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주먹으로 문을 치는 듯한 둔탁하고 강한 소리였다. 밤중에 누가 찾아올 일도 없고 섣불리 열어줬다가는 이상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자, 문을 열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쿄코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나갔다.
"선배... 선배...."
누구세요, 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현관 너머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쿄코를 선배라고 부를 사람은 딱 한명 뿐이었다. 쿄코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사쿠라코?"
"선배..."
사쿠라코가 힘없이 늘어진 모습으로 쿄코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문을 강하게 두드리던 힘은 어디에서 났는지.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그래?"
"히마와리가... 또 쓰러졌는지 연락이 없어요...."
이제는 울먹이기까지 했다.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 쿄코는 우선 사쿠라코를 집 안에 들였다. 시원한 차를 갖다주자, 사쿠라코는 차에 눈길도 주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아니지... 사실 연락 많이 했어요."
"아... 미안해. 내가 요즘 정신이 좀 없어서 연락을 잘 못받았어."
사쿠라코가 코를 한번 훌쩍였다.
"준결승, 이겼는데... 이제 다음주면 결승인데... 히마와리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다는 말만 남기고 그 뒤로 연락이 없어요..."
쿄코가 문자를 건내받았다. 사쿠라코는 쿄코에게 히마와리가 경기를 보러 왔었고,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준결승으로부터 벌써 이틀이 지난 상태였다. 쿄코는 머리를 긁적이며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전화도 안받아?"
"네..."
"집에 찾아가봤어? 히마와리 집 알잖아."
"그게...."
사쿠라코가 얼굴을 감싸쥐었다.
"히마와리 집이...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나요...."
분명, 사쿠라코는 히마와리 집에 몇번 다녀왔다. 준결승 당일만 해도 찾아가서 히마와리의 상태를 확인했을 정도로 쉽게 잊어버릴 장소는 아니다. 그런데 사쿠라코는 히마와리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것처럼, 모두 남아있는데 히마와리의 집만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쿄코는 사쿠라코의 설명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잊어버렸다?
"잘 생각해봐. 너무 당황해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잊어버릴 이유가 없어요... 정말, 그럴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누가 제 머릿속에서 히마와리 주소만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새하얘요. 아무것도 없어요..."
히마와리가 걱정되는데 찾아갈 수가 없다. 그 사실이 사쿠라코를 이틀 내내 미치게 만들었다. 운동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학교에도 히마와리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라도 히마와리가 나타날까봐 교실에서도 계속 기다렸고, 도서관도 매 시간마다 들렀다. 그러나, 히마와리는 이틀째 결석 중이었다.
사쿠라코는 히마와리가 다시 쓰러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을텐데.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혹시, 길거리에서 쓰러진 거 아닐까요? 그걸 누가 데려다가..."
"진정해. 아닐거야.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마. 무사할거라고 생각해야지, 자꾸 파고들면 답 없어."
사실 쿄코도 히마와리가 쓰러져서 연락을 못하고 있다는 것에 한표를 던졌다. 예전에 사쿠라코를 도와 히마와리를 옮겼을 때 히마와리가 정신을 잃은 정도는 상당히 심했다.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었으니까.
"다시 처음부터 해보자. 밖으로 나가서 걷다보면 생각날거야."
쿄코는 방에서 옷을 걸치고 사쿠라코와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우선, 사쿠라코의 집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사쿠라코는 갇혀있다가 나온 강아지처럼,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나서다가도 길이 나눠지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멈춰서버렸다. 여러차례 사쿠라코의 집과 거리를 반복해봤지만 단순히 깜빡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만 확실해질 뿐이었다.
사쿠라코는 고개를 떨구었다.
"틀렸어요. 더 이상은..."
쿄코가 해줄수 있는 것은 사쿠라코를 감싸안아주는 것 뿐이었다.
히마와리가 눈을 떴다. 온 몸이 부서질 듯이 조여오던 고통이 잠시 잠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 여자가 앉아있었다. 여자는 히마와리를 보더니 손을 들어 살짝 인사했다.
"안녕. 나흘만이야."
4일동안 계속 누워있었단 말인가. 몸을 일으켜보았다.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목소리를 가다듬어보았다. 오랫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아서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팔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목도 살짝 돌려보았다. 뻐근할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고통에도 잠시 휴식이 있더라고. 이 틈에 음식도 좀 먹고 샤워도 하는거야."
"...사쿠라코는..."
여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이틀째까지는 연락이 엄청 오더니, 이젠 안와. 포기했나봐."
"그렇군요..."
이렇게 되기를 바랐지만 정말 나를 잊어버린 걸까. 내심 서운해졌다. 히마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상의를 탈의하고 몸을 옆으로 비틀어 거울을 보았다. 어깨죽지 쪽이 여전히 새파란 멍으로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며칠 전보다 색이 더 짙어졌다. 조만간 살을 뚫고 날개가 나오겠지. 그렇게 되면, 이제 인간의 모습으로 살 필요가 없어진다. 견딘 자만이 천사가 되어 인간을 보살필 수 있다. 이 고통만 이기면 돼.
