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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Bang Dream

[히나아야]나는 우리가 진심이 되길 바랐다. (上)

  히나, 나는 아직도 네가 있던 그 날의 악몽을 꾸고 있어.

 

 

 

 

  파스파레의 수영장 촬영 날에, 준비운동을 하지 않고 깊은 물에 들어갔던 게 화근이었다. 튜브에 올라탄 상태로 화보를 찍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튜브가 기우뚱하더니 물에 그대로 빠져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다리에 갑자기 힘을 준 탓에 근육이 놀라 쥐가 나기까지.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없이 물을 먹다가, 멤버들 이름을 외쳤다가, 물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무언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지상이었다.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속도 메슥거리고 어지러운 와중에, 구해준 사람이 나를 바닥에 눕히더니 힘껏 가슴을 압박했다. 숨이 조여오면서 급하게 기침을 하면서 눈을 떴는데, 갑자기 그 얼굴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목을 뒤로 젖히고 입술을 부딫혀왔다. 입 안으로 뜨거운 숨이 흘러들어왔다. 놀라서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자, 앞에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와, 너를 말리는 멤버들이 있었다.

 

  "히나, 인공호흡은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하는 거야. 아야는 의식이 있잖아."

  "급한 건 알겠지만요, 의식 확인은 필수입니다, 히나 씨!"

 

  치사토와 마야가 너를 다그쳤지만 너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이 나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시간이 멈춘 듯이 너와 닿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너는 치사토와 마야의 잔소리가 다 끝나자 그제서야 천진하게 웃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정말 걱정했나 싶을 정도로 해맑은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내 상태를 체크하러 온 스태프들이 이것저것 물어오는 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귀가 멍해졌다. 아, 쓰러지려나. 그러나 네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뿐, 나는 다시 힘차게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멀쩡했다. 네가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멤버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나는 너에게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악몽과도 같은 나날들이 계속된 건.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갔을 때 어쩐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이 힘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겁을 너무 많이 먹어서 후유증이 생긴 걸수도 있겠다. 아침에 등교해서 축 늘어져있으니 문득 보이는 민트색 머리카락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마루야마 씨. 어디 아픈가요? 안색이 안좋네요."

 

  그렇게 말하며 손이 다가오자, 갑자기 네 얼굴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그 손길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했을 사요에게 멋쩍게 웃어보이며 사과했다.

 

  "아, 미, 미안해."

 

  너와 똑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요는 진지하게 내 얼굴을 훑어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후유증...일지도 모르겠네요. 히나에게 들었어요. 물에 빠져서 큰일날 뻔 했다고..."

  "아, 히나가 말했어? 그랬구나~ 지금은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 맞나요?"

 

  가만히 사요를 보고있기엔 너무 괴로웠다. 또 네 얼굴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질까봐,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참 이상하다. 평소에는 그렇게 닮았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데. 왜 이제와서 모든 게 너처럼 보이는지.

 

  "괘, 괜찮아! 멤버들도 신경써주고 있고, 앞으로 나름 케어도 받을 거라서...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혹시 모르니 힘들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뭐든 할테니."

 

  사요는, 너와 너무나도 닮은 너의 언니는 곧 내 옆자리를 떠나갔다. 제 자리에 앉는 사요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사요는 참 친절했다. 너와는 다르게...라고 말하면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서 네 언니의 자랑을 할지도 모르겠다. 사요가 나를 도와주고, 그 따스함을 느낄수록 나는 어쩐지 더 쓸쓸해졌다. 나를 몰라주고 나를 타박하던 네가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진심이 될 수는 없었던 걸까? 화장실 거울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루야마 아야, 그러는 너는 히나에게 진심이었니?

 

 

 

 

  "몸은 좀 괜찮아?"

 

  연습실에서 네가 물었다. 아직 다른 멤버들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치사토는 잠시 다른 스케쥴 때문에 불려갔고, 이브는 학교 청소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 했다. 마야도 버스를 놓쳤다고 했고. 마치 나와 히나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려는 듯이 모든 것들이 척척 비켜주고 있었다.

  나는 하루종일 사요의 배려가 잔뜩 묻어난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왜 준비운동을 하지 않았냐며 바보 취급을 하겠지. 어제는 내가 너무 아파보이니까 차마 할 수 없었던 거고. 나는 너의 말을 기다렸다. 가시 같은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더불어 세상 모르는 너의 웃음도.

