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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돌이켜 보면 참 따뜻했던 순간이었다, 싶다.
무슨 느낌이었는지도 모를, 서로의 숨만 간간히 주고받았을 뿐인 첫키스를 마치고 사요는 부드럽게 리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리사는 왠지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살짝 시선만 떨어뜨렸다. 너무 추우니까, 차만 마시고 가겠다며. 그렇게 들어간 집에서 별안간 사요가 리사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첫키스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스쳐지나갔지만, 여운만은 깊게 남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눈빛이..."
사요가 천천히 입을 열자, 리사는 한순간 시야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혹시, 생각보다 첫키스가 별로였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장소가 집이라는 게 조금 김이 빠졌을까. 눈빛이, 라고 입을 떼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사의 머릿속에는 눈빛 이외의 다른 것들이 휘젓고 다녔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사요는 리사의 얼굴을 감싸 들어올렸다. 비로소 눈이 맞았다.
"눈빛이 달라졌네요, 이마이 씨."
"...응?"
"평소 같지가 않아요. 뭐랄까..."
그러면서 다시 얼굴이, 가까워졌다.
"예쁘네요."
다시금 무슨 느낌인지 모를 것들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리사는 저도 모르게 사요의 목을 그러안고, 눈을 감았다. 한참을 이어지는 시간에 문득 눈을 떠보니 사요도 눈을 감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코 앞까지 다가와 있고, 긴장이 조금씩 풀리자 무언가을 꾹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한 숨소리도 들렸다. 리사는 왠지 그 순간을 두고두고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처음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벅찬 느낌은 다시는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치 무언가를 예견하고 있는 것마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물 한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느새 감정에 숨을 빼앗겨버렸다. 갑자기 급하게 흐느끼기 시작하는 리사를, 사요는 놀라며 바짝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숨 막혔어요? 제가 너무 밀어붙였죠? 상냥하게 어르는 목소리에 리사는 감히 고개를 가로저을 수가 없었다. 감동해서 그런 걸까, 아니, 감동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그저 품에 안겨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사요는 오래도록 리사를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서럽게 울고 있는 연인의 모습에 제 눈에서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을 억지로 참으면서.
어느새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서로를 감아올렸던 숨결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게 가슴속에 퍼졌다.
그렇게 따뜻했던 순간이 있었다.
***
알람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리는 동안, 리사는 꿈 속에서조차 알람을 끄고 있었다. 비로소 현실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을 때, 입에서는 절로 '끙' 소리가 나며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왔다. 어디에선가 알람음이 들려오기는 하는데 전날 휴대폰을 어디에 뒀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벽에 걸려있는 수많은 옷들을 뒤적였는데도 휴대폰은 없다. 어디 바닥에 떨어졌나, 살펴보았는데도 없다. 아, 곤란한데. 한 손으로는 허리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얼굴을 쓸어내리는 동안 알람음은 그만 끊겨버렸다. 찾긴 찾아야하는데 지독한 숨바꼭질이라도 하려는 건지, 기억에도 없는 휴대폰을 찾을 바에는 차라리 뒤틀린 속을 재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털레털레 거실로 향했다.
평소에 먹으면 입가가 조금 홧홧할 정도로 매운 컵라면을 꺼내들고는 물을 끓였다. 천천히 스프를 넣고 물을 붓는 동안에도 허리를 짚은 손은 꼼짝을 않았다. 시선을 내리다가 문득 제 허리를 꽉 잡고 있는 손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전날에 술을 진탕 먹고 어디에 부딫히기라도 한 건지. 간만에 로제리아 멤버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으니 즐거운 마음이 우선이었겠지 싶으면서도, 조금 더 조심할 걸 그랬다.
