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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Bang Dream

[히나사요리사]충치

  "충치가 꽤 깊게 있네요. 이 정도면 아플만 하죠."


  드득, 드득, 날카로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요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프진 않지만 꽤나 거슬리는 소리다. 아무래도 좀 더 일찍 치과엘 왔어야 했나. 언제 생겼나 싶었던 검은 자국이 깊게 자리잡을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양치를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충치가 생기다니. 지금까지 무언갈 게을리 해본 적이 없는 사요에게는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죄책감 같은 것이 가슴께에 덜컥, 걸렸다. 머리 바로 위에서는 하얀 조명이 사요의 입을 훤하게 비추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이런 성격은 아니지만 조금 호들갑을 보태보자면, 청문회라도 온 것 같다. 왜 치아 관리를 게을리 하셨나요? 아픈데도 치과에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명 하나에 의지한 채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목 뒤로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탓인지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아 목에 거미줄이라도 쳐진 듯 따끔하다.

  어금니 쪽을 작은 거울로 비춰보던 의사가 모든 도구를 놓고 한걸음 물러났다. 의자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사요는 누워있느라 어쩐지 아득했던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어금니 쪽에 충치가 생긴 거죠?"


  의사는 고개를 애매하게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안쪽에 사랑니가 있어요. 그게 썩으면서 같이 썩었네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어금니가 아프기에 그것만 썩은 줄 알았다. 집에서 거울로 봤을 때도 틀림없이 어금니만 썩어있었는데, 복병이 등장했다. 먼저 썩은 쪽은 어금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니였다. 사랑니가 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 아니, 애당초 내가 그렇게 둔한 사람이었나? 사요가 멍하게 있자, 의사가 마스크를 내리고 빙긋 웃었다.


  "사랑니는 바르게 나면 잘 못 느껴요. 약해서 잘 썩기도 하기 때문에 발치하는 경우도 잦고."

  "...그럼..."

  "사랑니를 발치하고 어금니를 치료하는 게 낫겠네요. 사랑니 상태가 좀 심각해요."


  당장 치료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시계를 보는 의사의 표정이 썩 상쾌하지 않았다. 그는 찍어둔 X-RAY 사진을 말없이 훑어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오늘 진료는 끝났으니까 내일로 예약해두시죠. 내일은 야간진료도 하니까 편한 시간대로 하세요. 사랑니 발치부터 할게요."

  "...네."


  밴드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 치과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다음날 오후 여섯시 쯤으로 예약을 잡아두고 치과를 털레털레 빠져나왔다. 충치가 앉은 쪽을 살포시 감싸보았다.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게, 혹시 발치가 겁이 나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사요는 길 한복판에서 피식 웃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것 따위 겁이 날리가 없다. 그리고는 어렴풋이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충치처럼 꼭 아프게 하는 녀석이 있다. 성가시기도 해서 늘 밀쳐냈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밀쳐낼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이 자리잡고 말았다. 재주도 좋다. 그렇게 쉴새없이 밀어내는데도, 길 한복판에서 그 얼굴을 떠올릴 만큼 어느새 그 아이에게서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뜻일 테다.

  삐삐,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 신호등 불이 파란 불로 바뀌었다. 전에 없던 조바심이 튀어나와, 사요는 오랜만에 뛰기 시작했다. 이가 욱신거리기에 턱을 부여잡았다. 오늘 같이 간단하게 쇼핑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집에서 쉬어야겠다.






  이에서 피가 나기 시작한 것은 몇 주 전이었다. 평소 깨끗이 해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양치질을 세게 하는 편이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조금만 살살 해볼까.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전조증상을 꾸준히 보이던 사랑니는 어느새 잇몸을 뚫고 나와 다른 이처럼 뻣뻣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입을 조금 더 벌리고 거울에 비춰진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제까지는 보이지 않던 시커멓고 작은 무언가가 보였다. 원인은 너구나. 그대로 다시 입을 닫았다. 진통제를 먹어서 그런지 많이 아프지는 않지만 다음날까지 이렇게 버텨야한다는 게 조금 답답하다. 빨리 뽑아버리고 싶은데.


  "언니~ 아직도 씻어?"


  히나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사요는 입을 한번 헹구고는 문 손잡이를 비틀어 당겼다. 바로 앞에 자신과 똑닮은 얼굴이 보인다. 히나는 빙긋 웃다가 이내 걱정스러운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입술을 삐죽였다.


  "많이 아파?"

  "....아니."

  "사랑니 뽑는 거 많이 아프다던데."

