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코는 전율했다. 전날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던 히마와리의 집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런 생각없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자, 도착한 곳은 히마와리의 집이었다. 마치 너는 여기에 도달해야 한다는 신의 계시처럼.
쿄코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전화로 했다간 소리를 지르면서 펑펑 울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심장이 벌컥벌컥 울렸다. 쿄코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볼까 했으나 바로 앞에 있는 마시멜로가 언제 사라질 지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현관 앞에 섰다.
"히마와리."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부르자 이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히마와리! 안에 있어? 내 목소리 들려? 대답 좀 해봐!"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열리지 않는다면 열릴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릴 참이었다. 이제 학교고 발야구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여러차례 더 외치려던 찰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사쿠라코에게 문이 열리는 순간은 백년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사쿠라코는 문이 다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문 고리를 잡고 벌컥 젖혔다.
"한번만 두드렸어도 열릴 문인데."
그런데 사쿠라코를 맞이하는 사람은 히마와리가 아니었다. 짙은 자주색 머리에, 인상이 조금 차가워보이는 여자가 우두커니 사쿠라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마치 사쿠라코를 알고 있다는 듯 안쪽으로 안내했다.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어."
사쿠라코는 여자의 안내 따위 필요 없었다. 바로 방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들어가자마자 힘없이 누워있는 히마와리의 모습에 나오려던 눈물마저 쏙 들어갔다. 히마와리는 안 본 사이에 너무나도 야위어있었다. 그 주변에는 음식을 먹은 흔적이 널려있었고, 환기도 시키지 않았는지 공기는 탁했다.
"너. 후회 안할 자신 있어?"
여자가 물었다. 사쿠라코는 그제서야 여자를 돌아보았다. 어디에선가 많이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 인상이었다.
"지금 정말 많은 게 궁금할거야. 왜 내가 히마와리 곁에 있는지. 히마와리는 왜 연락도 없이 저렇게 누워있는지.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건지. 그리고... 저번에 학교에서는 무슨 인연이었던 건지."
아, 사쿠라코는 그 여자가 예전에 학교 체육관에서 만났던 사람임을 기억해냈다. 분명 그때 체육관 2층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고개를 들고 어떤 냄새를 맡는 것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근데, 그걸 전부 아는 순간 넌 불행해져."
여자가 사쿠라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사쿠라코는 잠시 한기를 느꼈다.
"왜... 불행해진다는 거죠?"
"그것도 알려줄 수 없어. 네가 불행해지겠다고 다짐하면. 그 때 알려줄게."
사쿠라코는 다시 조용히 히마와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서 있는 히마와리는, 숨은 쉬고 있나 싶을 정도로 얼굴에 붉은 빛을 띠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가서 숨을 쉬고 있는지만 봐도 되지 않을까. 사쿠라코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여자가 사쿠라코의 팔을 잡았다.
"안돼.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내기 전까지."
이렇게 눈 앞에 있는데,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고생했는데, 안된다니. 사쿠라코가 힘차게 돌아섰다.
"감당하겠다고 하면 히마와리를 지킬 수 있는 거야?"
여자가 잠시 웃었다.
"대신 너는 당분간 비참할 정도로 불행에 시달릴거야. 어떤 불행일지는 아무도 장담 못해."
"......."
"네가 교통사고를 당할지. 지나가던 개한테 물려서 상처가 심하게 날지. 집이 갑자기 풍비박산이 된다던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그게 단 한순간으로 그치지 않고 중첩된다고 생각해봐."
그렇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하자, 사쿠라코는 몸져 누워있는 히마와리에게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큰 희생을 진다고 해도 무조건적인 불행이라니.
"히마와리는... 언제 깨어나?"
"...그것도 아무도 몰라."
"........"
"겁나면, 그대로 나가면 돼. 나가서, 히마와리를 잊으면 돼. 영원히. 너의 기억 속에 없던 사람처럼."
그 말을 하면서 여자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버티든 나가든 넌 히마와리를 잊어야 해. 그 사실엔 변함이 없어."
사쿠라코는 어렴풋이, 이 사건은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갑자기 히마와리네 집 주소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가 하루아침에 기억이 난 것 하며, 예고 없이 매번 쓰러지는 히마와리, 그래 그건 히마와리에게 지병이 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어느샌가 히마와리 곁을 지키고 있는 이상한 여자까지.
