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어."
아침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나온 말에, 히마와리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내 앞에 앉았다. 무거웠던 공기는 아예 정지한 듯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예전에 그 사람한테서 다시 연락이 온건가요?"
"아니."
"주위를 차단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생겼나요?"
"아니."
"제가 귀찮아진건가요?"
마지막 질문에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히마와리는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때론 칭얼댈줄 아는 동생이었다. 요리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고 사랑도 잘했다. 같이 사는 동안 정말 최고였다. 하지만...
"미안해."
동글동글 입 안에서 씹히던 밥알들이 점점 단 맛을 잃어갔다. 히마와리의 손을 보았다. 우두커니 탁자 위에 올려진 손은 많이 야위고 힘없어보였다. 나와 같이 지낸 20대는 히마와리에게 곧 지옥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침에는 언제나 밥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목욕물도 정해진 온도에 맞춰지지 않으면 화를 냈고, 샴푸나 섬유유연제 같은 향기가 나는 제품들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것도 싫어했다. 구두는 언제나 반짝반짝하게, 바닥은 먼지 한톨 없게, 욕실은 습기 없게, 이불은 구김 없이. 심지어 사랑을 나눌때도 재차 내 볼에 입을 맞추지 않으면 금방 화를 냈다. 정말 최고의 히마와리에, 최악의 사쿠라코였다.
"나랑 있으면 더 골치아파질거야. 우리 많이 싸웠잖아."
"정말 지겹도록 싸우긴 했죠."
"여긴 지옥이야.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빨리 떠나는게 좋을거야."
"더 이상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주세요."
으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턱이 뻐근해졌다. 이미 내가 이 말을 할거라는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했다. 히마와리는 내 앞에 놓인 물컵을 들고 물을 한입 들이켰다.
"그래,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못느끼겠어."
"좀 더 구체적으로."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면 답답해서 미치겠고, 마주보면서 밥도 먹기 불편하고, 자는 것도... 이제 지루해."
히마와리가 픽 웃었다. 정말 웃겨서 웃는건지 어이가 없어서 웃는건지 모르겠다. 입고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지막은 최악이네요. 바로 어제 일인데."
"...최악이지."
"좋아요, 나가드릴게요."
히마와리가 의자를 끌고 일어났다. 어느새 비워진 내 밥그릇을 들고 싱크대에 갖다놓았다. 그리고, 늘 그랬듯 커피를 타왔다. 정을 떼기도 모자랄 판에 모든 것은 제자리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
숨이 턱 막혔다. 그냥 끝냈으면 좋겠는데, 요구가 있다니.
"매일 밤에 퇴근하고 나서 제 손등에 한번, 볼에 한번, 입술에 한번 키스해주세요."
"왜 그래야하는지 모르겠는데."
"단 일주일만 그렇게 해주세요. 진심을 받고 싶어요."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제 스킨십도 일체 하고 싶지 않은데. 히마와리는 번복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눈빛이었다. 단호하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마치 그동안 내가 느끼게 했던 외로움에 보상이라도 해야한다는 표정이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단숨에 커피를 들이마시고 가방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정말 좋았는데, 이제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 만으로도 답답하고 도망가고 싶어졌다. 일주일, 일주일만 참자. 이후론 해방이다.
그날 밤 퇴근하고 나서, 약속한 것을 처음 실행할 시간이 다가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히마와리가 반겼다.
"어서오세요."
미소가 걸쳐져있는것 같기도 하고, 조금 굳어있는것 같기도 하다. 아침의 약속은 잊은 것 처럼 행동하려다가 단 며칠이라는 생각에 이내 히마와리의 손을 잡아서 올렸다. 손등에 키스하고 조금 망설였다. 히마와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볼과 입술에 짧게 입맞추었다. 히마와리를 남겨두고 휑 방으로 들어가버리니 곧 목욕물을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를 등지고 잤다.
다음날 아침에 히마와리의 태도는 똑같았다. 맛있는 아침을 대령하고, 따뜻한 커피를 탔다. 나는 주는 대로 받아먹고 다시 현관에 섰다.