  "걱정해주는 거야, 겁주는 거야?"


  곁을 슥 지나쳤다. 그러다가도, 화장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나지 않기에 몸을 돌려 다시 히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이를 갉아먹고 있는 충치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히나마저도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최근 그랬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로 히나와 있는 시간이 잦아졌다. 영화관에 가기도 했고, 같이 빵을 먹기도 했고, 똑같은 물건을 사서 나눠가지기도 했다. 왜 그렇게 되었냐고 한다면, 사요는 괜히 먼 산을 바라보면서 어쨌든 제 동생이니까요,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멀거니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히나도 한 명의 사람이고, 가족이며,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언니, 나 이제 힘들어. 언젠가 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화내지 않았다. 그저 그 한마디만 간신히 내뱉고는 눈에서 터져 흘러나오는 눈물도 닦아내지 않았다. 조용히 울면서,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는 히나는, 이제 그 이상 대화를 하지 않으면 제 풀에 지쳐서 떠나갈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느껴지자 말보다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히나의 눈물에 손이 뜨거워졌다. 사요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붙잡았다. 히나의 소매를 꾹 붙잡고, 새삼스럽게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며 사요는 되뇌었다. 이제야 비로소 언니가 되겠다고.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터진 이후에서야 비로소. 그런 다짐을 했다.


  "할 말 있어?"


  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히나는 다정했다. 이후로 사요의 마음을 더이상 파고드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오롯이 사요에게 맡겼다. 함께 한다는 게 어색해지지 않도록,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히나는 사요의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걸었다. 사요와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눠온 것처럼, 사요와 모든 것을 공유한 것처럼, 누구보다도 사요를 잘 아는 것처럼, 히나는 그랬다.

  사요는 잠시 과거에서 깨어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쉬어."

  "응~!"

  "...저기, 히나."


  그렇게 자꾸 네가 손을 잡아오니까. 네가 팔장을 껴오니까. 네가 웃어주니까. 사요 역시 이전부터 히나와 이런 관계였던 것처럼 어느새 포근해졌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해도 히나는 새삼스럽다며 비웃지 않을 거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따가... 내 방으로 올래? 같이 자자."


  충치로 홀로 이 밤을 앓고 싶지 않아서. 사요는 속으로 솔직하지 않은 답을 내리며 히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히나는 예상했던 대로 세상에서 제일 기뻐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갈게! 먼저 가 있어~"


  화장실 문이 닫혔다. 사요는 걸음소리를 죽여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올라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방을 쭉 둘러보다가 문득 일어나 책상 앞에 섰다. 책상과 그 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유리 사이에는 영화표 두개가 꽂혀있다. 그러고보니 아직 감사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히나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그 사람 덕이 크다. 이 영화표만 해도 그랬다.






  히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자면 두 가지 공통점이 필요했다. 첫째, 히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그리고 둘째,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은 단 한명이었다. 히나와 같은 반이자, 같은 밴드의 멤버. 잘 한 선택일까, 발을 구르며 초조하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사요 앞에, 이내 선도부로서의 신경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나타났다. 갈색의 웨이브 머리카락. 그렇게 진하지는 않지만, 향수 냄새도 조금 나고. 테이블을 짚는 손가락은 베이스를 많이 연습한 탓에 상처가 군데군데 났지만 짧게 깎은 손톱 위에는 아직 매니큐어의 잔재가 조금 남아있다. 아무래도 완전히 포기하진 못하고 가끔 바르다가 지우는 듯 하다.


  "미안, 사요~ 오래 기다렸어?"


  그 목소리에 사요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마이 씨."


  그렇게 내뱉고 나서 조금 흠칫했다. 본인이 낸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떨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리사도 이내 그걸 눈치챘는지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 있었구나?"


  아직 아무말도 안했는데. 등을 따뜻하게 토닥여주는 듯한 목소리에 사요는 고개를 푹 숙였다. 리사에게 그 흔한 안부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 사요는 서투르게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히나의 눈물과, 소리없는 원망과, 자책. 비로소 다짐한 것들. 그 모든 것을 들으며 리사는 '응'이나 '그래서?'라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사요의 입술에 집중할 뿐이었다. 사요는 자신의 이야기가 잘 되어가고 있는지조차 어렴풋해져 어물쩍 상황 설명을 종료했다.


  "이마이 씨가 보기에도, 그동안의 저는 나쁜 언니였던 거죠?"


