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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유루유리

[히마사쿠]피그말리온 효과-05

*본 팬픽은 기존 캐릭터 설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벽에 가만히 기대었다. 니시가키는 분명 천재다. 말도 할 줄 알고 생각도 할 줄 아는 로봇은 전무후무한 업적이다. 하지만 아까 그 표정... 분명 사람이 아닌 몸으로 사람의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아마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조차 모를수도 있다. 일렁이던 푸른 눈동자가 자꾸만 눈 앞에 어른거린다. 아마 사람이었다면 눈물을 글썽였겠지. 사쿠라코는 괜히 복잡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덜컥, 문이 열리고 히마와리가 눈만 빼꼼 내밀었다. 등을 댔던 벽이 막 따뜻해지려고 하던 찰나였는데. 사쿠라코가 히마와리 쪽으로 돌아섰다.

 

"사이즈는 맞아?"

"네..."

"다행이네. 앞으로 나데시코 옷을 빌려 입으면 되겠다."

 

사쿠라코의 옷 중에서는 히마와리에게 맞는 것이 없어 나데시코에게 부탁을 했다. 꽤 잘 맞는 모양이다. 하늘색 셔츠에 갈색 땡땡이 치마라... 또래에서 풍길 수 없는 분위기다. 왠만한 사람보다 비율이 좋아서 마치 모델 같다.

 

"저기.. 근데, 이건 왜 입어야 하는건지 모르겠어요."

 

히마와리가 어깨를 움찔거린다. 사쿠라코가 곧 얼굴이 빨개지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 그건, 그러니까... 어... 예, 예뻐 보이려고... 입는거랄까..."

"예뻐 보이려고...?"

"아마도..."

 

로봇에게 속옷의 개념을 알려주자니 참 어렵다. 히마와리는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이다.

 

"예, 예뻐, 너..."

"정말인가요?"

"응... 아마도..."

 

무슨 말을 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히마와리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층 표정이 밝아졌다. 앞으로 속옷 입는지 안입는지 체크부터 해야겠다. 깜빡 하고 안입고 다니면 곤란하니까. 입는 법을 대충 알려주긴 했는데 로봇의 살이 과연 사람의 살처럼 탄력이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굳이 속옷은 필요 없을것 같긴 하다. 제대로 입긴 했으려나. 히마와리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는 사쿠라코의 눈빛이 비장하다. 히마와리는 아직 수치심같은건 모르는건지 연신 자신의 가슴을 만지작거린다.

 

"어, 어이, 그만 만져..."

"불편해요."

"참아!"

 

히마와리의 손을 잡아서 옆구리에 딱 붙였다. 차렷 자세로 얼떨떨하게 서 있는 히마와리는 사쿠라코보다는 키가 조금 더 커서 사쿠라코의 시선은 자연스레 히마와리의 가슴 쪽으로 갔다. 한번 찔러보고 싶기는 하다. 사람이랑 같은 느낌일까?

 

"음...."

 

손가락을 꿈찔대던 사쿠라코는 결국 한번 찔러보기로 한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올리는 사쿠라코를, 히마와리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뭘 할지 궁금한 표정이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이 막 찌르려던 찰나,

 

"사쿠라코! 밥 다 됐..."

"으아아아거아가어강나ㅓㄱ!!"

 

당황해서 혀를 깨물며 히마와리 뒤로 숨었다. 나데시코가 국자를 들고 2층 계단 끝에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 밥은 먹고 해."

"그, 그, 그런거 아니라고! 멋대로 올라오지 좀 마!"

"2층이 니 방이냐?"

 

나데시코가 투덜대며 내려가자 사쿠라코가 조심스럽게 히마와리 앞으로 나왔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건데. 너 몇살이야?"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걸 보면 니시가키가 어느정도의 데이터를 넣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나이도 알고 있으려나? 히마와리는 흔쾌히 대답했다.

 

"열 넷입니다, 주인님."

".....응?"

 

스물 넷을 잘못 들었나. 귀를 후비고 있는 사쿠라코 앞에서 히마와리가 눈을 번쩍이더니 무언가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이름, 히마와리. 나이, 열 넷. 신장, 158 센티미터. 혈액형, A형. 싫어하는 것..."

"아아, 그만 그만!"

 

소름이 돋는다. 쟤가 나랑 동갑이라고? 니시가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괴물 가슴을 만들어낸거야!

충격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히마와리는 생글 생글 웃고 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차린건 없지만 많이 먹어."

 

하나코가 밥그릇을 들며 말했다. 히마와리는 반찬들을 쭉 훑어보다가 하나코가 한 대로 밥그릇을 들었다.

 

"오늘 반찬 많네?"

"히마와리 덕분인줄 알아라."

"쳇. 날 위해서도 이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아."

"넌 개밥을 줘도 잘 먹을거잖아. 귀찮지 않아서 참 좋아."

"뭣?!"

 

사쿠라코가 씩씩대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주먹을 쥐고 젓가락 두개를 거의 포개다시피 쥐어서 반찬을 퍼올리는 것이 사쿠라코의 젓가락질이었다. 나데시코와 하나코가 매번 잔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아 포기한 부분이기도 했다. 히마와리는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똑같이 젓가락을 쥐었다. 하나코가 기겁을 하며 히마와리를 제지했다.

