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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히마사쿠]천사를 보았다

후기 "천사는 이별할 때 자신이 보호하던 인간의 감정을 일부 빼앗아 간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고, 당분간은 평소대로 지낼 수 없게 된다." 제가 이 글을 계획하기 전에 떠올렸던 설정입니다. 이 두 문장으로 '천사를 보았다'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잊혀진 존재가 있지요. 저는 그 사람들이 어쩌면 천사는 아닐까, 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짧은 시간동안 행복을 주었고, 그리고 헤어질 때 감정을 빌려간 채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느낌이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로 인해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 더보기
(12) 천사를 보았다(完)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사쿠라코는 막대사탕을 입에 넣고 조용히 수평선을 건너다보았다.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유니폼. 너덜너덜해진 손바닥. 뒤엉킨 머리카락. 그러나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정돈을 하지 않았다. "사쿠라코, 음료수라도 마실래?" 동료 중 한명이 사쿠라코에게 음료수를 권했다. 마른 사쿠라코의 눈이 음료수에 닿았다. 음료수를 쥐고 있는 동료의 손이 잠깐 떨렸다. 사쿠라코는 이내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젓고는,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수군대는 소리가 떠밀려왔다. "무슨 일 있나? 며칠 전부터 계속 저기압인 것 같은데." "엄청 잘 웃었던 것 같은데. 사쿠라코 성격이 원래 저랬어?" "...잘 모르겠네." 사쿠라코는 텅 비어버린 가슴팍을 두.. 더보기
(11) 잠시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쿠라코는 전율했다. 전날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던 히마와리의 집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런 생각없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자, 도착한 곳은 히마와리의 집이었다. 마치 너는 여기에 도달해야 한다는 신의 계시처럼. 쿄코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전화로 했다간 소리를 지르면서 펑펑 울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심장이 벌컥벌컥 울렸다. 쿄코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볼까 했으나 바로 앞에 있는 마시멜로가 언제 사라질 지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현관 앞에 섰다. "히마와리."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부르자 이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히마와리! 안에 있어? 내 목소리 들려? 대답 좀 해봐!"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열리지 않는다면 열릴 때까지 문 앞에서.. 더보기
(10) 친구 누가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주먹으로 문을 치는 듯한 둔탁하고 강한 소리였다. 밤중에 누가 찾아올 일도 없고 섣불리 열어줬다가는 이상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자, 문을 열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쿄코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나갔다. "선배... 선배...." 누구세요, 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현관 너머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쿄코를 선배라고 부를 사람은 딱 한명 뿐이었다. 쿄코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사쿠라코?" "선배..." 사쿠라코가 힘없이 늘어진 모습으로 쿄코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문을 강하게 두드리던 힘은 어디에서 났는지.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그.. 더보기
(9) 마지막 의식 정말 놀랍게도, 사쿠라코의 팀은 선전했다. 정말 히마와리의 신 흉내가 먹히기라도 한 것인지 지금껏 해온 경기 중에서 가장 순조로운 경기였다. 그들이 두 점 앞서는 동안 상대팀은 한 점 따라왔고, 또 그들이 두 점 앞서가면 상대팀이 간신히 한 점 따라오는 격이었다. 사쿠라코의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사쿠라코는 장타는 물론이고 홈런도 두어번이나 날려 팀의 사기를 올렸다. 문득 건너다본 히마와리는 웃으면서 살짝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결국, 사쿠라코의 팀은 16대 9로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가벼운 승리였다. 역시 히마와리에게 지켜봐달라고 하길 잘했다. 이건 분명히 히마와리 덕분이라고, 사쿠라코는 생각했다. 뜨거운 환호와 격려를 받으며 상대팀과 악수를 하고 경기를 끝마쳤다. 사쿠라코.. 더보기