  리사는 그저 웃었다. 히나는 학교에서 사요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었다. 매우 즐겁게 이야기하다가도 금방 조금 침울해하는 경우도 잦아서 리사로 하여금 사요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요는 히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단지 언니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크고 깊은 무언가가 있는 듯 했다. 히나는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그만큼 밝고 말이 많은 아이였지만 그것만큼은 쉽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사요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사요에게 어떤 감정인지. 사요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그렇기에 이렇게 사요가 먼저 상담을 요청해온 것은, 리사에게는 큰 기회였다. 리사의 입장에서는 사요를 통해 히나를 움직이게 하는 게 훨씬 빨라보였다. 아무리 히나로부터 시작된 일이라고 해도.


  "나빴다-기보다는~ 동생을 잘 모르는 언니였지?"

  "...그게 나쁜 거 아닌가요?"

  "좀 다르지 않을까? 모르는 거랑 나쁜 거는 다르다고 생각해. 그런 말도 있잖아? 모르는 게 죄는 아니라고."


  알아가면 되는 거니까. 리사가 빙긋 웃자, 사요는 그렇게 근거가 느껴지지 않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사요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게 보이자 리사도 훨씬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내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글쎄요... 일단 히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긴 했는데..."

  "이야기를 들은 이상,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더니 리사가 '아!'하면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가방에서 영수증 같은 종이 두 장이 나왔다. 리사는 그 종이를 사요에게 내밀었다.


  "원래 친구랑 보려고 했던 건데, 친구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고 해서... 괜찮으면 사요가 쓸래?"


  영화티켓 두 장. 지금까지 영화를 보는 걸 그렇게 즐기지는 않던 사요로서는, 티켓을 건내받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이 티켓을 받으면 이제 지금까지 없었던 일을 만들어가야 한다. 히나와 영화를 보고, 히나가 원하는 것을 가끔 들어주고, 웃어주기도 해야겠지. 왠지 이 일은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기도 했다. 이게 시작일 텐데, 잘 해낼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는 사요의 손에, 리사가 직접 티켓을 쥐여주었다. 손 위에 따뜻하게 포갠 리사의 손은 단단했다.


  "좋은 소식 있으면 꼭 들려주기? 앞으로도 종종 이야기 들어줄 테니까 부담갖지 말구. 응?"


  이제 빼려고 해도 뺄 수 없게 되었다. 사요는 무어라고 말하려다가 다시 떨린 목소리가 나올까,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긴장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아 목구멍이 따끔하다.


  "티켓 값은 조만간 꼭 갚을 게요."


  리사는 씨익 웃었다.


  "나는 사이좋은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값은 그걸로 치면 안 될까?"


  가끔은 히나 만큼이나 이 사람도 종잡을 수가 없다. 사요는 무심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후로 리사는 마치 소재를 던져주듯이 사요에게 무언가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행사해서 잔뜩 샀다며 빵을 주기도 했고, 커플 아이템을 제안하면서 나중에 로제리아끼리도 이런 걸 하면 좋겠다는 둥. 사요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리사가 이렇게 친절하고 편한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일은 시작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사요는 답례로 리사가 던져주는 소재에 대한 결과를 꼭 들려주었다. 히나가 좋아했어요. 히나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어요. 어쩌면, 제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히나는 꽤 잘 웃는 아이더군요. 예전에는 마냥 속편해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리사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턱을 괴고 빙긋 웃었다.


  "사요는 요즘 히나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빛나."


  멍하게 리사를 바라보았다. 또, 마른침이 목 뒤로 넘어갔으나,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고 그저 따끔하기만 했다.


  "그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으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조금 어색해지려고 했다.

  어째서?





  영화 제목은 '푸른바다'. 제목답게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푸른바다가 배경인 영화였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 전형적인 멜로 영화였는데, 슬픈 사연을 가진 커플이라 보는 내내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암에 걸린 남자와,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는 여자. 남자는 치료에 진척이 없자 결국 치료를 거부하게 되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위해 몸에 좋다는 모든 것들을 갖다 바쳤다. 사요는 영화의 내용과 사람들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모든 것들은 죽어가는 것들이다.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종착역은 모두 죽음이다. 그런데 굳이 죽음을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고, 그걸로 감동적이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는 것 아닐까.

  사요는 그 두 사람의 사연과 훌쩍이는 극장 내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옆에 앉아있는 히나를 보아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며 팝콘 쪽으로 손을 뻗었다. 팝콘이 만져져야 할텐데, 만져지는 것은 가녀린 손가락이었다. 움찔하면서 손을 빼려고 하자 가녀린 손가락이 사요의 손가락을 붙잡더니 얽혀들었다. 사요는 팔이 굳어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히나."