따뜻한 물이 몸 곳곳을 훑었다. 산뜻한 비누로 온 몸을 칠하고 씻어내니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히마와리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여자가 먹을 것을 조금 주었다. 이 영양소들이 다시 찾아올 고통을 견디게 해줄 것이다.
"그런데, 사쿠라코에게... 대체 어떻게 했길래 더이상 연락이 없는거예요?"
인간의 몸도, 천사도 아니라 배고플 일이 없는 여자는 저만치 떨어져서 히마와리를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그냥, 기억에 손을 좀 댔어."
"기억... 이요?"
"아주 잠시만이야. 네가 마지막 허물을 벗었을 때 쯤이면 기억나게 될걸. 뭐, 그 기억도 조만간 사라지겠지만."
히마와리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여자가 본격적으로 설명해 줄 각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사가 왜 인간이랑 깊게 접촉해서는 안되는지. 그 이유도 모르나보네."
"......."
"그 이유는 말이야. 천사는 어차피 인간의 기억에서 지워져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야."
천사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이유는, 탈피 때문이다. 여러차례 탈피를 견디는 과정을 통해 천사가 될 재목을 고르는 것인데, 천사가 되든 못되든 우선적으로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더이상 인간 세계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여자의 설명이었다.
"근데, 만일 천사가 될 재목이 인간과 너무 깊게 지내서 그 인간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면?"
히마와리는 어느새 여자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건 네가 천사가 된 이후에 들려줄게."
히마와리가 긴장되었던 표정을 풀며 탄식했다.
"지금 알려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어차피 본능적으로 알게 돼. 지금 알아봤자 썩 유쾌한 것도 아니라서. 그 때 알아봐."
실컷 얘기해 놓고선 나중에 알아보라니. 히마와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밥을 먹는 동안, 여자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천사가 되든 기생천사가 되든 반드시 거쳐야하는 단계. 인간과 멀어지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그런 상처를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히마와리는 사쿠라코 앞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의 곁에 너무 오래, 깊이 머물러버렸다.
'잘 자.'
쿄코가 사쿠라코에게 마지막으로 짧게 답장을 보냈다. 사쿠라코는 부쩍 쿄코에게 연락을 자주 해왔고, 사쿠라코의 사정을 안 이상 쿄코도 더이상 부재중을 띄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발야구 시합에 집중해야 할텐데. 너무 엉뚱한 곳에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사쿠라코를 위해서라도 쿄코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쿄코는 침대 위에 누워서 얼마 있지 않아 깊은 잠에 빠졌다. 쿄코의 장점이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 뒤에 쿄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언가에 끌리는 듯이 슬리퍼를 신고 베란다로 나갔다. 눈에는 힘이 반쯤 풀려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이, 쿄코는 계속 난간에 팔을 걸치고 서있었다.
몇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나와있네?"
쿄코는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보는 사람이었으나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안녕? 오늘도 역시 내 이름은 기억 못하겠지?"
높은 톤, 묶은 머리, 생김새를 봐서는 여자다. 그녀는 쿄코의 옆에 와서 똑같이 난간에 팔을 기댔다.
"매일 알려주고 있는데 말이야. 가끔은 내가 네 기억에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조금 의심이 들 때도 있어. 이렇게 쉽게 잊어버리다니."
여자는 알 수 없는 말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쿄코는 매우 익숙하게 그 말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잠자코 있는 쿄코를 지그시 바라보던 여자가 빙긋 웃었다.
"오늘은 어떤 고민이 있어?"
아.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인가.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구나. 쿄코는 빠르게 납득했다. 아마 꿈이라는 공간의 장점일 것이다.
"친구가... 제일 소중한 친구가 상처를 받고 있어."
여자가 흠칫,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친구? 무슨 친구?"
"오오무로 사쿠라코. 그 애가, 드디어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는데. 그게 깨지고 있어. 신의 장난인가, 싶을 정도로."
"신의... 장난? 하하, 그 신 정말 못됐구나?"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 역시 어색했다. 다음 순간, 쿄코가 여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본인도 인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지? 내 친구 괴롭히고 있는 게. 어서 놔줘. 아니면, 당신을 영원히 저주하고 미워할 거야."
.
.
.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손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으으~ 상쾌하게 잘 잤다."
쿄코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었다. 몽유병이 있는 건지 신발을 신고 있는 채로 잠에서 깨거나, 분명 방 정리를 해뒀는데 어질러져있는 경우는 가끔 있었지만 적응하니 별 일 아니었다. 가끔 저녁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들어 집으로 달려오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가스 밸브를 열어두고 왔다던가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을까봐 흔히들 하는 걱정이려니 했다.
알람을 끄고 보니 사쿠라코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지도도 함께였다. 그 문자를 잠시 들여다보던 쿄코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선배! 저 지금 히마와리 집 앞이에요!'
>(11)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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