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놀랍게도, 사쿠라코의 팀은 선전했다. 정말 히마와리의 신 흉내가 먹히기라도 한 것인지 지금껏 해온 경기 중에서 가장 순조로운 경기였다. 그들이 두 점 앞서는 동안 상대팀은 한 점 따라왔고, 또 그들이 두 점 앞서가면 상대팀이 간신히 한 점 따라오는 격이었다. 사쿠라코의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사쿠라코는 장타는 물론이고 홈런도 두어번이나 날려 팀의 사기를 올렸다. 문득 건너다본 히마와리는 웃으면서 살짝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결국, 사쿠라코의 팀은 16대 9로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가벼운 승리였다. 역시 히마와리에게 지켜봐달라고 하길 잘했다. 이건 분명히 히마와리 덕분이라고, 사쿠라코는 생각했다.
뜨거운 환호와 격려를 받으며 상대팀과 악수를 하고 경기를 끝마쳤다. 사쿠라코네 팀의 기세는 운동장 너머 주변 동네까지 장악할 정도로 거셌다. 이대로라면 결승도 문제 없을 거라고 여유롭게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사쿠라코는 또다시 히마와리에게 눈을 돌렸다.
그런데, 히마와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서둘러 대기실로 돌아와 휴대폰을 켜자, 짧은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결승으로 올라간 거 축하해요. 그리고 먼저 가서 미안해요. 일이 생겨버렸어요. 끝나면 연락 드릴게요.'
별 일 아닐거야. 일이 좀 생겼을수도 있지. 경기는 끝까지 봤잖아.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히마와리가 준 승리의 증표에 손을 갖다댔다. 증표는, 어느새 그녀와 하나가 된 듯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사쿠라코의 경기는 전에 없이 히마와리를 열정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히마와리는 자신의 의무에 대해서만 생각해왔었는데 사쿠라코의 당당한 모습과 결국 쟁취해 낸 승리에 그녀의 가슴도 덩달아 뛰고 있었다. 처음 써본 증표가 다행히 효과를 본 것 같았다. 천사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권리였다. 다시 쓰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만.
사쿠라코의 이마에 입을 맞출 때는, 축복해주는 명목이었지만 어쩐지 쑥스러웠다. 결국 급하게 얼버무리며 집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사쿠라코가 경기 중간 중간에 이쪽을 바라볼 때 그 생각이 나서 자꾸 고개가 숙여졌다. 좀 더 평범한 방법으로 할 걸 그랬나. 다음부터는 부적을 만들어줘야겠다.
결국 사쿠라코의 팀이 승리하고, 상대편과 인사하기 위해 경기장 중앙으로 모이고 있을 때였다. 경기가 완전히 끝나면 사쿠라코를 기다렸다가 맛있는 음식이라도 사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히마와리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인 줄 알고 다리를 바짝 끌어당겼는데, 앞 의자와 히마와리 사이에 충분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좀처럼 지나가질 않았다. 뒤에 사람에 보이지 않을까봐 걱정되던 찰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구나? 저 아이를 축복해주고 있는 천사가."
화들짝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자, 짙은 자주색의 여자가 히마와리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채.
히마와리는 급하게 여자의 손목을 잡고 경기장 밖으로 끌고 나왔다. 곧 사람들이 쏟아져나올 경기장 근처는 위험했다. 꽤 거리를 두고 사람이 드문 골목길에서 여자와 다시 마주했다. 여자는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건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제가 천사인 건 어떻게... 혹시 당신도 천사인가요?"
"내가 기억 안나나보구나? 그때 너네 집에서 만났었는데."
여자가 히마와리 쪽으로 더 바짝 다가왔다. 순간, 그 분위기와 말투가 그녀의 지난 기억을 헤집었다. 발바닥만 보이던 천사. 히마와리에게 '나처럼 되지 않게 조심해.'라는 말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그 천사였다. 오늘은 평범한 인간처럼 제대로 꾸민 상태였다.
"심증은 있었는데 물증이 없어서. 근데 이렇게 알게 돼서 다행이랄까."
"무슨... 지난번부터 대체 저에게 왜...."
"너. 지금 위기야."
여자가 슬쩍 히마와리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이제 얼마 안남았어. 지금까지의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찾아올거야. 그게 마지막이야. 그런데, 그 기간에는 절대로 저 아이를 만나서는 안돼."
"그러니까 왜, 대체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냐구요."
그 눈빛이 갑자기 일렁였다. 여자는, 힘없이 손을 떨구었다.
"너는 나처럼 되지 말라고."
"...그러니까 대체 영문을..."
"너는 몰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나 하나 때문에 무너지는 걸 보는 심정이 어떤 건지."
히마와리는 여자가 기생천사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 여자가 웃었다.
"알아차렸을거라고는 생각했어. 네가 생각하는대로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 인연도 없는 나에게 일일이 조언을 해주러 오는 걸까. 히마와리는 여전히 그게 궁금했다. 여자는 히마와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저 아이마저 불행해지면 안돼."
저 아이라면 분명 사쿠라코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집으로 들어가. 그리고, 나오지 마."
히마와리가 우두커니 서있자, 여자는 돌아섰다.
