 상관은 없지만..."

"고마워!"

 

학생들 눈에는 가방을 꼭 껴안고 밖을 흘끔대고 있는 사쿠라코의 모습이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사쿠라코를 잠시 지켜보던 학생들은 곧 자기들 할 일에 집중했다.

조금 기다리다보니 역시나 니시가키가 과학실에서 나온다. 전화를 하면서 반대편 계단 쪽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포착하자 마자 음악실을 뛰쳐나와서 과학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쿠라코가 바로 향한 곳은 캡슐실이었다.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열자 쉽게 열린다. 서프라이즈라면서 보안은 참 부실하게 해놨다. 먼지가 많이 쌓여있는 곳이라 크게 눈에 띌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히마와리, 잠깐 실례할게."

 

기계를 빙 둘러보면서 스위치를 찾았다. 니시가키가 뒷목을 잡는 모습을 보려면 예정보다 일찍 히마와리를 깨워서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일 뿐이다. 여기 어딘가에 분명 캡슐을 여는 버튼이 있을 것이다.

 

"에라, 일단 아무거나 눌러보자!"

 

당장 앞에 있는 빨간 버튼을 누르자, 김 빠지는 소리가 크게 나는 바람에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급하게 입을 막고 침착하게 캡슐 안을 들여다보니,

 

"으아!!"

 

참았던 비명이 터졌다. 물이 찰랑이는 캡슐 안에서 히마와리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으...윽!"

 

어, 어떻게 해야하지? 깨어날줄은 몰랐다. 허둥지둥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 히마와리가 캡슐 벽에 달라붙듯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싱긋 웃는다.

 

"아... 아.... 안녕....?"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는데 아직 인사가 뭔지 모르는건지 계속 눈만 꿈뻑인다. 물 속에 있는데 숨 쉬는데엔 무리가 없는걸까? 그때, 히마와리의 등 뒤로 실 같은 장치가 이어져있는걸 발견했다. 저걸로 공기를 주입하는구나.

 

"조금만 있어. 꺼내줄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우두커니 서버렸다. 히마와리는 이제 막 태어난 인간이라고 봐도 무방한, 이 순간 만큼은 가장 순수한 영혼이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동안 죄짓고 살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쿠라코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곳을 훑어보기엔 너무 민망하다. 아무래도 나이 설정을 조금 높게 해놨나보다. 몸매가... 특히 가슴이 적어도 중학생 또래는 아닌 듯 하다.

 

"어, 그러니까..."

 

다음 버튼은? 방금 눌렀던 버튼 옆에 버튼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이젠 섣불리 누르기가 무섭다. 물을 빼야 하는데. 히마와리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게 느껴진다. 괜히 얼굴이 화끈해진다. 에라이, 모르겠다!

눈을 꼭 감고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김 빠지는 소리가 나더니, 하수구로 물이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살짝 눈을 떠보니 물이 제대로 빠지고 있다. 히마와리가 공중에 붕 떠있듯이 있다가 물을 따라 천천히 가라앉더니 이내 두 다리로 선다.

 

"오... 됐어..."

 

캡슐을 열 수 있는 손잡이는 캡슐을 감싸고 있는 유리 바로 옆에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듯이 힘을 주니 물이 빠져서 가벼워진 문이 쉽게 열린다.

 

"걸을 수 있겠어?"

 

말은 알아들을 수 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물에서 막 나와서 물에 빠진 생쥐 꼴 같았지만 우스꽝스럽지는 않다. 너울거리던 머리카락은 물을 머금고 축 늘어져있었고 몸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히마와리가 천천히 앞으로 나와 사쿠라코와 수평선에 섰다. 사쿠라코보다 조금 크다. 역시, 어른인가?

 

"감기걸리겠다. 우선 옷부터 입자."

 

몸을 닦을 수건이 필요한데, 주변을 둘러보니 때마침 니시가키의 여분 가운을 발견했다. 냅다 집어서 대충 몸을 닦아주는데 히마와리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쿠라코를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거 입을 수 있어?"

 

되는대로 준비해온 체육복을 건네자 순순히 입는다. 애 하나는 똑똑하게 만들어놨군. 인정해, 니시가키.

속옷을 입지 않아서 좀 불편하려나, 싶었지만 옷 같은건 입어보지 못했을테니 어차피 불편함 같은건 모르겠지, 싶다. 옷이 좀 끼는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난 오오무로 사쿠라코야."

"....주인....님?"

"어...어?!"

 

작디 작은 입으로 처음 내뱉은 말이다. 뭔가 가슴이 벅차다. 주인님이라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똘망똘망한 눈이다.

 

"무....뭐, 정 그렇다면 주인님 해줄게! 이제부터 넌 내 하인이다?"

"...주인님."

"이럴때가 아니야. 얼른 가자. 숨어야돼."

 

다짜고짜 히마와리의 손을 잡았다. 로봇인가 했는데 그건 아닌것 같다. 사람의 살결같이 부드럽다.

이제 막 깨어나서 뛰는건 무리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잘 따라와준다. 당분간 집에서 같이 지내게 할 생각이다. 니시가키가 놀려서 미안하다고 할 때까지!

 

"오오무로... 사쿠라코..."

 

앞서 뛰어가고 있는 사쿠라코를 보며 이름을 중얼거리던 히마와리가 다시 생긋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리에 힘을 줘서 뻗딩긴다. 달려가고 있던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힘에 이끌려서 멈춰섰다.

 

"왜, 왜그래?"

 

히마와리가 말 없이 웃으면서 사쿠라코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다. 쓰다듬듯이 머리카락을 몇번 어루만지더니, 눈을 천천히 감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얼른 여기를...!"

"주인님... 집... 갑니다."

"뭐?"

 

히마와리가 눈을 뜬다. 뭔가 이상하다. 이전에 똘망똘망하던 눈빛이 아니다. 깊은 수렁처럼 초첨 없는 탁한 눈빛이다. 곧 히마와리가 앞서 달리기 시작한다.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속도로.

 

"아아아아아악!!"

 

뭐야 얜, 역시 로봇이잖아!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