컵라면이 익는 3분 동안 아이들한테 잘 들어갔나 연락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휴대폰이 없으니 그럴 수조차 없다. 어느새 다 익은 면을 풀고 한 입 먹으려 젓가락을 들어올렸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꼭 찾고 말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잠시 허리가 아픈 것도 잊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아, 가끔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멀리 떨어져서 넓게 보는 것도 방법인 것을. 리사는 베개 바로 옆에서 반짝이고 있는 휴대폰 화면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여보세요? 유키나? 마침 잘 됐다, 전화하려고 했는데. 애들은 잘 들어갔어?"
건너편에서 유키나가 이름을 부르려했던 듯, '리-'하더니, 이름을 채 다 부르지 못하고 목소리가 끊겼다. 전화가 끊긴건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니 아직 통화중이다.
"유키나? 여보세요?"
"....리사. 내 말 잘 들어."
어제 유키나도 술 참 많이 마셨나보다. 목소리가 많이 잠겼네. 쿡쿡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응, 뭔데? 무슨 일 있어?"
"조만간... 사요한테서 전화가 갈 거야."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름이 들려왔다. 꿈인가, 싶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진다. 리사의 손 안에 조금 두꺼운 이불이 가득 일그러졌다. 꾹 쥐고 있는 주먹에서 심장 소리가 느껴질 만큼 순식간에 흥분해버렸다. 아니, 진정하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었다.
"...사요가? 나한테?"
"사요한테서 전화가 오면 받지 마. 절대."
"유키나...?"
"널 위한 일이야, 리사. 그거 전해주려고 전화했어."
"...아하하, 갑자기... 공포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네?"
유키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뭔가를 더 묻기가 참 애매하겠다. 리사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유키나는 사요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는 리사의 다짐을 세번이나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좀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유키나가 나서서 이러는 건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려니 생각하면서도 정말 섬뜩한 일이라도 일어나려는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요는 전날 로제리아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단체 메신저 방에서 그 이름을 보는 게 많이 힘겨웠던 리사는, 차라리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요의 대답이 고마웠다. 하긴, 둘 중 한명은 알아서 피해줘야 나머지 애들도 눈치 안보고 편하게 있을 수 있겠지. 이번엔 사요가 양보했으니까 다음에는 내가 양보해야겠다. 그런 마음 뿐이었다. 그런데 전날 모임에 나오지 않은 사요가 뜬금없이 개인적으로 연락할 일이 뭐가 있을까?
"...아, 라면!"
갑자기 급하게 뒤집히기 시작하는 속을 쓰다듬으며 곧장 식탁 앞에 앉았다. 퉁퉁 불은 면으로 간신히 속을 달래고, 욕실에 들어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술냄새를 싹 지우고 나서야 한결 나아졌다. 침대에 다시 몸을 뉘이며 아코의 번호를 찾아냈다. 어제는 잘 들어갔냐고, 속은 좀 괜찮냐고 물으며 전날 있었던 일을 하나둘씩 꺼냈다. 다행히 아코는 전날 많이 마시지 않아서 그런지 유키나보다 많이 밝은 목소리였다.
"리사 언니, 허리는 괜찮아? 어제 갑자기 벌떡 일어나다가 모서리에 허리 찧었잖아."
"...아, 그랬나? 어쩐지, 허리가 아프더라..."
"허리 조심해~ 아, 그리고..."
아코가 잠시 마른 침을 삼키기에 리사는 다 마른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다시 목소리가 들리길 기다렸다. 오늘따라 다들 나한테 할 말이 많은가보네, 아코는 무슨 말을 하려나?
"사요 씨한테서 전화 오면 받지 말구. 알겠지?"
아코도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이젠 등골이 오싹해지다 못해 머리카락까지 곤두서는 느낌이다. 이후 린코에게도 안부차 전화를 했을 때, 린코의 마지막 당부도 똑같았다.
"히카와 씨.. 전화는, 받지 마세요..."
"린코까지? 정말~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자꾸 그러니까 오히려 전화 더 받고 싶어지잖아."
