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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눈을 떴다. 창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코를 뚫어주며 머리가 맑아졌다. 조금씩 해가 뜨고 있지만 아직 알람이 울릴 시간은 아니다. 아랫배가 뻐근한게 아무래도 화장실을 가야겠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서 곤히 자고 있는 히마와리가 보였다. 아직 세상이 따뜻해지기 전, 히마와리의 얼굴도 왠지 모르게 차가워 보였다. 천장을 보고 완전히 정자세로 자고 있는 히마와리는 미동도 없었다. 죽었나 싶어서 귀를 코에 가까이 대보니 당연하다는 듯이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괜히 볼을 살짝 찔러보았다. 사람이었다면 따뜻했을 살갗은 차갑고 조금 딱딱하다.
'저는 니시가키 히마와리군요.'
사쿠라코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어났다. 어차피 내가 만든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시 자리에 누우니 해가 그 새 많이 떠올라있다. 창을 훌쩍 넘어 바닥에 드리워진 햇살이 히마와리를 비춘다. 햇빛이 UFO의 빛처럼 히마와리를 어디론가로 납치할것만 같이 강렬해진다. 갑자기 히마와리가 움찔거린다. 사쿠라코는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 가슴을 안고 재빨리 돌아누웠다. 두 손을 꽉 쥐고 놀란 속을 달래고 있는데 히마와리가 다가오는건지 부스럭소리가 나면서 숨소리가 커진다.
"아직 자나요?"
차가운 손이 사쿠라코의 뜨거운 팔뚝에 살며시 올려졌다. 눈을 뜨면서 나도 방금 일어났어, 라고 하면 되는 일인데. 사쿠라코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속을 식히려고 애썼다. 제발 가. 난 아직 자고 있는거니까, 모른척 해.
"자네요..."
가늘고 여린 손길이 떠난다. 이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밑 층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무겁게 느껴진다. 역시 로봇이라 기상 시간도 빠르구나. 사쿠라코는 다시 돌아누워서 히마와리가 사라진 문지방 너머를 바라보았다. 팔뚝이 뜨겁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세상에 빛이 완전히 물들었다.
"배고파."
뱃속이 꼬르륵대는 소리를 되새기듯이 중얼거렸다. 음식 냄새가 솔솔 흘러들어온다. 사쿠라코는 냄새에 이끌리듯이 1층으로 내려갔다.
"모두들 좋은 아침~"
기지개를 켜며 인사를 하고 보니 음식을 차리고 있어야 할 나데시코가 식탁에 앉아있었다. 나데시코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쿠라코를 바라보았다.
"아, 일어나셨나요?"
대신 음식을 나르고 있는건 히마와리였다. 익숙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사쿠라코 몫의 밥그릇을 막 나르던 차였다.
"...뭐야? 왜 네가..."
"주인님...이 아니라, 사쿠라코가 먹을 음식인데 제가 준비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해봤어요."
그러면서 또다시 그 표정을 짓는다.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뿌듯한 표정. 사쿠라코를 위해서라면 그렇다고 치지만 나데시코를 제쳐놓을 줄은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경계를 하더니.
"요리 해본적 있어?"
놀라서 뻔한 질문이 나왔다. 어제 막 태어났는데 요리를 해봤을리가 없다.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의 의자를 뒤로 당겨주며 웃었다.
"어제 먹었던 것들을 토대로 만들었어요."
"...절대 미각도 아니고."
일단 다같이 둘러앉았다. 사쿠라코를 위해서 만들었다니, 나데시코와 하나코는 저 무조건적인 복종의 원인에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냄새는 좋은데."
사쿠라코가 진지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평소처럼 쥐었다가 전날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서 재빨리 바르게 쥐고, 깔짝깔짝 서투른 젓가락으로 두부 조림을 조금 잘라서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는 사쿠라코의 입술을 따라 나데시코와 하나코의 목이 꿈틀거린다.
"...맛있어."
사쿠라코가 옆에 앉은 히마와리를 돌아보았다. 나데시코와 하나코도 즉시 반찬들을 먹어보더니 감탄을 연발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이건... 가히 혁명이라고 할 만한 음식인데."
"대박. 사쿠라코 언니 대신에 우리랑 살아주면 안될까, 히마와리 언니?"
"이게!"
사쿠라코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옆에 앉아있는 히마와리를 흘끔거리며 성질을 죽였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난 히마와리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모범을 보여야지.
"자... 잘 먹을게, 히마와리."
하마터면 하나코를 따라서 영원히 이 집에서 살아달라고 할 뻔했다. 농담으로라도 귀가 빨개질 말이 잠시나마 마음 속에서 진심으로 꿈틀댔다는 것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런 애가 그런 선생 밑에서 일 할 예정이었다니, 역시나 아깝다. 그렇다고 이런 집에서 식모살이나 할 아이도 아니지만.
식사 후에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히마와리가 조심스럽게 사쿠라코의 옷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그래?"