"다녀오세요."
싱긋 웃음을 던지는걸 못본 척 하고 출근했다. 일 하는 내내 오늘도 현관에서 입맞춤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넥타이를 자꾸 풀어헤쳤다. 날 골리려는 속셈이 아닌가 싶었다. 이정도면 고문이다.
그리고 다시 약속한 시간이 되어, 현관에서 마주보았다. 히마와리는 전날보다 훨씬 편해보였다. 얼른 끝내자는 생각에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세 번의 입맞춤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니 다시 욕실에서 물 소리가 들렸다.
세번째 날, 네번째 날도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약을 삼키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늘 표정을 찡그리며 약속을 지켜갔고 히마와리는 별 말 없이 받아들였다. 잘때는 늘 등지고 잤다.
다섯번째 날. 내 접시를 싱크대로 옮기고 있는 히마와리에게 한마디 던졌다.
"잘 먹었어."
평소엔 하지 않던 말이었다. 이제 곧 이 집을 나가고 다신 안볼테니 이 정도 말은 해줘야겠지. 히마와리는 놀란 듯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에요."
그리고 그 날 퇴근하고나서 다시 마주본 히마와리에게 뭔가 더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이 집을 나가면 한동안 이런 따뜻함은 느낄 수 없을 테니까, 그동안만이라도. 세번의 입맞춤을 조금 길게 했다. 이 정도면 이틀 뒤에 히마와리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에는 똑바로 누워 천장을 보고 잤다. 옆으로 어렴풋이 히마와리의 코가 보이는 듯 했다. 히마와리의 코는 오똑하고 예뻤다.
여섯번째 날, 잘먹겠습니다, 잘먹었습니다라는 말을 꼬박 했다. 히마와리는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현관을 나서며 뒤돌아보았다.
"내일이 마지막이네."
"그러게요."
"나갈때 아프면 곤란하니까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
진심이었다. 내 생각으로 마음고생하다가 덜컥 감기라도 걸려버리면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날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오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뭔가 알 수 없는 가시가 붙는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한숨이 나왔다. 참자. 내일이 마지막이야.
회사에 도착해서는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아 몇번 꾸지람을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셔츠 윗단추를 풀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땀과 잡념을 다 날려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다시 마주볼때, 히마와리의 사소한 것들을 다시 느꼈다. 손은 야위지 않고 부드러웠고, 비누 향이 났다. 볼은 말랑말랑했고 입술은 따뜻했다. 조금 길게 입맞춤하다가 화들짝 놀라서 방으로 냅다 뛰어들어가버렸다. 곧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뭔가 이상해지는 이 분위기를 히마와리는 눈치채지 못했기를.
그날 밤에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가 흘끔 히마와리 쪽으로 돌아누웠다. 조금 허전해진것 같았다. 불편했다고는 해도 누군가가 있다가 없는 것은 분명 쓸쓸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일 떠나야한다. 이미 잠든 히마와리의 옆모습을 보면서 눈을 비볐다. 하품을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마지막 날.
"몸 조심하세요."
히마와리가 내 넥타이를 바로잡아주었다. 어깨를 툭툭 털어주기도 하고, 소매를 정리해주기도 했다. 우리가 막 함께 살게 됐을때 다정했던 히마와리 그대로였다. 나는 이렇게나 변했는데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녀올게."
그날따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현관에서 배웅해주는 히마와리를 잠시 돌아보았다가 출근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내 숨을 잠식시켜갔다. 차가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 멍하게 그저 걸었다. 덕분에 회사에 지각했다. 또 꾸지람을 들었다. 요즘 안그러더니 왜 다시 일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돌아갔나, 오오무로 씨? 그 말에 웃음이 나오는걸 간신히 참았다. 고작 초심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때 내 모습이라니. 가정에서 초심으로 돌아갔었다면.
퇴근하고 신발을 벗으니 히마와리가 여전히 서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큰 가방 여럿도 함께였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외출 차림이었다.
