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팬픽은 기존 캐릭터 설정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온 몸이 젖어서 교복이 질척댄다. 땀이 흐르는대로,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대로 그냥 놔두고 숨을 몰아쉬면서 달렸다. 매미들이 지저귀면서 귓가를 어지럽혔지만 사쿠라코의 머릿 속에는 단 하나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히마와리를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된다, 절대로.
"히마와리!"
현관 문을 벌컥 열자 놀란 하나코가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야?"
"히마와리, 히마와리 어딨어?"
"나데시코 언니가 제빵 학원 등록해주려고 같이 학원에..."
"어느쪽인데?!"
"아... 아마 사쿠라코 언니 학교 쪽일걸?"
사쿠라코가 던지는 가방을 하나코가 간신히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쿠라코는 이미 문을 닫고 사라진 뒤였다. 어제는 그렇게 싸웠다면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지?
"젠장, 젠장, 하필이면 또 학교 쪽이야?"
돌아왔던 길을 다시 가려니 짜증도 나고 이런 일에 왜 반응해야 하는지 귀찮기도 하다. 한가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니시가키가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계속 어린 아이 취급만 하면서 놀려먹기나 하고, 이러는 와중에 히마와리를 탐내고 있다. 절대로 이쪽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이야기가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천재 과학자. 이쪽에서 싫다고 한들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다.
학교 근처까지는 어찌저찌 도착했지만 생각해보니 자세한 위치는 물어보지 않았다. 마냥 죽치고 기다리기에는 어느 방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와중에 니시가키를 만난다면 분명 골치아플 것이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이마를 짚었다.
"사쿠라코?"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히마와리가 미용실 문을 빼꼼 열고 이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그런데 왜 미용실에서 나오는거지?
"너 거기서 뭐해!"
"나데시코 씨가 머리를 자른다고 하시기에..."
"걘 냅두고 넌 이리 나와."
사쿠라코가 성큼성큼 다가가서 히마와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 아뇨, 잠깐만요!"
히마와리가 놀라서 손을 비집고 빼려는 순간 미세한 떨림이 손목을 타고 전해져왔다. 사쿠라코는 떨고 있었다. 눈빛이 한곳에 머물러있지 못하고 흔들렸다.
"무슨 일이 있군요."
"......"
"알겠어요. 일단 진정해요.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말해준다면 어디에서부터 말해줘야 할까. 아무래도 히마와리를 만든건 내가 아니라 니시가키 나나야, 라는 말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히마와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니시가키를 골탕먹이기 위해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히마와리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아마 처음부터 이야기를 꺼낸다면 히마와리는 그걸 눈치 챌 것이다. 말할 수 없다.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제 히마와리는 더이상 니시가키를 골탕먹이기 위한 도구가 아닌데...
"히마와리, 먼저 가있어. 뒤따라 갈게."
나데시코가 거울로 히마와리와 사쿠라코를 주시하고 있다가 외쳤다. 히마와리는 나데시코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사쿠라코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왔다.
"하나코한테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 학원 등록했어요. 나데시코 씨가 도와줬어요."
히마와리가 기쁜 어조로, 그러나 사쿠라코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쿠라코는 힘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마와리를 발견하고 나니 기를 썼던게 순식간에 풀리면서 피곤해졌다.
"아까 무슨 사고 난 사람인줄 알았어요. 왜 그런거예요?"
"...자꾸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말이야... 학원... 역시 그만두면 안될까?"
사쿠라코의 손이 히마와리의 손을 옥죄었다. 조금 욱씬거리는 느낌에 히마와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쿠라코, 지금 저한테 숨기는게 엄청 많네요."
"......"
"온통 제가 알아듣지 못할 말만 하시잖아요. 대체..."
사쿠라코가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히마와리도 덩달아 멈추었다. 사쿠라코의 머리가 힘없이 히마와리의 어깨에 닿았다. 깊은 한숨이 히마와리의 어깨를 타고 흘렀다.