  그러나 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어제는 갑자기 인공호흡해서 미안해. 너무 급했나봐. 입술, 괜찮아?"

 

  너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네가 말한 것들이 하나하나 흩어져서 느리게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그 말을 전부 조합해보고 나서야,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입을 가렸다. 맞아, 인공호흡을 한 건 너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앞에 서있는 바로 너.

 

  "음, 첫 입맞춤이 내가 된 거야? 그것도 좀 미안한데~"

  "아, 아, 아니야! 그런 건, 저기..."

  "앞으로 그 몫까지 있는 힘껏 아야를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까. 나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헤헤 웃고만 있는 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곧 너의 웃음소리가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고, 나는 너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급하게 생각을 휘저으면서 벗어나긴 했지만 멍한 기분은 여전했다. 너는 웃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얹었다.

 

  "아직도 아픈 것 같은데... 이따가 병원 갈 거지? 같이 가줄까?"

  "아, 아니야, 괜찮..."

 

  거절하려고 했는데, 너의 표정이 너무나도 가여웠다. 그렇게 해맑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짓밟던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인 걸까.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그래줄래?"

  "응, 당연하지!"

 

  네가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멤버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웃었다. 나는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처음으로, 너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너는 생각보다 웃는 모습이 예쁘고,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게 거리낌이 없으며, 무엇이든지 용기가 앞섰다. 과연,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만 하구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렇게 비참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저 이렇게 있어줬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네가 언젠가 그 용기와 웃음으로 다시 나를 살리러 와준다면, 기꺼이 그래도 좋다며. 이 자리에서 너를 기다리고 싶어졌다.

 

 

 

 

  이 감정이 얼마나 갈까? 나는 나 자신과 내기를 하기로 했다. 분명 뜻밖의 일을 겪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워서 그런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히나가 원망스러워질 날이 올 걸? 아니야, 지금 너는 히나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히나에게서 도망치지 마, 네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 봐. 두가지 생각이 충돌하면서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와중에 한 달, 두 달이 지날수록 너를 향한 이상한 마음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음을 느꼈다. 너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는 나를 물 속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나는 숨이 막히고 곧 죽을 것 같으면서도 너를 따라 계속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을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밴드 연습이 없는 한가한 주말,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히나, 시간 괜찮으면... 이따가 나랑 영화 보지 않을래?]

 

  이미 티켓도 두 장 구해놓았다. 너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같이 가자고 할 게 뻔하기 때문에. 이건, 그저 내 마음을 확인해보는 절차일 뿐이다.

 

  [아, 드디어? 좋아, 갈게!]

 

  네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는데 어딘가 찝찝했다. 드디어, 라니. 대체 뭘까. 조금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영화관 앞에서 긴장한 채 너를 기다리다, 나와 비슷하게 변장을 하고 나타난 네 모습에 조금 웃었다. 조금 어색한 선글라스와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포니테일에 아이도 어른도 아닌 중간 정도의 패션센스. 영화 제의는 우리에겐 무리였을까. 그러나 사람이 워낙에 많기도 했고, 어쨌든 우리는 이번만큼은 고등학생일 뿐이니 크게 눈에 띌 일은 없어보였다.

 

  "어서 가자!"

 

  여전히 풀리지 않는 긴장은 네가 먼저 뻗어온 손을 맞잡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정체를 들킬까봐 걱정이 되어서일까. 너에게 끌려가다시피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벅찬 한숨이 새어나왔다. 끝도 없는 터널 안을 너와 단둘이 걷게 된 것만 같았다. 이렇게 언제까지고 손을 잡아주며, 무섭지,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고 웃어주는 너. 영화관 좌석에 앉고 광고가 나오자 너는 내 손을 놓았고, 그제서야 나는 깊은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원래부터 터널에는 나 혼자 들어가 있었으니까. 긴장과 설렘을 지우고 영화에 집중했다.

  우리가 본 영화는 흔하디 흔한 주인공의 성장을 다룬 내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이 잘 안풀리던 아이가 자신의 꿈을 잃지 않아서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 평소 같았으면 내 이야기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을 텐데 이번에는 내용이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나에게 영화를 대입시키기보다는, 우선 너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자유로운 너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를 평가받는 것이다.

 

  "흠~ 내용은 별 거 없었네."