"마지막이에요."
히마와리가 손등을 내밀었다. 알수 없는 한숨이 짧게 흘러나왔다. 정말 마지막이다. 이젠 혼자다.
조각같은 손등에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볼에 입을 맞추고,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이제 보내줘야 한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도. 그리고 미안해."
"함께 한 시간만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았잖아요, 우리."
내가 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았다.
"어디로 갈거야?"
"일단 본가로 들어가야죠. 멋대로 뛰쳐나온거라 조금 혼나겠지만 감안하고 있어요."
"짐 들어줄까? 무거워보이는데."
"약속은 여기까지예요. 사쿠라코가 더 이상 뭘 해줄 의무는 없어요."
히마와리가 가방들을 들고 신발을 신었다.
"아 그리고, 목욕물은 못받았어요. 짐 싸느라 너무 바빠서... 미안해요."
"......"
"혼자서도 잘 할수 있죠?"
무심하게 말하며 반대쪽 신발도 신으려는 히마와리의 손을 붙잡았다. 히마와리가 천천히 허리를 일으켰다.
"왜요?"
"목욕물은 받아주고 가."
"네?"
"온도도 맞춰주고 가. 나 피곤해."
히마와리가 멍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반대로 머리는 조금씩 차가워졌다.
"그리고 내가 벗은 옷들 정리해주고 가."
".....사쿠라코?"
"생각해보니 이불도 펼쳐주고 가야지."
"...."
"아침에 고슬고슬한 밥도 지어주고, 커피도 타주고, 넥타이도 고쳐주고, 다녀오라고 인사도 해주고 가야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전 지금 가야하는걸요. 내일 아침까지는..."
다른 한 손으로 히마와리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매일 밤에 잘 자라고 품에 안아줘야지.... 어딜 가겠다는거야."
왜 이제와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히마와리가 귀찮아진게 아니었던가. 해방을 바라는게 아니었던가. 시원하게 놓아줄 작정이 아니었던가. 히마와리가 내 두 손을 잡아 내렸다.
"사쿠라코가 부탁한 일이잖아요. 나가달라고."
"....."
"정말 최악이네요, 사쿠라코는."
그 말을 하는 히마와리의 숨결에 웃음이 묻어났다. 눈이 뻐근해지더니 이내 히마와리의 아름다운 웃음을 밀어내고 눈물이 차올랐다. 히마와리가 손을 들어 천천히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이렇게 저를 힘들게 해요... 일주일 동안 마음 다잡아놨더니."
아이처럼 히마와리 품에 안겼다. 침대 위에서만 맞을 수 있는 향기가 은은히 퍼졌다.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하려면 108배를 하며 절을 해와도 모자랄 판이었다. 히마와리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입맞춤 말고 키스 해줄래요?"
히마와리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거칠게 파고드는 나를 히마와리가 감싸안았다.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내가 봐오던 얼굴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았다.
히마와리가 키스를 멈추고 잠시 떨어져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짐 푸는거 도와줄래요? 혼자서 몇시간씩 쌌더니 피곤해요."
"응, 그래."
우리는 도로 신발을 벗고 가방을 집 안으로 들였다.
"저기, 그리고 말이야."
머리를 긁적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잘때 볼에 입 안맞춰준다고 화 안낼테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이 히마와리가 웃으며 말을 잘랐다. 가늘고 예쁜 손이 포근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짐 마저 풀구요."
도대체 무엇이 이 사단을 일으켰는가는 이제 아득히 묻혔다. 한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러 느끼게 된 체취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급한 일을 하다가도 한숨을 돌리고보면 어느새 곁에 있는 듯 그 향기가 날 때가 있다. 단 7일이었지만 그 사이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넌 아직 히마와리를 기억하잖아, 라고.
-FIN.
아침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나온 말에, 히마와리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내 앞에 앉았다. 무거웠던 공기는 아예 정지한 듯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예전에 그 사람한테서 다시 연락이 온건가요?"
"아니."
