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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유루유리

[히마사쿠]마법적 감각

사쿠라코는 맹세코 그럴 속셈이 없었다. 아무리 히마와리가 밉다지만...

"빨리 뛰어!! 지각하게 생겼잖아!"

히마와리가 알람을 못듣고 제 시간에 일어나지 않는 바람에 두 사람은 열심히 질주하고 있었다. 1교시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아침마다 가슴에 피가 몰려 머리가 맑아지지 못하는게 틀림없어, 바보 히마와리 가슴 마인! 사쿠라코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다음부터는 늦을것 같으면 기다려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육교로 올라가, 거리 위를 지나,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사쿠라코는 두 계단 세 계단씩 훌쩍훌쩍 넘어가 다시 평지를 달리는데 히마와리가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사, 사쿠라코, 그러다가 넘어져요..."

헉헉대면서 따라오는 히마와리에게, 기다려주느라 덩달아 지각 위기에 놓인 사쿠라코는 고개만 홱 돌려서 핀잔을 주었다.

"바보같은 너나 넘어져!"

순간, 육교가 흔들거리며 우당탕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쿠라코는 가슴이 철렁해지면서 급하게 뜀박질을 멈췄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육교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치 사쿠라코가 마법을 부린 듯이 히마와리가 납작하게 엎그려있었다. 히마와리는 곧 일어나려고 팔로 땅을 지탱했으나 얼굴만 찌푸리면서 일어나지 못했다.

"히, 히마와리, 괜찮아?"

사쿠라코는 다시 한달음에 달려가 무릎을 꿇어 히마와리의 팔을 붙잡았다. 방금 전에 한 말이 목구멍을 타고 쓰리게 넘어갔다.

"괘, 괜찮아요. 미안해요."

히마와리는 입고리를 떨었다. 땅을 짚고 있는 히마와리의 팔 위에 얹어진 사쿠라코의 손 위에, 차갑고도 따뜻한 무언가가 톡 떨어졌다.






"...그래서, 오늘 지각한거야."

걱정하고 있던 아카리와 치나츠에게는 히마와리가 늦잠을 잤다는 얘기를 쏙 빼고 전했다. 사쿠라코는 곧바로 히마와리를 업고 병원으로 갔고, 이어 나데시코가 연락을 받고 와서 진료비를 대주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왼쪽 발목에 살짝 금이 간게 전부였다. 약 처방을 받고 히마와리는 깁스를 했다. 계속 착잡한 표정으로 있기에 사쿠라코도 뭐라 말을 걸기가 애매한 분위기였다. 히마와리가 목발을 짚고 절뚝절뚝 앞서갈때 사쿠라코는 말 없이 히마와리의 가방까지 짊어메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지각 위기에 날아갈듯이 뛸때와는 달리 꼭 발목에 쇠고랑이 채여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것보다 크게 다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앞으로는 천천히 다녀."

치나츠가 다정하게 히마와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히마와리는 앉아서 점잖게 미소만 지었다. 차라리 '사쿠라코가 멍청하게 뛰는 바람에 이렇게 됐잖아요'하며 원망이라도 했으면 마음이 편할텐데, 히마와리는 다른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사쿠라코에게는 아무 말이 없었다. 체육시간에도 혼자 먼 발치에서 친구들을 구경할 뿐, 평소처럼 무리하지 말라던가 조심하라던가 하는 한심 섞인 걱정도 없었다. 꼭 억지로 외면하는 듯이, 히마와리의 얼굴은 줄곧 무표정이었다.
히마와리가 사쿠라코에게 다시 말을 건 것은 수업이 끝난 방과후 시간이었다.

"사쿠라코, 학생회 일 하러 가야죠."

말을 걸지 않고 있길래 나한테 화난건가, 솔직히 많이 겁먹고 있었는데 히마와리는 멀쩡했다. 목발을 짚고 가방을 힘들게 메고 있길래 사쿠라코가 얼른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들어줄테니까 걷는데에만 신경 써."
"아니예요. 별로 무겁지도 않은걸요."
"시끄러워, 얼른 주기나 해."

팔을 빼지 않으며 뻗딩기던 히마와리는 결국 웃으면서 가방을 내어주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학생회실 쪽으로 걸어갔다. 속도 차이 때문에 자꾸만 사쿠라코가 먼저 앞서서 걸어가고, 히마와리는 절뚝이면서 뒤따라오게 되었다. 그럴때마다 사쿠라코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히마와리를 기다렸다. 아직 목발이 익숙하지 않은 히마와리는 많이 애쓰고 있었다.

"저기, 사쿠라코...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히마와리가 멈춰서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뭔데?"
"걷기가 힘들어서 그런데... 아까처럼... 업어주실수..."
"업어달라고?"

사쿠라코가 머뭇거리자 히마와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좀 그렇죠? 저는 사쿠라코보다 무거우니까... 어서 가요."