  고개를 옆으로 돌려 조용히 부르자, 히나는 그제서야 사요를 돌아보며 웃었다.


  "참 슬프다. 그치?"


  여자는 결국 남자를 붙잡지 못했다. 병원에서 하얀 천이 남자의 머리 끝까지 덮이고, 차마 그런 남자를 볼 생각조차 못하고 창 밖을 바라보며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마법 같이, 그때까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던 히나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난 언니가 저렇게 아프면... 못 견딜 거야."


  팝콘이 바스락거리며 부딪혔다. 손이 더 얽혀들었다. 잔잔한 피아노 배경음악이 귓가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히나의 눈망울에서 천천히 치던 파도가 사요 쪽으로 밀려왔다. 히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나도. 네가 아프면...

  하얀 천 안에 짧고도 길었던 우리의 추억이 묻히는 날이 온다면. 우리의 탄생과, 죽음과, 살아생전 느꼈던 모든 아쉬움, 짜증, 슬픔, 웃음을 마무리하는 순간이 온다면. 모든 것이 끝나서, 차라리 밀어낼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날이 온다면.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영화관의 다른 사람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히나와 맞잡은 손이 너무나도 생소해서, 자신의 마음에서 피어나오는 감정은 생소할 틈이 없었다. 그 순간, 사요는 설렁설렁 보고 있던 영화의 모든 내용을 이해했다. 히나와 손을 잡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힘껏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이상한 감정이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히나와의 첫 데이트는 그렇게 찝찝한 잔상을 남겼다. 그러나 잠깐 눈에 담았던 히나의 눈망울만큼은 바다보다 푸르렀다. 기억에 남은 것은 그것 뿐이었다.






  유키나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는, 마이크에서 입을 떼었다.


  "수고했어."


  연습이 끝나고, 사요는 빠르게 짐을 싸서 기타를 등에 멨다. 치과 예약 시간이 곧이다. 마무리 정리를 하느라 분주해진 연습실 안에서, 사요의 눈 안에 문득 리사가 들어왔다. 리사는 아코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이쪽과 눈이 마주쳤다. 리사가 다가오자 사요는 어쩐지 몸에 힘이 들어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감사인사. 제대로 해야 한다. 그 생각만 머릿속에 꽉 들어찼다.


  "이마이 씨.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리사가 사요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웃었다.


  "음? 뭔가 마지막 인사 같은데?"

  "아... 아뇨... 그동안 감사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히나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두 사람이 잘 됐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겠어? 나도 꽤 즐거웠고~"


  리사의 손이 가볍게 사요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다시, 목구멍이 따끔해져 잠시 목을 움켜쥐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순간이었는데. 연습실 문은 그 사이에 리사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발걸음이 참 빠르다. 사요는 좀 더 말하지 못한 게 아쉬워 낮게 한숨을 쉬다가 턱이 욱신거려 바짝 정신을 부여잡았다. 빨리 치료를 끝내야 더이상 아프지 않을 텐데. 아픈 것도 참 힘들다.


  "사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이번에는 유키나가 사요를 붙잡았다. 사요는 턱을 쥔 채로 유키나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조금 안 좋아보인다. 아니, 지금 치통 때문에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오늘 연습도 완벽하게 됐고, 얼굴을 찌푸릴 일이 없을 텐데. 사요는 어서 유키나가 말을 끝내기를 바라며 조금 기다렸다.


  "저번에. 영화 잘 봤어?"

  "네? ...네. 덕분에."

  "리사 덕분이겠지. 그 말은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니잖아?"

  "...그렇네요."


  착각이... 아닌가. 치통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 가운데, 사요는 유키나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키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이는, 많이 아픈 거야?"

  "조금...요."

  "그럼 다행이네. 조금 아파도 참아. 얼른 끝낼 테니까."


  뭐가 다행이라는 거고, 뭘 끝낸다는 걸까. 턱을 감싸쥐고 있는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유키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영화 티켓. 리사가 왜 줬을 거라고 생각해?"


  슬슬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한다. 유키나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사요는 치통을 물려보려 애를 쓰면서 열심히 미간에 힘을 주었다.


  "왜... 줬다뇨?"

  "리사가 왜 너한테 친절하게 세일하는 빵가게를 알려줬을 것 같아?"

  "...네?"

  "리사가 왜, 커플 아이템으로 열쇠고리를 추천했을까?"