"주위를 차단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생겼나요?"
"아니."
"제가 귀찮아진건가요?"
마지막 질문에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히마와리는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때론 칭얼댈줄 아는 동생이었다. 요리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고 사랑도 잘했다. 같이 사는 동안 정말 최고였다. 하지만...
"미안해."
동글동글 입 안에서 씹히던 밥알들이 점점 단 맛을 잃어갔다. 히마와리의 손을 보았다. 우두커니 탁자 위에 올려진 손은 많이 야위고 힘없어보였다. 나와 같이 지낸 20대는 히마와리에게 곧 지옥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침에는 언제나 밥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목욕물도 정해진 온도에 맞춰지지 않으면 화를 냈고, 샴푸나 섬유유연제 같은 향기가 나는 제품들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것도 싫어했다. 구두는 언제나 반짝반짝하게, 바닥은 먼지 한톨 없게, 욕실은 습기 없게, 이불은 구김 없이. 심지어 사랑을 나눌때도 재차 내 볼에 입을 맞추지 않으면 금방 화를 냈다. 정말 최고의 히마와리에, 최악의 사쿠라코였다.
"나랑 있으면 더 골치아파질거야. 우리 많이 싸웠잖아."
"정말 지겹도록 싸우긴 했죠."
"여긴 지옥이야.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빨리 떠나는게 좋을거야."
"더 이상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주세요."
으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턱이 뻐근해졌다. 이미 내가 이 말을 할거라는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했다. 히마와리는 내 앞에 놓인 물컵을 들고 물을 한입 들이켰다.
"그래,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못느끼겠어."
"좀 더 구체적으로."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면 답답해서 미치겠고, 마주보면서 밥도 먹기 불편하고, 자는 것도... 이제 지루해."
히마와리가 픽 웃었다. 정말 웃겨서 웃는건지 어이가 없어서 웃는건지 모르겠다. 입고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지막은 최악이네요. 바로 어제 일인데."
"...최악이지."
"좋아요, 나가드릴게요."
히마와리가 의자를 끌고 일어났다. 어느새 비워진 내 밥그릇을 들고 싱크대에 갖다놓았다. 그리고, 늘 그랬듯 커피를 타왔다. 정을 떼기도 모자랄 판에 모든 것은 제자리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
숨이 턱 막혔다. 그냥 끝냈으면 좋겠는데, 요구가 있다니.
"매일 밤에 퇴근하고 나서 제 손등에 한번, 볼에 한번, 입술에 한번 키스해주세요."
"왜 그래야하는지 모르겠는데."
"단 일주일만 그렇게 해주세요. 진심을 받고 싶어요."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제 스킨십도 일체 하고 싶지 않은데. 히마와리는 번복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눈빛이었다. 단호하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마치 그동안 내가 느끼게 했던 외로움에 보상이라도 해야한다는 표정이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단숨에 커피를 들이마시고 가방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정말 좋았는데, 이제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 만으로도 답답하고 도망가고 싶어졌다. 일주일, 일주일만 참자. 이후론 해방이다.
그날 밤 퇴근하고 나서, 약속한 것을 처음 실행할 시간이 다가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히마와리가 반겼다.
"어서오세요."
미소가 걸쳐져있는것 같기도 하고, 조금 굳어있는것 같기도 하다. 아침의 약속은 잊은 것 처럼 행동하려다가 단 며칠이라는 생각에 이내 히마와리의 손을 잡아서 올렸다. 손등에 키스하고 조금 망설였다. 히마와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볼과 입술에 짧게 입맞추었다. 히마와리를 남겨두고 휑 방으로 들어가버리니 곧 목욕물을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를 등지고 잤다.
다음날 아침에 히마와리의 태도는 똑같았다. 맛있는 아침을 대령하고, 따뜻한 커피를 탔다. 나는 주는 대로 받아먹고 다시 현관에 섰다.
"다녀오세요."