결국 린코에게서도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하고, 사요에게 전화가 오면 받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번 더 해야 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고요한 정적이 나도는 방 안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사요한테 확 전화해서 무슨 일인지 먼저 물어볼까? 그러기엔 아이들의 행동이 너무 일관적이고 단호해서 무섭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리사는 결국 먼저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아이들이 당부하는 건 '오는 전화를 받지 말라'이지, '전화를 하지 말라'는 아니니까. 딱히 약속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만큼 시간이 지났으면 이제 사요에게도 예전 감정은 모두 사라졌을 테다. 휴대폰 화면을 다시 마주하고, 외우고 있던 예전 번호를 누르려다가 깜짝 놀라며 전부 지웠다. 몇 년이 지나도 습관이란 참 무섭다. 전화번호 바꾼 지 꽤 됐는데. 침착하게 화면을 내리자 수많은 '사'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간신히 이름을 찾고는 버튼을 누르려고 하기 직전, 알람음만큼 시끄러운 착신음이 울려퍼지며 순식간에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이름만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히카와 사요. 착신음에 너무 놀라서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아, 전화 받지 않기로 했는데. 뒤늦게 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천천히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벌써부터 유키나의 잔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리는 것 같다.
"...아하하, 안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첫 마디를 떼고서는 자연스럽게 침묵이 돌았다. 리사는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천천히 웃음을 지웠다. 건너편에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대체, 다들 오늘따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슬슬 걱정이 된다.
"오랜만이에요, 이마이 씨."
잠시 후에 들려온 목소리에 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던 손가락은 어느새 차렷 자세가 되었다.
"으, 으응, 오랜만~ 잘 지냈어?"
"저야 뭐... 이마이 씨는요?"
"나는 잘 지내~ 어제는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모임에 나오지도 않고..."
당연히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리사는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었다. 사요는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돌연 한숨을 쉬었다.
"만날래요?"
하마터면 크게 되물을 뻔했다. 뜻밖의 말에 튕기듯이 일어나려다가 그만 허리에 무리가 가버렸다. 끙,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 리사의 목소리에는 아랑곳 않고, 사요는 꿋꿋히 말을 이어갔다.
"보고 싶어요."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헤어질 당시에는 그렇게 미운 마음 뿐이었는데, 아직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그 날의 향기가 멤도는 듯이 순식간에 감정에 빠져버린다. 리사는 홀린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전화 통화라 행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서야 새삼스럽게 알아차리고는 휴대폰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어, 어디에서 만날까?"
만나기로 한 카페에 앉아서는, 계속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평소대로라면 유키나에게 전화해서 방금 있던 상황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을 텐데. 유키나, 내가 보고 싶대. 사요가, 내가 보고 싶대. 이건 무슨 의미일까? 혹시, 아주 만약에 말이야. 보고 싶다는 말에 다른 의미가 있으면 어떡하지? 소꿉친구가 이렇게 보고 싶어지는 순간도 없겠다. 리사는 조용히 얼굴을 감싸쥐었다.
옷을 신경쓰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음에도 여유롭게 약속 장소에 도착해, 사요가 없는 동안은 계속 초조하게 커피만 마셨다. 그렇게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던 사요였는데.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날 때까지 머리카락조차 비추지 않고 있었다. 장소를 착각했나, 다시 연락해보려다가도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질까봐 관두었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은 어지럽게 얽히며 한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앉기를 반복했다. 리사만 우두커니 한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마냥.
사요는 20분이나 지각했다. 허겁지겁 차가운 기운이 다닥다닥 붙은 코트를 휘날리며 리사 앞에 앉았다. 작은 가방이 그 옆에 놓였다.
"아, 미안해요. 차가 너무 막혀서... 많이 기다렸어요?"
달려오기라도 했는지 얼굴이 많이 빨개져있었다.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급하게 지웠다. 그리고는 새삼스럽게 그 얼굴을 훑어보았다. 예전에 비해 훨씬 어른스러워졌다. 헤어지고 나서 3년 만인가... 세월이 참 많이 지나갔음을 실감한다.
"이마이 씨?"
