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리, 오늘 우리 집에서 놀자! 언니가 맛있는거 해준댔어."
"진짜? 와~! 좋아!"
하교 시간, 아카리와 치나츠가 놀 생각으로 들떠있는 동안에 사쿠라코는 멍하게 가방을 쌌다. 아까 그 일이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는다. 안에 들어가있던 사람은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과학 선생은 왜 굳이 사람을 만들어서 쓸 생각을 할까? 조수라면 해부할때 보조 역할을 하게 하는 그 조수일까? 아니면 해부 당하는 입장은 아닐까... 심각한 동시에 너무 황당무개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해부를 당하는 입장이라면 구해줘야 한다!
"사쿠라코, 너도 같이 놀자. 마침 내일 주말이니까 자고 가도 돼."
"간만에 셋이서 밤새도록 놀자!"
"아카리, 너는 아홉시만 돼도 자잖아."
"아... 그 시간만 되면 자동으로 눈이 감겨서... 헤헤."
치나츠가 대화에 끼워주려는데도 사쿠라코는 멍하게 있다가 힘없이 가방을 들춰맸다.
"미안한데, 오늘 먼저 갈래?"
"...응? 왜 그래?"
"갑자기 할 일이 생겨서... 이따가 시간 나면 치나츠네 집에 갈게."
"아,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아카리와 치나츠가 먼저 교실을 나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은 동시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사쿠라코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과학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건 아니겠지?"
"물어보기에는 너무 심각한 표정이어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사라지자 사쿠라코는 그제서야 교실을 나섰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한 곳은 과학실이었다. 학생들은 하교하느라 과학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쿠라코를 신경쓰지 않고 지나다녔다. 마치 사쿠라코 혼자만 멈춰있는 시간 속에 있는것 같았다.
들어갈까 말까 수백번 고민하는 사이에 과학실 문이 열리더니 니시가키가 나왔다. 커피 한잔을 들고 기지개를 켜다가 앞에 서있는 사쿠라코를 보더니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오! 또 온거냐?"
"...."
"뭐 잊어버린거라도?"
"없어요..."
"때마침 심심하던 차였는데. 들어올래?"
니시가키가 길을 비켜주자 사쿠라코는 성큼성큼 니시가키를 지나쳐 들어갔다.
"너무 지루해서 말이야. 하교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회춘 좀 하려고 했지. 과학실에 눌러붙어있다보면 폭삭 늙는 느낌이라니까. 바람도 가끔씩 쐬어주고 해야지. 안그래?"
니시가키가 사쿠라코의 의자를 들고 오면서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사쿠라코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부해놓은 동물들이 아까보다 훨씬 끔찍해보였고 니시가키의 하얀 가운은 가식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커피...는 아직 미성년자라 안되고, 주스라도 줄까? 때마침 토마토 주스가 하나 남았는데."
냉장고에서 꺼내서 내민 토마토 주스마저도 끔찍하게 보인다. 꺼림직했지만 사쿠라코는 받아들고 뚜껑을 땄다. 냄새를 맡아보니 영락없는 토마토다.
"독 안들었으니까 시원하게 마셔."
"저기... 그것보다도..."
"음?"
토마토 주스를 빤히 바라보던 사쿠라코가 천천히 니시가키를 건너다보았다. 니시가키는 수업시간마다 조는 깜찍한 여제자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쿠라코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히...히마...
그때 니시가키가 흠칫 하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 전화가 왔네. 잠깐만."
니시가키는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과학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사쿠라코는 조용히 일어나 캡슐실 앞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기계 가동하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있었다. 니시가키는 아직 통화중이다. 제발 통화가 빨리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이봐."
캡슐을 똑똑 두드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발가벗은 채로 등을 돌리고 있다.
"...일어나봐. 내 목소리 들려?"
물고기가 들어있는 어항을 두드리지 말라고 배웠지만 어쩔 수 없다. 급하다.
"자고 있지만 말고, 눈 좀 떠봐."
공기방울 두개가 수면 위로 올라간다. 숨을 쉬고 있는걸까?
가만, 그런데 깨운다고 해도 옷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대로 데리고 나갔다가는...
"야, 자는 척 하지 말고, 지금 급하단 말이야! 저 과학 선생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 너한테..."
캡슐을 쾅쾅 두드리던 사쿠라코의 손이 곧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일어나지 않을거야. 물 안에 지독한 수면제를 타놓은게 분명해.
"히마와리."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불러보니 입이 간지럽다. 히마와리라는 아이는 자기 이름을 듣자 다리를 꿈틀대는 듯 싶었으나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신비롭지?"
어느새 니시가키가 통화를 마치고 사쿠라코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쿠라코는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캡슐에서 한걸음 물러났다.