 

  영화를 다 보고 카페에 들어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에서 네가 음료수를 한모금 들이키면서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야다운 선택이었달까? 난 좀 더 파팟!하고 루루룽!한 걸 기대했는데 말이야~"

  "그, 그랬구나... 별로 재미없었어?"

  "재미없었다기보단... 아야가 별로 흥미 없어하니까, 나도 별로였는 걸."

 

  에? 응? 나는 음료수를 마시려다 말고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또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옆에서 우는 아야를 기대했는데 울지 않아서 좀 아쉬웠달까? 다음에는 내가 영화 골라도 돼? 완전 슬픈 걸로 골라야지!"

 

  평소 같았으면 장난스럽게 웃으며 너무하다고 했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너의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칠 수가 없었다.

 

  "내가 울었으면 좋겠어?"

  "음~? 표정이 재밌잖아~ 원래 사람은 표정이 변해야 새롭다구."

 

  그렇게 말하던 너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활짝 웃었다.

 

  "아, 요즘 아야는 좀 룽해서 좋아!"

  "....응? 내가?"

  "새로워! 나를 보는 눈빛이 특히!"

 

  급하게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아직 얼마 마시지 않은 음료수가 흔들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컵 밖으로 넘쳐흘렀다. 너는 나를 살피기보다 흘러넘친 음료수를 닦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하하, 아야는 바보네~ 혹시 팔 삐끗한 거야? 하면서. 힘없이 늘어져있는 내 손을 들고는 내 손에 묻은 음료수도 닦아주었다.

 

  "....히나..."

  "응~?"

  "예전에 그 사건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거지?"

  "사건?"

  "내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해줬었잖아."

  "아, 우리 첫 뽀뽀?"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였지만 아마 빨개진 얼굴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너는 참... 천진난만하다. 사람 속도 모르고.

 

  "으응, 그래, 그거..."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응?"

 

  순간, 카페에 있던 많은 사람이 지워지고 너와 나만 남았다. 네가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내 손을 잡아왔다. 나도 모르게 뻣뻣하게 네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늘 바라만 보았던 너의 손가락이 들어온다. 내 손을 뱀처럼 감아올린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아, 갑자기 영화 내용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이, 나는 뒤늦게 감성에 젖었다. 순식간에 메말라있던 잔뜩 긴장난 눈에 눈물이 차올랐고, 머릿속은 그 날의 수영장 물이 차오르고 있었으며, 내 손가락 끝에서부터는 네가 나에게 입맞췄던 순간이 차오르고 있었다. 너의 눈빛을 보고 확신했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히나... 나, 히나를 좋아해. 아주 많이."

 

  너는 내가 간신히 끼워맞춘 말을 받더니 싱긋 웃으면서 내 눈가를 훔쳤다.

 

  "지금 표정 엄청 룽해~"

 

  그리고, 그 날과 똑같이 얼굴이 다가왔다. 나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아주 짧지만 따뜻하게 너의 입술이 스쳐 지나갔다.

 

  "기다리고 있었어."

 

  숨이 막혔다. 너의 눈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꿰뚫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진심을 찾기도 전에, 바보 같이, 참고 있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결국 엎드려서 엉엉 울어버렸다. 너는 내 등을 달래주면서 계속 웃었다. 어, 울어? 여기서 울면 얼굴 퉁퉁 부어서 못생겨질 텐데~ 아, 그러면 사람들이 못알아볼 테니까 좋으려나? 그러나 그 끝은, 너의 따스한 품이었다. 너는 울고 있는 내 위에 몸을 포갰다. 울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주려는 듯이,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나는 팔을 들어 네 허리에 손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너에게 진심이 되었을까.

 

 

 

 

 

 

 

 

***

 

  "나는 아야 데려다주고 갈게~"

 

  히나가 아야의 팔을 잡으면서 파스파레 멤버들에게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히나가 아야를 과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소속사 안에서 작은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였다. 예전에는 그렇게 서로 안맞는 것처럼 굴더니, 요즘은 잘 지내서 재미있고 귀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창피함은 오롯이 아야의 몫이었지만.

 

  "그, 그렇게 이야기하면 다들 오해하잖아..."

  "사실인걸, 뭐. 아야는 아직도 자신이 없는 거야?"