"...응? 아,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긴장한 나머지 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버렸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니 사요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져있었다. 리사도 조금 웃었다.
"오늘 예쁘게 하고 나왔네요.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요?"
"그래보여?"
일부러 자세히 대꾸하진 않고 넘겼다. 그저 조마조마한 감정을 꾹꾹 숨길 뿐이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에 휴대폰을 못찾았던 일을 이야기해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조금 오두방정을 떨게 될 것 같아 그저 숨을 삼켰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사요는 진동벨이 울리자 자신의 음료를 받아 다시 리사 앞에 앉았다. 리사는 일단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흔하게 통하는 대화 상식을 밀어붙여보기로 했다.
"사요, 많이 예뻐졌다. 역시 꾸미니까 사요도 많이 변하네?"
"저보다도 이마이 씨가 훨씬 예쁜 걸요. 저는 원체 그런 거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래도, 보기 좋아보여. 잘 지냈구나?"
대화가 꽤 물 흐르듯이 원만하게 흘러가는 듯 하다. 리사는 조금 안심하면서 긴장했던 몸을 풀고 소파에 깊게 기댔다. 사요 역시 딱히 긴장하고 있지는 않아보인다. 조금 아쉽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이제 별 감정이 들지 않는 걸까. 보고 싶다는 말은 그저 말 뿐이었을까.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
"이마이 씨도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말 뿐이었을 거라는 한탄이 무색하게, 다시 불쑥 튀어나온 보고 싶었다는 말. 멍하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요는 아무렇지 않은 듯 빙긋 웃기만 했다. 아직도 그 웃음이 너무나도 따스하기만 하다. 리사는 조금 몸을 움츠렸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러고보니 처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사요, 뺨은..."
무심코 과거에 젖어 불쑥 꺼내버린 말에, 리사는 당황하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요는 무슨 말인가 싶어 잠시 입술을 가리고 있는 손등을 바라보다가 이내 "아"하면서 픽 웃었다.
"옛날 일인 걸요. 그게 이마이 씨 탓도 아니고."
"...내 탓이잖아. 순순히 엄마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괜찮아요. 이마이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예요."
사요의 말 끝에 한숨이 약하게 걸쳐졌다. 리사는 손을 내려 커피를 쥐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가 헤어진 것도 딱히... 서로가 싫어졌다거나,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거나 해서 그런 게 아니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더더욱 그 일에 대해 미안해. 다시 사과할게."
"다시 말할게요."
사요가 리사 쪽을 몸을 기울였다. 앞으로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아까보다 아주 조금 가까워진 거리에 숨이 막힌다.
"이마이 씨 잘못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사요."
"그리고 지금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괜찮아요. 정말로."
리사가 간신히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자, 비로소 사요의 몸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사요가 음료를 마실 동안 문득 첫키스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만나자마자 이런 생각은 조금 곤란하려나, 싶으면서도 그때 흘렸던 눈물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어쩌면, 당장의 행복과 설렘이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지도 모른다는 감정이 앞선 것은 아니었을까. 0.1초, 그 아주 잠깐의 감정이 미래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사요, 눈빛이 많이 달라졌어."
사요가 천천히 음료를 내려놓았다.
"뭐랄까... 반짝반짝 빛나."
"눈은 원래 빛을 만나면 빛나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딱딱한 건 여전하네."
어느새 커피를 다 마셨다. 빈 잔을 한쪽으로 치우자 옛 연인의 얼굴이 더욱 생생하게 보인다. 사요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그 시선에 응하기만 했다. 그러다 턱을 괴고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마이 씨는, 그 날 이후에 만나는 사람 있나요?"
"...없어."
"그렇군요."
줄곧 다시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랬다. 그동안 고백해 온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연애라는 게 그렇게 끌리지가 않았다. 그 모든 거절들은 단 0.1초만에 이루어졌다. 0.1초. 혹시, 그것도 미래를 불러올 순간의 예견 같은 건 아니었을까. 너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미래를 불러온 거라면?