"뭘로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아무래도 히마와리가 보고싶어서 찾아온것 같은데, 역시 내가 만든 히마와리지만 매력이 엄청나단 말이야."
"이 녀석을 어떻게 하실거예요...?"
"어떻게 하다니? 조수로 쓴다니까? 일손이 부족해서 말이야. 해야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과학자는 피곤해..."
"...과학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니시가키가 흥미롭다는 듯이 사쿠라코를 내려다보았다. 사쿠라코는 자기가 말해놓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뭐야, 내가 왜 이런 말을... 공부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데 과학자가 되겠다고?
"호오, 내 미래 조수라도 꿈꾸는건가? 그래?"
"....."
"하긴, 어렸을때 좀 맹한 애가 나중에 큰 인물이 되는 경우가 많지. 네가 과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
니시가키가 사쿠라코의 작은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과학자가 될테냐? 되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고."
"......"
"말이 정말 없는 녀석이네. 나 무서운 사람 아니야. 터놓고 얘기하자."
사쿠라코는 니시가키 어깨 너머에 있는 히마와리를 바라보았다. 히마와리의 고개가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얼굴을 반쯤 돌린 상태에서 더 돌리지 않았다. 눈은 얌전히 감겨있었고 입은 살짝 벌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니시가키를 바라보았다. 진짜 인간을 해부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의도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경찰에 신고해버릴거야.
"할게요. 되고싶어요."
***
사쿠라코가 담배를 꺼내 물자마자 직원이 급하게 달려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실내에서는 금연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담배를 다시 집어넣기에는 아깝다. 바깥에 나가서 피고 올까... 엉덩이를 들썩이려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들어오더니 사쿠라코를 보며 활짝 웃었다.
"사쿠라코!"
아, 조금만 늦게 오지.
"오랜만이야, 치나츠."
"화장실 가려고?"
"아니, 아니. 앉아."
치나츠는 두 갈래로 묶었던 머리 스타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긴 생머리가 되었다. 하긴, 서른이 넘었으니 언제까지 그러고 다니겠어. 여전히 분홍색 분위기로 활기차다. 그에 반해 이쪽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이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탁해지는 것만 같다.
"다크써클 심해... 잘 먹고는 다녀?"
"걱정 마. 입에 풀칠 정도는 하고 살아."
"니시가키 선생님은?"
"...잘 계셔."
그 망할 선생.
"아카리랑은 잘 지내고?"
"나 요즘 제대로 요리 배우고 있거든. 아카리가 맨날 해주는거 먹는것도 미안하잖아."
"언제 한번 갈테니까 해줘."
"그래, 니시가키 선생님이랑 꼭 같이 와."
"....."
원 플러스 원처럼 따라붙는 관계라니.
사쿠라코는 멍하게 음료수를 마시며 치나츠의 근황을 듣는 동안 치나츠의 미소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본인은 웃어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는데 아카리와 시작한 자취 생활이 많이 만족스러운가보다. 치나츠는 얼마 전에 취직을 해서 아카리와 함께 사는 중이다. 중학생때 짝사랑하는 선배가 있었던것 같은데... 아닌가.
"일은 할만 하고? 어떤 일 하는거야?"
"아직 배우는 단계라서 어려워. 알바랑은 많이 다르더라구."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던 치나츠가 사쿠라코의 눈치를 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연구는 잘 돼가?"
아, 그 연구 말이지. 사쿠라코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나 잠깐만 담배 한대만 피우고 와도 돼?"
동문서답. 치나츠는 담배를 꺼내드는 사쿠라코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담배 못 끊었어? 너 건강 나빠져!"
"걱정해줘서 고마워. 언젠가 끊겠지 뭐."
"결혼도 해야하는데. 어쩌려구."
"안하지 뭐. 딱히 할 생각도 없고."
여유롭게 담배를 들고 나와 불을 지폈다. 유리창 건너편에서는 치나츠가 사쿠라코를 보다가 마지못해 웃었다. 그러더니 휴대폰을 한다. 누구에게 문자를 하나 봤더니 유이 선배라고 적혀있다.
아 맞다 저 녀석, 유이 선배 좋아했었지.
"나는..."
담배 연기가 한숨을 타고 올라간다. 나는... 누구를 좋아했던가.
수명을 다 한 담배가 바닥에 툭 떨어지자 생각이 멈춘다. 아무렇지 않게 신발 끝으로 담배를 짓이기고 치나츠를 위해 옷을 털었다.
이제는 무엇을 위한 연구인지도 잊었다. 그저 몸이 시키는대로 가는 것일 뿐.
연구가 성공하면...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감이 있을 뿐이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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