여자는 사쿠라코의 눈빛을 읽고 이내 체념했다. 어차피 주변에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판타지 소설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사쿠라코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진지하게 히마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단 덤덤한 인간의 모습에 여자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쿠라코는 전혀 겁내지 않고 있다. 인간이란 늘 그런 존재일까.
눈 앞에 해맑은 웃을 가진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늘 그 사람 꿈속에 찾아가지만 그 사람은 여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직 서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니까. 여자는 천사가 되지 못했고, 그 사람은 불행해진데다가 여자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천사에게는 누군가의 기억에 남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형벌이다. 그들은 인간의 기억과 행복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더이상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않고 불행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천사가 아니라 악마가 되어버린다.
즉, 여자는 천사였고, 지금은 악마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있는 인간은 천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불행 앞에 두 다리로 곧게 서있다.
"네가 저 아이를 돕는 순간, 저 아이는 너에게 악마가 될 수도 있어. 그건 저 아이도 원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그건... 악마가 된다는 건 결국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거 아니야?"
여자가 놀라며 바닥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사쿠라코는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당당한 모습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히마와리를 악마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나에게 불행을 줬다고 해서 히마와리를 악마로 생각하는 일은 없어. 불행해졌다고 해서 악마의 소행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질투고 나약함일 뿐이야. 난 달라."
사쿠라코는 히마와리가 준 작은 기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준결승에서 이기게 해 준 것 뿐만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안정을 주었던 그 증표. 그것은 틀림없이 히마와리가 행운의 여신이라는 증표일 것이다. 악마 따위가 아니라.
그때, 히마와리가 몸을 비틀더니 허리를 훌쩍 일으켰다. 사쿠라코와 여자의 대화가 끊겼다. 사쿠라코의 관심은 순식간에 히마와리 쪽으로 돌아갔다.
"히마와리! 정신이 들어?"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웃었다.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군요. 당신은."
"뭐?"
사쿠라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히마와리가 가리킨 '당신'은 사쿠라코의 옆에 서있는 여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사쿠라코가 들어와 있다는 것은 결국 막아내지 못했다는 의미.
"아, 아직 이 아이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
여자는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미 사쿠라코는 그녀와 히마와리의 관계에 대해 알아버렸다. 이제는 절대로 돌이킬 수가 없다. 히마와리의 눈가에 반짝이는 빛이 내려앉았다.
"이미 끝났어요. 사쿠라코는 지금 우리들의 일부가 된 거예요."
사쿠라코가 어금니를 깨물며 히마와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 야윈 손을 잡았다. 히마와리는 멍하게 사쿠라코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사쿠라코. 저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천사예요."
그렇게 말문이 트였다. 사쿠라코는 계속 굳은 눈빛으로 히마와리를 주시했다.
"당신을 따라다닌 건 당신을 축복해주기 위해서였고. 당신을 떠나려했던 건, 당신을 축복해주기 위해서는 당신이 저를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어요."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당신이 저를 알게 되면... 분명 아파하는 저를 도와주려고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한동안 불행해지니까. 저주에 걸려버리니까."
히마와리는, 자신이 벌을 받게 되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다만 사쿠라코가 잠시동안 불행한 시기를 보내게 될 것이라는 것이 괴로웠다.
사쿠라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넌. 넌 어떻게 되는데?"
히마와리가 사쿠라코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아픔을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났다.
"이제 시간이 됐어요."
그러자,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쿠라코는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침대를 잡고 버텼다. 여자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에선가 몸을 녹일 것 같은 강렬한 빛이 내려왔다. 사쿠라코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진동이 멎고, 빛도 사라졌다. 사쿠라코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곧, 눈 앞에 펼쳐진 이상한 세상에 몸이 굳어버렸다. 방금 전까지 히마와리의 방에 있었는데 갑자기 위인지 아래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새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사쿠라코."
그제서야 히마와리가 생각난 사쿠라코가 고개를 돌렸다. 히마와리는 하얀 날개를 공중에 뻗으며 사쿠라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높이에서.
야위었던 몸은 어느새 신성한 빛을 뿜고 있었다. 나무가 빼곡한 숲에 들어오는 잔잔한 빛줄기 같았다.