"선택은 너에게 맡길게. 근데... 제발 내가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돌아선 그 모습이 많이 쓸쓸해보여서 히마와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는 여러가지로 착잡한 히마와리의 표정에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내가 지켜주던 아이에게 유일하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 있는 아이야."
히마와리가 놀라며 숨이 멎은 채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뭐라구요? 그럼... 당신이 지켜주던 인간은 사쿠라코가 아는 사람이란 말인가요?"
"너도 아는 사람이야. 최근 만났을 걸."
여자는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무너져내릴 듯한 슬픔이 몰려온다.
"그 아이는... 나의 한순간의 이기심 때문에 불행해졌어. 이제 더 이상의 불행은 없어야 돼."
히마와리는 갑자기 여자를 아무 말 없이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러나, 평온해보이던 여자 주변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쳐왔다. 저번에 집에서 봤을 때와 같은 기운이었다. 그 검은 것은 여자의 자책과 집념임에 틀림없다.
순간, 히마와리는 쿄코에게서 느꼈던 쌉싸름한 피 냄새를 기억해냈다. 쿄코 것이 아니라고 느꼈던 이상한 검은 기운과 함께.
"부탁해."
여자는 그 말만 남기고는, 저번과 같이 빛에 싸여서 사라져버렸다. 여자가 사라진 거리는 적막에 싸였다. 히마와리에게는 사쿠라코와, 어쩌면 사쿠라코의 주변에 있을 기생천사의 친구를 지키는 일이 추가되었다. 우선 쿄코-아직은 추측일 뿐이지만-를 지키는 일보다 사쿠라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생천사가 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히마와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사쿠라코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쩌면 마지막일수도 있는 문자를.
서둘러 집에 돌아와 히마와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급적 많은 음식을 사두는 것이었다. 마지막 고통이라고 했다. 마지막인만큼 분명 훨씬 크고 질기게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히마와리는 어느새 그 여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언가를 듣게 된 이상 두 다리를 뻗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침대의 이불을 정돈하고 그 옆에 음식을 나란히 쌓아두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냈을 때,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충고를 들어줘서 고마워."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히마와리는 말없이 우두커니 앉았다. 또 창밖 어딘가에서 말을 걸어오는 게 틀림없다.
"어차피 고통이 너무 커서 음식 생각도 안날텐데. 많이 사뒀네."
"......."
"당분간 그 아이가 여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가 감시할게. 그 아이가 뭐라고 해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면 안돼."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그러자, 여자가 홀연히 사쿠라코 앞에 나타났다. 기생천사가 되면 인간도, 천사도 아닌 형태로 세상을 떠돌게 된다는 말은 정말인 것일까. 그 검은 집념과 후회처럼 끝없이 괴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겠지.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와 자신의 최후를 떠올렸다.
"만약 휴대폰으로 사쿠라코에게서 연락이 오면 나 대신에 대답해줘요."
"어떤....?"
"그냥... 당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해주세요. 어떻게 대답해도 제 대답보다는 사쿠라코를 위한 것이라고 믿을게요."
"전화는 못받아."
"네. 전화는 받지 마세요."
여자는 히마와리의 휴대폰을 받아들더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직접적인 도움은 받을 수 없어도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안심이 되긴 했다. 사쿠라코와 연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무겁지만.
'사쿠라코는 앞으로 연락도 없고 학교도 나오지 않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집으로 찾아올까? 의외로 전화 한통 없을 수도 있다. 배신감을 느끼고 히마와리를 잊으려고 할 수도 있다. 히마와리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고통이 끝나고 날개가 돋아 완전한 천사로 거듭나면 그녀는 곧바로 이 학교와 동네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사쿠라코를 안전히 보호해줄 수 있다. 더 이상 엮이게 되면 결국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지난날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그 싹은...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사쿠라코에게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반나절이 흘렀다. 사쿠라코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이쪽를 믿고 기다려 줄 생각인 걸까. 그런 믿음은 얼마나 갈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마지막 시련은 언제 찾아오는 건지, 여자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여자는 내내 방 구석에서 휴대폰만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사쿠라코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문득, 결승전은 언제인지 궁금해졌다가, 마음 깊숙히 묻어두었다.
무료한 시간이 계속 지나갔다. 이대로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건 어쩐지 시간 낭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이라도 틀까. 지역 방송을 틀자, 며칠간 문명과 단절되어 있던 히마와리에게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앵커가 계속해서 지역 뉴스를 전했다. 짧은 타이틀이 자막으로 떴다.
타이틀은, 사쿠라코의 학교가 다음주에 지역 발야구 경기 결승전을 치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아...."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발 끝에서부터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바닥을 붙잡고 신음하자, 여자가 서둘러 히마와리의 앞에 나타났다.
"시작됐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아서는 안되기에 스스로 침대에 올라가야 했다. 쏟아지는 하얀 고통에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곧 먹은 것을 다 토해낼 것만 같았다. 금방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고통만 버텨. 나머진 내가 해결해줄게."
여자는 힘내라면서 히마와리의 앞에서 사라졌다. 앞으로 사쿠라코가 히마와리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막아줄 것이다. 베개를 꽉 붙잡고 숨을 쉬려고 노력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사쿠라코의 모습이 떠오르려던 찰나, 하얀 파도가 히마와리를 의식의 저편으로 데려가버렸다.
>(10)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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