이 자리에서 그 미래를 붙잡을 수 있다면?
"사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헤어진 건 우리 탓이 아니잖아?"
"네."
"과거를 붙잡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든다면..."
사요의 눈썹이 꿈틀댔다. 리사는 벌벌 떨리는 입술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
"다시... 시작할래?"
착각일까. 사요의 눈망울에 잠시 혜성이라도 스쳐 지나간 듯이 그 눈빛이 일렁였다. 리사는 이제 커피 대신에 자신의 두 손을 꽉 맞잡은 채로 사요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요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숨결에서 많이 떨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마이 씨. 오늘 제가 만나자고 한 이유는..."
사요의 손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작은 가방 안을 뒤적였다. 0.1초. 리사는 급하게 사요의 팔을 잡았다.
"사요, 잠깐....!"
그러나 사요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리사의 손을 잡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하려던 행동을 마저 마무리지었다. 하얀색 봉투가 리사의 앞에 놓여졌다.
"....보고 싶다고 하면... 이렇게 나와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참 예쁜 하얀색 봉투인데. 짙은 검은색보다도 훨씬 우중충하고 가엾어보인다. 리사는 차마 그 봉투를 받아들지도 못하고 눈을 들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그저 주변에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시끄럽고, 들리는 음악이 성가시고, 또, 앞에 앉아있는 얼굴이 원망스러울 뿐.
"이마이 씨가 이런 마음이었다면 불러내지 않았을 거예요."
"...거짓말."
"이마이 씨."
"사요도 사실은, 은근히 그 날 일을 내 탓으로 돌리고 있었구나?"
소파가 무겁게 끌렸다. 리사는 일어서서 봉투를 집어들었다. 벌벌 떨리는 두 손이 봉투의 중앙을 잡았다가, 힘을 주어 그어 내릴 듯이 꾹 쥐었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못한 채 작은 가방 안에 던지듯이 집어넣었다.
"미안하지만 난 안가. 행복하게 살아."
아이들의 말이 맞았다. 전화를 받지 말걸 그랬다. 리사는 빠르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성큼성큼 밖으로 향하는 리사의 발걸음을 붙잡아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리고 벌어진 옷틈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추위를 탈 기운은 물론이고 택시를 잡을 여력도, 버스를 기다릴 여유도 없어져버렸다. 그저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애꿎은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우스꽝스럽게 목소리가 나가버린, 이제는 반갑지 않은 소꿉친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키나...!"
"리사?"
"왜.... 왜 말 안했어? 왜...."
"....리사, 지금 어디야?"
"왜 말 안했냐고! 왜! 왜 전화 받지 말라고만 말하고! 왜 사요가 결혼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리사...!"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전화를 받을 일은 없었잖아!"
방금 전에 있던 카페에서 나온 사람들이, 방금 전에 있던 카페에서 흘러나왔던 음악이, 방금 전에 있던 카페에서 보았던 마지막 사랑의 얼굴이 길가에 가득 흘러넘쳤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유모를 여자의 외침에 그저 흘끗거리며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사는 계속 감정을 토해냈다. 주저 앉아서 발 끝에 있는 감정마저도,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어 모조리 토해냈다.
유키나의 걱정 섞인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툭 전화를 끊고서는, 다시 일어나 다 지워진 화장을 뭉갰다. 자고 싶어졌다. 갑자기. 아직 정리조차 하지 못한 침대 위가 너무나도 그립다. 방금 전까지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처럼. 그저 피곤해졌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미 그 눈빛도, 꾸민 모습도, 말투도 전부 예전의 사요가 아니었는걸.
발이 땅에 붙은 듯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야 한다. 가자. 집으로 가자. 돌아가자.
***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사요의 뺨에 손지검이 들어서고 나서야 상황은 멈추었다. 사요의 뺨에 무심코 손을 댔던 리사의 어머니는 어느새 황량히 사라지고 없었다. 리사는 아직도 고개가 돌아간 채로 굳어있는 사요를 향해 손을 뻗어보았으나, 차마 괜찮냐는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을 떨구었다.