"고마워요. 당신 곁에 있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히마와리, 왜, 왜그래? 무슨 일이야? 이게 뭐야?"
"...미안해요."
히마와리가 날개를 한번 퍼덕이며 부드럽게 사쿠라코 앞에 다가와 사쿠라코를 끌어안았다. 어지러운 하얀 빛이 사쿠라코의 머릿속에서 멤돌았다.
"앞으로 사쿠라코는 저를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사쿠라코는 불행해질 거고... 원인 모를 불행을 하늘에게 한탄하겠죠."
"...."
"그게.... 숙명을 지켜내지 못한 천사와 모든 것을 알아버린 인간에게 주어지는 벌이에요."
"...아니야."
히마와리가 사쿠라코를 살며시 놓았다. 사쿠라코는 히마와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불행해진 것에 대한 분노를 절대 하늘에 돌리지 않을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거야."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는 곳마다 히마와리가 있었고, 히마와리가 궁금해졌고, 히마와리와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렇게 마주했다.
"난 너를 알게 된 걸 후회하지 않아."
이때까지 평온함을 유지하던 히마와리의 입술이 떨렸다. 사쿠라코는 불행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고 히마와리에게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앞으로 불행이 오더라도, 널 잊어버리더라도, 희망을 따라가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불행에 물들지만 않으면 너에게도 아무 일 없어. 분명."
"사쿠라코는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히마와리가 웃었다. 사쿠라코도 긴장된 표정을 풀고 웃었다.
"사쿠라코."
아직 인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따뜻한 손길이 사쿠라코의 뺨을 훑었다. 이후에 뭘 해야할지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것이라는 여자의 말의 의미를 드디어 알았다. 아무도 히마와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히마와리는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잘 알고 있었다. 히마와리는 그대로 사쿠라코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뜨거워졌다. 사쿠라코는 당황했지만 히마와리를 밀치지 않았다. 이상하게, 입술이 맞닿자 전에 없던 슬픔이 밀려왔다. 눈물이 흘렀다.
히마와리가 사쿠라코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사쿠라코의 눈물이 턱 끝에 매달렸다. 눈물은 멈출 기미가 없다.
"사쿠라코의 감정 하나만 가져갈게요. 아주 조금이니까 며칠 후면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니야. 가지 마. 사쿠라코가 입을 뻥끗하며 히마와리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히마와리는 날갯짓 한번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히마와리!"
사쿠라코가 히마와리를 향해 소리쳤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지?"
목소리가 갈라지려고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널 악마로 만드는 짓은 절대 안할거야!!"
히마와리가 사쿠라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쿄코가 숨을 몰아쉬며 사쿠라코 앞에 섰다. 사쿠라코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사쿠라코는 잠시동안 흐느끼지도 않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그러다 천천히 일어나서는, 주먹을 쥐고 가슴을 쥐어짜듯 괴로워했다. 마음이 허하다. 누군가가 마음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것 같다. 거센 파도가 커다란 바위 하나를 깎아놓듯이.
"...사쿠라코?"
쿄코가 사쿠라코를 부르자, 사쿠라코가 그제서야 쿄코를 돌아보았다.
"선배. 저, 방금 천사를 봤어요."
"....뭐?"
사쿠라코는 방긋 웃었다. 그러나 이내 입고리를 떨어뜨렸다.
"근데... 제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죠?"
사쿠라코가 눈물을 닦았다.
"방금, 제가 뭘 본거죠?"
쿄코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급하게 이 곳으로 뛰어들어왔는데, 무엇 때문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지? 우리는 왜 여기에 있지?
두 사람은 거리로 나왔다. 사람들이 마구 얽혀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쿠라코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까지 분명 주택이었던 것 같은데 사람이 많은 카페가 있었다.
"선배."
쿄코가 사쿠라코를 돌아보았다.
"더운데 아이스크림 하나씩 어때요?"
두 사람이 동시에 방향을 틀었다. 모퉁이를 돌다가, 사쿠라코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시선은 따갑지 않고, 어쩐지 햇살에 등이 따뜻해지는 어느 겨울같이 차분하다.
사쿠라코는 다시 쿄코를 따라 걸었다.
하늘은 맑고, 사람은 참 많은 여느 여름날이었다.
>(에필로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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