싱긋 웃음을 던지는걸 못본 척 하고 출근했다. 일 하는 내내 오늘도 현관에서 입맞춤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넥타이를 자꾸 풀어헤쳤다. 날 골리려는 속셈이 아닌가 싶었다. 이정도면 고문이다.
그리고 다시 약속한 시간이 되어, 현관에서 마주보았다. 히마와리는 전날보다 훨씬 편해보였다. 얼른 끝내자는 생각에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세 번의 입맞춤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니 다시 욕실에서 물 소리가 들렸다.
세번째 날, 네번째 날도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약을 삼키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늘 표정을 찡그리며 약속을 지켜갔고 히마와리는 별 말 없이 받아들였다. 잘때는 늘 등지고 잤다.
다섯번째 날. 내 접시를 싱크대로 옮기고 있는 히마와리에게 한마디 던졌다.
"잘 먹었어."
평소엔 하지 않던 말이었다. 이제 곧 이 집을 나가고 다신 안볼테니 이 정도 말은 해줘야겠지. 히마와리는 놀란 듯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에요."
그리고 그 날 퇴근하고나서 다시 마주본 히마와리에게 뭔가 더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이 집을 나가면 한동안 이런 따뜻함은 느낄 수 없을 테니까, 그동안만이라도. 세번의 입맞춤을 조금 길게 했다. 이 정도면 이틀 뒤에 히마와리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에는 똑바로 누워 천장을 보고 잤다. 옆으로 어렴풋이 히마와리의 코가 보이는 듯 했다. 히마와리의 코는 오똑하고 예뻤다.
여섯번째 날, 잘먹겠습니다, 잘먹었습니다라는 말을 꼬박 했다. 히마와리는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현관을 나서며 뒤돌아보았다.
"내일이 마지막이네."
"그러게요."
"나갈때 아프면 곤란하니까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
진심이었다. 내 생각으로 마음고생하다가 덜컥 감기라도 걸려버리면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날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오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뭔가 알 수 없는 가시가 붙는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한숨이 나왔다. 참자. 내일이 마지막이야.
회사에 도착해서는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아 몇번 꾸지람을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셔츠 윗단추를 풀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땀과 잡념을 다 날려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다시 마주볼때, 히마와리의 사소한 것들을 다시 느꼈다. 손은 야위지 않고 부드러웠고, 비누 향이 났다. 볼은 말랑말랑했고 입술은 따뜻했다. 조금 길게 입맞춤하다가 화들짝 놀라서 방으로 냅다 뛰어들어가버렸다. 곧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뭔가 이상해지는 이 분위기를 히마와리는 눈치채지 못했기를.
그날 밤에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가 흘끔 히마와리 쪽으로 돌아누웠다. 조금 허전해진것 같았다. 불편했다고는 해도 누군가가 있다가 없는 것은 분명 쓸쓸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일 떠나야한다. 이미 잠든 히마와리의 옆모습을 보면서 눈을 비볐다. 하품을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마지막 날.
"몸 조심하세요."
히마와리가 내 넥타이를 바로잡아주었다. 어깨를 툭툭 털어주기도 하고, 소매를 정리해주기도 했다. 우리가 막 함께 살게 됐을때 다정했던 히마와리 그대로였다. 나는 이렇게나 변했는데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녀올게."
그날따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현관에서 배웅해주는 히마와리를 잠시 돌아보았다가 출근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내 숨을 잠식시켜갔다. 차가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 멍하게 그저 걸었다. 덕분에 회사에 지각했다. 또 꾸지람을 들었다. 요즘 안그러더니 왜 다시 일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돌아갔나, 오오무로 씨? 그 말에 웃음이 나오는걸 간신히 참았다. 고작 초심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때 내 모습이라니. 가정에서 초심으로 돌아갔었다면.
퇴근하고 신발을 벗으니 히마와리가 여전히 서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큰 가방 여럿도 함께였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외출 차림이었다.
"마지막이에요."
히마와리가 손등을 내밀었다. 알수 없는 한숨이 짧게 흘러나왔다. 정말 마지막이다. 이젠 혼자다.