"...이마이 씨.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뺨은 너무나도 빨갰다. 한 겨울 바람을 맞은 것처럼. 감싸주고 싶을 정도로 시려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감싸주지 못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이제 이마이 씨는 가세요."
가라니, 어딜? 리사가 입술을 끔뻑이자 사요가 고개를 들어 리사를 바라보았다.
"저도 갈게요."
"....."
"이대로는 이마이 씨가 상처 받아요. 돌아가세요. 집으로."
사요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몇발자국 옮겼을까. 그제서야 눈물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터졌다.
"어디가!"
"....집에 가요."
"사요...!"
"상처 받지 말고... 행복하게 사세요. 저도 행복해질게요."
집에 가세요. 저도 집에 갈게요.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해질게요. 사요는, 헤어지자는 말 대신에 그렇게 떠나갔다. 사요는 사요의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그저 기다렸다. 언젠가 돌아오겠지. 순간의 감정이었길 기도하며 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기다려봤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며칠에 걸쳐서 깨달은 리사 역시,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마치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모든 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흘러갔다. 리사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서 단 한번도 사요의 집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
"사~요!"
눈치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다가가 바짝 그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요는 불쑥 제 허리를 감싸안는 팔에 조금 놀라다가도 이내 누군지 알아차리고는 팔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이마이 씨, 그렇게 불쑥 오면 다쳐요. 제가 움직이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어차피 내가 오는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몰랐어요. 이번에는."
"정말?"
"정말로요."
알면서도 몰랐다고 해주는 그 상냥함이 좋았다. 리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요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사요는 급하게 리사의 어깨를 떨어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길거리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말했잖아요. 누가 보면 어떡해요?"
"보면 어때? 난 이제 안참을래!"
"잠, 잠깐만요, 이마이 씨!"
다시 다가오는 얼굴을 있는 힘껏 밀어내며 눈을 질끈 감던 사요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청량한 웃음소리에 눈을 떴다. 리사가 사요를 보며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었다. 사요는 짐짓 엄하게 표정을 바꾸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장난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잖아요..."
"아하하, 알겠어~ 근데 너무 귀여운걸?"
"대체 뭐가 귀엽다는 건지... 얼른 집에 가요. 곧 어두워지겠어요."
사요가 정답게 리사의 손을 잡아왔다. 리사는 언제까지고 놓지 않을 것처럼 사요의 손을 꽉 쥐고는, 함께 집으로 향했다. 오늘 하루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걸을 때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리사는 반 친구의 말투를 흉내내기도 하고, 선생님의 행동을 흉내내기도 하면서 열심히 상황을 재현해냈다. 그럴 때마다 사요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매번 리사의 흉내에 감탄했다.
그렇게 떠들다보면 집 앞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잠시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리사가 사요에게 잘 가라며 손을 흔들려던 찰나, 갑자기 리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언제 맞춰놨는지 모를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소리가 꽤 커서 귓가에 쟁쟁히 울린다.
"이마이 씨, 제가 알람 소리는 적당히 줄여놓으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단 말이야."
"귀 상해요. 아프면 큰일이잖아요."
여전히 귀를 잡아먹을 듯이 울리는 알람음 속에서, 리사는 새삼스럽게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요, 나 사랑해?"
"...갑자기요?"
"빨리~ 사랑한다고 말해줘."
영문을 모르는 사요는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살짝 올라간 입고리에 리사는 점점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알람음 소리는 이상하게 자꾸만 높아졌다. 바람이 흔들리는 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어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는 소리가 전부 알람 소리에 묻혀버렸다.
사요가 입을 열었다. 무어라고 중얼거린다. 알람 소리 때문에 들리지가 않는다. 리사는 여전히 알람음을 끄지 않은 채, 있는 힘껏 웃었다.
"나도, 사랑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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