히마와리가 쭈뼛거리면서 내민 것은 도시락이었다. 요리 좀 한다고 나데시코가 부려먹는건 아니겠지?
"이것도?"
"제가 만들었어요. 학교에 가면 도시락이 필요할거라고 나데시코 씨가..."
"그렇긴 하지만... 일부러 이럴 필요는 없어."
나데시코의 프라이팬 위에서 구워질 히마와리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히마와리는 풀이 죽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제 음식이 마음에 안드시나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아닌데 말이야!"
사쿠라코가 냉큼 도시락을 받아서 품에 안았다. 이건 마치 출근하는 남편한테 정성을 들이는 아내의 모습이다. 일단 도시락을 받긴 했지만 히마와리의 표정이 쉽게 나아질것 같진 않다.
"음식 정말 맛있었어. 정말이야."
"솔직하지 못하네요, 사쿠라코는."
"...에휴."
손을 들어서 히마와리의 머리 위에 턱, 얹었다. 히마와리가 바닥을 보고 있다가 놀라며 눈을 들었다. 사쿠라코가 애써 웃어보였다.
"도시락 고마워. 학교 다녀올게."
히마와리가 그제서야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완동물 키우는 기분이다. 아내 같기도 했다가 동생 같기도 했다가 강아지 같기도 했다가. 종잡을 수가 없다.
"아침부터 연애하지 말고 학교나 가. 지각한다?"
나데시코가 하나코의 손을 잡고 사쿠라코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지나갔다. 사쿠라코가 홱 뒤돌아서며 머리카락을 세웠다.
"너도 지금 가면 지각이든?! 남말 하시네!"
"택시 탈거야. 히마코 안녕."
히마코? 별명은 언제 지은거야? 사쿠라코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 할 시간이 없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열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히마와리가 그 자리에 서서 모두를 배웅하고 있었다.
"히마와리, 빨래 부탁한거 꼭 널어주고 청소랑 설거지도 부탁해."
"사쿠라코를 위해서라면..."
역시나 나데시코는 이미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있었다. 사쿠라코가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하나코와 함께 재빨리 밖으로 꽁지를 뺀다. 어제 태어난 애한테 무슨 일을 시키고 있는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행동이니 더 약이 오른다.
"아, 저기."
사쿠라코가 볼을 긁으며 나데시코가 열고 간 현관문을 붙잡았다. 더운 공기가 집 안으로 확 끼쳐온다.
"금방 갔다올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에 있어. 알겠지?"
"네. 사쿠라코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반드시 지킬게요."
아침 햇살이 히마와리를 빼앗아갈듯이 강렬했던 탓 때문일까, 괜히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사쿠라코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학교를 향해 힘차게 뛰었다.
수업 하는 소리는 간데 없고 초 흘러가는 소리만 가쁘게 들린다. 째깍 째깍, 째깍. 초가 정확하게 12시를 가리키자 종이 울리고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사쿠라코는 종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서 짐을 쌌다. 선생님이 교재를 챙겨서 나가고 학생들이 슬슬 갈 준비를 할때 사쿠라코는 이미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사쿠라코, 좋은 일 있어?"
치나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니, 없는데?"
"근데 아까부터 계속 웃기만 하고... 수업 시간에도 웃고 있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구나, 내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도시락통을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오늘 점심은 맛있었다. 나데시코가 싸준것과 비슷한 메뉴였지만 나데시코야 항상 하던 것이었고, 히마와리는 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요리다. 그 요리를 나를 위해... 기분 좋은 일이지만 니시가키가 주인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게 프로그래밍 해놓아서 그렇다는걸 알고 있기에 씁쓸하다. 이런 대우를 받아야 했을 사람은 사쿠라코가 아니라 니시가키였다.
"그것보다도, 오늘은 같이 갈수 있어."
"평소에 하던 일은 끝난거야?"
"응! 같이 가자."
평소에 하던 일이라면 히마와리에게 들르는 일이었을텐데, 되돌아보니 왠지 부끄럽다. 생판 모르는 애인데 호기심을 가졌다는 것도 그렇고, 니시가키에게 도전장을 던진 행동도 너무 어리게 행동한건 아니었나 싶다.
복도를 걸으면서 과학실을 지나쳤다. 흘끔 안을 들여다보니 니시가키는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히마와리가 있던 캡슐을 살펴봤을 것이고, 히마와리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범인이 나라는 것도 알고 있을지도. 음침한 과학실에서 고개를 돌리자 계단 너머 복도 끝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창 밖을 바라보다가 이쪽을 바라본다. 니시가키다. 집에 돌아간게 아니었나?! 사쿠라코는 잠시 뜨끔해서 걸음을 멈출 뻔 했지만 아카리에게 팔장을 끼면서 고개를 푹 숙여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니시가키는 아는 척도 않고 계단을 내려가는 사쿠라코를 빤히 보기만 했다. 그 눈길 끝에는 여유로운 미소도 걸쳐있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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