 

"언니 젓가락질 잘 못하는구나? 이렇게, 따라해봐."

 

올바른 젓가락질을 알려주자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의 젓가락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어느것이 옳은 것인가?

 

"솔직히 이렇게 해도 먹고 사는데엔 지장 없거든."

 

사쿠라코가 입안 가득 밥을 쑤셔넣고 웅얼거렸다. 히마와리는 고개를 굳게 끄덕이더니 사쿠라코의 방법대로 앞에 있는 어묵을 푹 찔렀다.

 

"그게 아니.... 으악!"

 

쩡, 소리가 났다. 식탁 위의 물컵이 쏟아질듯이 거세게 흔들렸다. 모두들 움츠러든 자세로 동작을 멈췄다. 히마와리가 젓가락에서 손을 떼니, 어묵을 담아둔 유리 그릇에 젓가락이 꼼짝없이 박힌 상태로 서있었다.

 

"세상에..."

"너 차력 하니?"

 

소란 속에서 사쿠라코는 책상 밑으로 조용히 손을 빼서 젓가락을 올바르게 잡았다. 앞으로 저렇게 잡으면 안되겠다...

히마와리는 얌전히 식사했다. 로봇이라 음식을 못먹는줄 알았는데, 니시가키는 대체 어떻게 이런 로봇을 만들었나 싶다. 게다가 처음 보는 것은 다 따라하도록 되어있는지, 저녁 식사를 다 마치고 나데시코와 하나코가 그릇을 가져다가 싱크대에 올려놓는 것을 보고는 똑같이 그릇 치우는 것을 도왔다. 나데시코가 설거지를 시작하자 옆에서 빤히 보고 있지를 않나, 하나코가 청소기를 돌리는걸 보고는 따라다니지를 않나, 신기해서 그러는건지 학습을 하는건지 히마와리는 내내 바빴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사쿠라코 뿐이었다.

 

"도움이 안돼요, 저거. 너도 좀 돕지?"

 

사쿠라코는 소파에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히마와리가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에 찬 목소리를 냈다.

 

"역시 주인님이라 다르시군요."

"어어 뭐, 그렇지."

 

소파 위에서 대충 대꾸하는 사쿠라코를 보며 나데시코와 하나코는 기가 찼다.

 

"주인님이라는 별명은 누가 정한거야?"

"히마와리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거든. 내가 강요한거 아니야. 그리고 별명이 아니라 호칭이라고."

"별명을 지어도 좀 그럴듯하게 지어, 히마와리. 쟤는 주인님이라는 별명보다는 베짱이라는 별명이 훨씬 나을걸."

 

잔소리가 이어지자 사쿠라코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에이 시끄러워. 히마와리, 올라가자."

 

종종 따라 올라가는 히마와리의 뒤에서 나데시코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뭔가 있어, 저것들.

 

 

 

 

 

 

 

 

 

 

"잠옷은 대충 이거 입으면 돼."

 

나데시코 옷장에서 훔쳐온 거지만. 사쿠라코가 던져준 파란색 잠옷을 보더니 히마와리가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당황한 사쿠라코가 셔츠를 당겨서 오므렸다.

 

"바보야! 좀 조신해져. 밖에서도 아무렇게나 벗고 다닐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이라는 호칭도 좋지만 앞으로는 그냥 사쿠라코라고 불러."

"네, 사쿠라코."

 

학습력은 참 빠르다.

 

"앞으로는 아무도 없을때에 옷을 갈아입어. 문도 잠그고. 알겠지?"

"네."

 

사쿠라코는 셔츠 안으로 살짝 보이는 속옷에 안심했다. 그래도 제대로 입긴 했네. 왜 이런거에 안심해야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난 뒤돌고 있을테니까 알아서 갈아입어."

 

아니야, 뒤로 돌아있는건 뭔가 이상하니 침대 위로 올라가는게 낫겠어.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잠복 모드에 들어갔다. 곧 심심해져서 아카리에게 문자라도 보내려고 휴대폰을 키려는데, 발 밑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난다.

 

"뭐야?"

 

밑을 내려다보니 히마와리가 얼굴부터 조금씩 들이밀고 있었다.

 

"으아아아! 뭐하는거야!"

 

사쿠라코가 머리카락을 세우며 이불을 발로 차서 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마와리는 속옷 차림으로 사쿠라코에게 바짝 다가와서 나데시코의 잠옷을 내밀었다.

 

"이건 어떻게 입는 건가요? 아까 셔츠는 단추를 풀면 되는거였는데 이건 단추가 없어요."

"아, 아니 그건, 그냥 머리를 집어 넣어!"

 

히마와리에게서 잠옷을 뺏어 들고는 대충 머리 구멍에 히마와리 얼굴을 쑤셔넣었다.

 

"읍읍!"

"팔 넣어 팔! 그래 거기!"

 

팔까지 넣어서 간신히 입혔다. 한번에 하나씩만 학습할 수 있는건가?

 

"사쿠라코, 얼굴이 빨개요."

"신경쓰지 마."

"얼굴이 빨개지면 아픈거라는 데이터가 입력되어 있어요. 어디 아픈가요?"

"아니, 오지 말고 바지 입어 바지!"

 

그런 데이터 말고 옷 입는 데이터나 좀 넣으라고 니시가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