(8) 행운의 키스 연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쿠라코의 몸은 평소보다 훨씬 가벼웠다. 간절히 바란다면 우주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던가. 사쿠라코의 주변은 온통, 결국 결승에 이르게 되리라는 확신에 차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싱그럽게 불어오는 바람, 흘러가는 구름, 그리고, 지금 사쿠라코와 마주하고 있는 히마와리. 이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승리를 안겨줄 것만 같은 짙은 확신을 뿜고 있었다. "신나보여요." 히마와리가 맞은편에서 웃었다. 두 사람은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한잔씩 하고 있었다. 쿄코와 만났을 때는 장소를 바꿀까 생각할 정도로 지루하던 카페였는데,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편안하고 가슴뛰는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정말, 어느 순간부터. "우리 팀은 꼭 이길거야. 진짜로." "너무 확신에 차있다가 실패하면 상.. 더보기
(7) 꿈을 꾸지 않는 기분 낯선 향기가 났다. 늘 방에서 나던 쓰고 목이 막히던 냄새와는 다른. 덕분에 머릿속이 상쾌해졌는지, 눈이 절로 떠졌다. 찌뿌둥한 것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어깨도 더이상 욱신거리지 않았다. 천장이 똑바로 히마와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또다시 쓰러진 것일까. "몸... 좀 괜찮아?" 낯선 향기만큼 낯선 목소리였다. 히마와리는 발작을 일으키듯 일어났다. 사쿠라코는 어디가고, 긴 금발의 여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옆에 앉아있었다. "누, 누, 누구세요...?" "아, 난 이상한 사람 아니야. 사쿠라코의 선배인데...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 놀라지 않아도 된다는 건 누구 기준일까. 사쿠라코의 선배라는 사람은 히마와리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수건을 집어들었다. "잠깐, 빨아올게. 아직 열이 있어.. 더보기
(6) 하얀 파도 히마와리의 일상은 무서운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원래 혼자라서 그녀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쩌다가 반장이나 도서위원을 같이 하는 친구들이 안부를 물었을 뿐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히마와리의 자리는 창가에 있어서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수업에 집중하느라 바깥을 내려다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겠지만, 지난날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은 덕에 딴청을 피울 잔머리가 생겼다. 그녀는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사쿠라코네 반이 막간을 이용해 피구를 하려는 듯이 바닥에 새하얗게 금을 그어놓고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사쿠라코는 당연히 선택 1순위였다. 다들 사쿠라코를 데려가려고 벼르고 있었고, 사쿠라코는 웃으면서 양 팀을 말리고 있.. 더보기
(5) 임무 히마와리는, 어쩌면 자신이 한 줌의 먼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김 한번에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 작은 먼지. 본래 자신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히마와리를 태어나게 한 존재는, 히마와리가 어느정도 자랐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녀에게 하나의 형태를 주었다. 그는 히마와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따뜻한 빛 한 줌을 안겨주었다. '너는 머지않아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란다. 언제나 이 한 줌의 빛처럼 살아가라. 어디에 있든 생명들을 품을 줄 아는 마음을 지녀라.' 히마와리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끊임없이 히마와리를 성장시켰다. 그 빛을 받았을 때부터 히마와리는 어느 방에 갇혀서 지냈다. 그녀는 수도없이 내면과 외면을 탈.. 더보기
(4) 도와주세요 사쿠라코네 팀은 차근차근 우승을 거머쥐어갔다. 히마와리와 그렇게 결론을 지은 이후로 사쿠라코는 별 사념 없이 발야구에 집중했다. 히마와리가 찝찝하다가도 공을 잡으면 곧바로 공에 집중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사쿠라코는 여전히 발야구에 열정이 있었고, 실패하기 싫었고, 무엇보다도 졌을 때 자신을 증오하게 되는 순간만은 피하고 싶었다. 결승이 두 단계정도 남았다. 사쿠라코는 푹 쉬라는 감독님과 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학교 체육관에 남았다. 학교 체육관은 제일 안쪽에 있어서 수업이 끝나고 저벅저벅 걸으며 잡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았다. 정문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었다. 사쿠라코는 한 쪽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실내화를 찍찍 끌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생각없이 쭉 걸어 체육관 앞에 도착해서 모래가 묻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