조각같은 손등에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볼에 입을 맞추고,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이제 보내줘야 한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도. 그리고 미안해."
"함께 한 시간만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았잖아요, 우리."
내가 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았다.
"어디로 갈거야?"
"일단 본가로 들어가야죠. 멋대로 뛰쳐나온거라 조금 혼나겠지만 감안하고 있어요."
"짐 들어줄까? 무거워보이는데."
"약속은 여기까지예요. 사쿠라코가 더 이상 뭘 해줄 의무는 없어요."
히마와리가 가방들을 들고 신발을 신었다.
"아 그리고, 목욕물은 못받았어요. 짐 싸느라 너무 바빠서... 미안해요."
"......"
"혼자서도 잘 할수 있죠?"
무심하게 말하며 반대쪽 신발도 신으려는 히마와리의 손을 붙잡았다. 히마와리가 천천히 허리를 일으켰다.
"왜요?"
"목욕물은 받아주고 가."
"네?"
"온도도 맞춰주고 가. 나 피곤해."
히마와리가 멍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반대로 머리는 조금씩 차가워졌다.
"그리고 내가 벗은 옷들 정리해주고 가."
".....사쿠라코?"
"생각해보니 이불도 펼쳐주고 가야지."
"...."
"아침에 고슬고슬한 밥도 지어주고, 커피도 타주고, 넥타이도 고쳐주고, 다녀오라고 인사도 해주고 가야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전 지금 가야하는걸요. 내일 아침까지는..."
다른 한 손으로 히마와리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매일 밤에 잘 자라고 품에 안아줘야지.... 어딜 가겠다는거야."
왜 이제와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히마와리가 귀찮아진게 아니었던가. 해방을 바라는게 아니었던가. 시원하게 놓아줄 작정이 아니었던가. 히마와리가 내 두 손을 잡아 내렸다.
"사쿠라코가 부탁한 일이잖아요. 나가달라고."
"....."
"정말 최악이네요, 사쿠라코는."
그 말을 하는 히마와리의 숨결에 웃음이 묻어났다. 눈이 뻐근해지더니 이내 히마와리의 아름다운 웃음을 밀어내고 눈물이 차올랐다. 히마와리가 손을 들어 천천히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이렇게 저를 힘들게 해요... 일주일 동안 마음 다잡아놨더니."
아이처럼 히마와리 품에 안겼다. 침대 위에서만 맞을 수 있는 향기가 은은히 퍼졌다.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하려면 108배를 하며 절을 해와도 모자랄 판이었다. 히마와리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입맞춤 말고 키스 해줄래요?"
히마와리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거칠게 파고드는 나를 히마와리가 감싸안았다.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내가 봐오던 얼굴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았다.
히마와리가 키스를 멈추고 잠시 떨어져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짐 푸는거 도와줄래요? 혼자서 몇시간씩 쌌더니 피곤해요."
"응, 그래."
우리는 도로 신발을 벗고 가방을 집 안으로 들였다.
"저기, 그리고 말이야."
머리를 긁적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잘때 볼에 입 안맞춰준다고 화 안낼테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이 히마와리가 웃으며 말을 잘랐다. 가늘고 예쁜 손이 포근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짐 마저 풀구요."
도대체 무엇이 이 사단을 일으켰는가는 이제 아득히 묻혔다. 한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러 느끼게 된 체취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급한 일을 하다가도 한숨을 돌리고보면 어느새 곁에 있는 듯 그 향기가 날 때가 있다. 단 7일이었지만 그 사이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넌 아직 히마와리를 기억하잖아, 라고.
-FIN.
'팬픽 > 유루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마사쿠]피그말리온 효과-12 (0) | 2016.03.23 |
---|---|
[히마사쿠]몽유병 (0) | 2016.03.12 |
[히마사쿠]버스는 종착역을 지나 다시 온다 (2) | 2016.02.23 |
[히마사쿠]피그말리온 효과-11 (0) | 2016.02.20 |
[히마사쿠]피그말리온 효과-10 (0) | 2016.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