"있잖아, 사실은... 사실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히마와리가 날 떠날리가 없어. 사쿠라코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말하는거야.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도 아니잖아? 아무런 일도 아닌 것 처럼 후딱 말해버리고 니시가키가 어떤 속셈인지 다 밝혀야 한다. 그런데 자꾸 가슴이 막혀오는건 왜일까. 발 끝에서부터 오한이 몰려왔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다.
"사실은...?"
히마와리도 긴장했는지 사쿠라코의 말을 천천히 되씹었다.
사쿠라코의 머릿 속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히마와리를 처음 만났을 때, 집에 데리고 왔을때, 하룻 밤을 보냈을 때, 슬퍼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싸웠을 때,.... 그 하얀 이를 보았을 때.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눈물이 고였다. 순식간에 하려던 말을 다 잊어버렸다.
"나는..."
그래, 그랬었다. 그런 거였다. 나는...
"널 지키고 싶어..."
사쿠라코가 히마와리의 소매를 꽉 쥐었다.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히마와리는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울어버리는 사쿠라코를 안았다. 흥건해진 땀이 옷에 달라붙었지만 가만히 그 얼굴을 가슴에 파묻었다.
"울지 말아요, 울라고 한 소리가 아닌데... 사쿠라코..."
그렇게 불안에 떨면서 히마와리를 찾았던 이유는,
역시 히마와리가 좋아져서...일지도 모르겠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아직 덜 말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창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분다. 스르르 잠이 올 것 같다.
"사쿠라코..."
히마와리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사쿠라코가 몸을 일으켰다.
"나데시코 씨한테 학원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미안해."
"역시 말해 줄 수... 없겠죠? 무슨 일이 있는건지."
"....."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동안 히마와리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닫고 나서는 더더욱 말할수가 없었다. 왠지 말해버리면 히마와리가 떠나지는 않더라도 조금 어색해질까봐. 게다가 그렇게 되면 니시가키의 승리가 될지도 모른다. 정신적인 승리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사쿠라코가 히마와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히마와리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왜 히마와리가 좋은걸까. 좋다면, 어느 정도로 좋은 걸까. 전날에 히마와리가 꺼냈던 '사귀는'것에 대해 문득 생각났다.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다. 히마와리는 안드로이드인데. 나는 인간인데. 우리는 여자인데...
"내가 죽어도 넌 영원히 살아있겠네."
툭 내뱉은 말에 히마와리가 놀라면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아냐, 그냥."
"오늘따라 많이 놀래키네요. 그만 좀 해요."
히마와리가 픽 웃었다. 그 웃음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사쿠라코가 느리게, 한글자씩 입을 열었다.
"계속 내 곁에 있어줄거지?"
"....네."
"안떠날거지?"
"오늘따라 의미를 모르겠네요... 안떠나요."
"화해의 의미로 안아줘."
안아달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쿠라코가 먼저 히마와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허리를 감싸 안으니 딱딱한것 같기도 하고 폭신한것 같기도 한 히마와리의 몸이 느껴졌다. 몇번을 봐도 안드로이드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화해예요?"
히마와리가 웃으면서 사쿠라코를 감싸안았다.
"니가 인간이었으면 좋겠어."
"왜요?"
"....."
"사쿠라코, 제가 좋아졌죠?"
확, 히마와리를 밀쳤다. 사쿠라코가 빨개진 얼굴로 씩씩대자 히마와리가 장난스럽게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럼 인간으로 만들어주세요."
"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꼭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구요."
"바보야, 인간은 만들 수 있는게 아니야."
사쿠라코가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를 후두두 털어냈다.
"저도 만들어냈는데 인간이라고 못만들까."
"...그건..."
"저는 사쿠라코가 먼저 죽는건 보지 않을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으로 만들어주세요."
히마와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사쿠라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인간이 되면... 사쿠라코와 평생 함께할 수 있으니까."
순간 히마와리의 눈빛이 일렁였다. 그 눈빛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사쿠라코가 중얼거렸다.
"인간으로 만들어줄게. 반드시."
사쿠라코의 머리를 쓰다듬는 히마와리의 손 위에, 사쿠라코의 손이 포개졌다.
히마와리의 손은 가슴이 뛸 정도로 따뜻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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