  "저기... 미나토 씨. 제가 치과 예약이..."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리사가 왜, 리사가 왜, 리사가 왜. 그러게요. 이마이 씨가 왜? 슬슬 이쪽에서도 화가 치민다. 치통도 점점 가라앉기에 사요는 몸을 빳빳하게 펴고 유키나를 마주했다. 뒤 쪽에서는 린코와 아코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감히 말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고만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요?"

  "리사는. 너와 네 동생이 사이가 좋아지길 바랐어."

  "네, 알고 있습니다. 자주 도와주시기도 했고, 저도 감사하고 있어요."

  "리사는... 그것 때문에 많은 걸 너에게 양보했어."

  "...안그래도 어떻게 해야 그간 것들을 모두 갚을 수 있을지 생각하는 중이에요."


  유키나는 방금 전까지 잔뜩 화가 나있던 표정을 조금씩 풀고 있었다. 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우 조금씩, 말도 느려지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리사의 이야기는 한 번이라도 들어준 적 있어?"


  늘, 익숙한 것은 무서운 것이다. 리사는 공기처럼 스며드는 재주가 있어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곁에서 웃어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고보니 모두 리사였다. 영화관 티켓을 준 것도, 빵을 준 것도, 커플 아이템을 추천한 것도, 주변 사람의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리사의 배려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야기 한 번쯤은 들어준 적 있겠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동안 자신이 리사에게 무언가를 궁금해하거나 리사의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없었다. 히나는요. 히나가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는 리사의 얼굴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 방 맞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요에게 유키나는 그것 보라는 한숨과 함께 연습실을 나가버렸다.

  커다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문득 리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요는 요즘 히나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빛나. 그 말에 목구멍에 따끔하게 무언가가 걸렸던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말을 할 때 리사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히나 이야기를 했던 그 날, 히나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빛난다던 리사의 말은, 그제서야 사요의 심장을 잡고 진득하게 늘어져 숨쉬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리사의 말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워졌다. 티켓은 정말 친구랑 보려고 했던 걸까. 빵 가게는, 우연히 들렸던 걸까. 로제리아와 함께 맞추고 싶다던 커플 아이템은? 둔하다, 히카와 사요, 정말 둔해. 이제보니 충치가 날만했다. 이렇게 둔한 사람이라면 얼씨구나 좋다하고 충치가 들어앉기에 딱이었을 테니까.

  사요는 무거운 문을 힘차게 열고 밖으로 뛰었다. 뒤에서 기타 케이스가 흘러내리고 발이 땅에 부딫힐 때마다 치통이 몰려왔지만 고개를 휘휘 저어 물리쳤다. 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만 지루하게 갈 뿐, 반대편에서 그토록 듣고 싶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요?"


  이윽고 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나, 해서 힘차게 '이마이 씨!'를 외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소리는 휴대폰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루한 통화음은 계속되고 있었고, 바로 앞에서 베이스를 멘 리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급한 일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숨을 헐떡이고..."

  "이마이 씨."


  치과에서 진료받던 날처럼 줄곧, 리사를 마주할 때마다 목이 아파왔다. 히나가 가슴 한켠을 죄어오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히나가 그렇게 죄어오는 것과, 리사의 목소리에 목이 아픈 것은 비슷한 종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뒤늦게 해본다. 밴드 연습을 할 때도, 수업을 들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치과의 의자에 누운 채로 히나와 리사를 번갈아가면서 진단받았던 것이다. 어금니가 썩은 줄 알았는데 사랑니가 있었네요. 사랑니가 어금니 쪽으로 충치를 옮겼어요.

  먼저 옥죄었던 것은, 히나가 아니었던 걸까.


  "저랑 영화 봐요. 푸른바다."


  사요는 아직 뽑지 않은 사랑니를 더 이상 꽉 쥐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히나와 영화관에서 꼭 잡았던 손을 기억에 두고서, 리사에게 손을 뻗었다. 사랑니는 바르게 나면 잘 못 느껴요. 자주 썩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의사가 뱉은 말을 다시금 귀에 꾹꾹 눌러담았다. 다시 목 너머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번엔 가슴 한 켠의 욱신거림도 함께.

  순간적으로, 사요를 바라보고 있는 리사의 눈빛이 푸르게 일렁였다. 히나의 눈빛만큼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리고는 싱긋 웃었다. 마치 그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듯이, 자신의 감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이, 무언가를 밀어내고 부정하는 듯한 마냥 상쾌한 웃음이었다.


  "좋아!"


  사요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은, 늘... 그렇게.


  버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몇 차례 더 오가고, 신호등 불빛은 몇 번이나 색을 바꾸었다. 앓던 이를 뽑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