 

  또, 얼굴을 들이밀고 그렇게 슬퍼하는 척을 하면... 아야는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으면서 히나의 손을 잡았다. 히나는 아야의 손을 앞뒤로 흔들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던 아야는 지는 해에 히나의 그림자와 자신의 그림자가 겹치는 것을 보았다.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에 먹히기도 하고, 때로는 떨어지기도 하면서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러고보니 악몽 같던 시간들이 끝났는데. 이제 정말 행복할 일만 남은 걸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히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들었다. 조금 앞서 걷던 히나가 문득 아야를 돌아보았다.

 

  "응? 왜 그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멎었다. 히나는 아야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걱정 있어?"

  "아, 아니, 그냥..."

 

  아야가 히나와의 시선을 피하자, 히나는 더 집요하게 아야를 향했다.

 

  "걱정이 있는 얼굴인데? 말하지 않으면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구."

 

  그래,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아야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히나, 우리... 이렇게 잡은 손이 언제까지 갈까?"

 

  히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야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마 질렸다는 표정일 것이다. 줄곧 불안해하기만 하면 히나도 많이 피곤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늘 이렇게 어리광부리고 한숨만 짓고 있다니. 방금 전의 말을 되돌리고 싶다.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어.

 

  "아야, 잠깐만 이리 올래?"

 

  히나가 꼭 잡은 손 그대로 아야를 이끌었다. 아야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지만 히나의 얼굴과 마주할 수는 없었다. 히나는 무언가가 급한 듯이 큰 보폭으로 빠르게 걷고 있었고, 아야는 간신히 그 뒤를 쫓을 뿐이었다. 히나가 이끌고 간 곳은 근처 공원이었다. 한쪽 구석에 큰 테니스장이 있고, 테니스장 바로 옆에는 나무가 우거져있는 좁은 틈이 있었다. 히나는 그 쪽으로 아야를 이끌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야는 발을 멈추지 못하고 앞서있던 히나에게 안겼다. 주변에는 테니스 공이 바닥에 튀는 소리와, 나무에 매달려 지저귀는 새소리 뿐이었다.

 

  "진짜, 바보네~ 그런 건 생각하는 순간부터가 시작이라구."

 

  표정이, 보이지 않아. 아야가 히나를 올려다보려고 하자 히나의 손이 아야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룽하지 않아."

  "...미, 미안해."

  "그런 말도."

 

  아야의 얼굴을 꼭 안고만 있던 손이 살짝 풀리더니, 이내 히나의 얼굴이 아야의 시선과 숨을 막아왔다. 인공호흡보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드는 느낌에 몸을 움찔거리며 히나의 어깨를 잡고 벗어나보려고 했지만 히나의 팔은 너무 억셌다. 무거운 기타를 계속 들어서 그런 걸까, 어디에서 몰래 운동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곧 숨이 가빠져오자 그제서야 히나의 팔에 힘이 풀렸다.

 

  "금지야, 알겠지?"

 

  아야는 다시 그 날로 돌아간 듯,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멍하게 히나를 바라보았다. 히나도 말없이, 아무런 표정 없이 아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정도 숨이 진정되고 나서야 히나가 입을 열었다.

 

  "키스, 조금 일렀을까?"

 

  여전히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은 아야가 한참 지나서야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 아니!! 그럴리가!"

  "좋았어?"

  "....그건...."

  "으응~?"

  "응..."

 

  히나가 투박하게 아야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다시 평소의 히나로 돌아간 것 같아 아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히나, 확실하게 사요랑 쌍둥이구나?"

  "응? 우리 언니는 왜?"

  "아니야, 그냥~"

  "에, 룽하지 않아..."

 

  이번엔 아야가 먼저 손을 내밀어 히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사요와 히나를 비교하던 때가 있었다. 단지 겉으로 대하는 모습만 보고 그랬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었어, 히나의 그 말은 마법 같았다. 사요에게서 느꼈던 모든 것들이 히나에게 옮겨갔다. 해가 뜨면 빛이 점점 어둠을 삼켜가듯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싫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빛을 만나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되었다. 이렇게나 나를 생각하는 아이를 나는 그동안 왜 몰라줬을까. 아야가 먼저 빙긋 웃으니, 히나도 따라 웃었다.

  한여름의 높고 폭신한 구름이 그늘을 드리웠다. 그 그늘을 커튼 삼아, 아야의 용기가 히나의 입술에 닿았다. 그러고보니 히나 쪽에서는 아직 좋아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부끄러워서일수도 있고, 아직 알아가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 조급해하지 말자. 언젠가 그 입술에서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아야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