뜨끔했다. 자연스럽게 히마와리의 가슴으로 눈길이 가면서 무게를 가늠하던 차였다. 아까는 급한 나머지 무거운걸 그닥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아마 히마와리가 곤란한 처지만 아니었더라도 돼지 히마와리라며 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너나 넘어져!'하던 말이 다시 쓰리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마른 침을 삼켰다. 이렇게 된건 다 나 때문이야. 사쿠라코는 무겁게 등을 내리고 손을 뒤로 뻗었다.

"목발 들고 나한테 업혀."
"하지만... 무거울거예요."
"괜찮으니까, 빨리."

아직 학생들이 지나가는 복도에서 업고 업히는 모양새가 어쩐히 간지러워졌지만 사쿠라코는 눈을 질끈 감았다. 히마와리가 이내 비틀거리며 사쿠라코의 등에 안겼고, 곧 등이 따뜻해졌다.

"읏차."

앞으로 쏠릴 뻔 했으나 사쿠라코는 용케 무게중심을 잡고 히마와리를 업어 올렸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길때마다 히마와리가 떨어지지 않으려 사쿠라코의 목에 팔을 더 감아왔다.

"...많이 아파?"
"네?"

혹시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걸까.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아파요..."
"있잖아, 사실은 진짜 넘어졌으면 하고 말한거 아니니까...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지? 사쿠라코는 끝까지 말을 뱉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고 히마와리에게 해서는 안될 말 같았다. 평소라면 아무렇게나 뱉어버리고 말았겠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다. 단어 선택 하나, 어조 하나 조심스러웠다. 어쩐히 조금 불편해졌다.

"후루타니! 다리 왜 그래? 괜찮아?"

학생회실에 들어가자마자 아야노가 눈을 크게 뜨며 헐레벌떡 다가왔다. 치토세도 서류를 들고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오늘 등교하다가 좀 다쳤어요."
"뼈가 부러진거야?"
"아뇨, 살짝 금만 간거예요. 괜찮아요."

히마와리가 웃으면서 대꾸하는동안 사쿠라코는 아무 말도 없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히마와리가 사쿠라코의 어깨을 툭툭 쳤다.

"사쿠라코, 이제 내려주셔도 돼요."
"어? 아, 응."

자리에 히마와리를 안전하게 앉히고서야 조금 안심이 되는 듯, 사쿠라코가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장난을 건다거나 할 여유는 없었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두명의 사쿠라코가 싸워댔다. 네 잘못이잖아, 말이 씨가 되는거라고, 평소에 말 좀 예쁘게 하지 그랬어. 아니야, 말은 말일 뿐이고 네가 밀치거나 한건 아니잖아, 손도 안댔으니 넘어진 히마와리가 멍청한거야. 좀처럼 마음이 가벼워지질 않았다. 무언가가 자꾸 사쿠라코의 머릿 속을 잡아 흔들어놓고 있었다. 서류를 탁탁 정리하다가 아까 히마와리를 부축해주려 팔을 잡았던 손에 눈길이 갔다. 차갑고도 뜨거운게 떨어졌었다. 손에 구멍이 날듯이 쓰렸다.

"손이 아픈거예요?"

히마와리가 사쿠라코의 손을 건너다보았다. 사쿠라코는 흠칫 놀라며 부끄러운 것을 들킨 듯 손을 서류 뒤로 숨겼다.

"아, 아니, 신경쓰지..."

또, 목구멍이 따가워졌다. 사쿠라코는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안아파. 괜찮아."
"...네..."

목은 왜 자꾸 따가운건지. 제대로 말을 할수가 없잖아.






"가방 이리 줘."

학생회 일이 끝나고 사쿠라코가 히마와리의 가방을 채갔다.

"아, 저, 안그러셔도!"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목을 긁는 소리가 나듯이 목이 따가워져 오른손으로 급하게 목을 움켜쥐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당분간만이야."

점점 내려앉는 석양에 앞서가는 사쿠라코의 그림자가 히마와리의 발치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히마와리는 그 그림자를 밟으면서 걷다가 옆으로 조금 빠져나왔다. 밟고 있는 사쿠라코의 그림자가 많이 아파보였다.

"오늘 고마웠어요. 이것 저것 도와주셔서."
"....."
"근데, 이제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 저녁 뭐야?"

동문서답. 사쿠라코가 문득 뒤로 돌았다. 히마와리도 덩달아 멈추었다. 사쿠라코의 표정에 해가 얄궂게 그림자를 놓아 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못정했는데..."
"그럼 내가 간단하게 해줄테니까 그거 먹자."
"저기, 사쿠라코."
"나 배고프니까 얼른 가자. 카에데도 기다리고 있잖아."
"사쿠라코!"

다시 앞서가려는 사쿠라코를 히마와리가 다시 붙잡았다. 사쿠라코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아까부터 말할때 제 얼굴을 보지 않는 것 같아서요."
"뭐?"
"누구랑 말하는건지 모를 정도라구요."
"...미안."

무슨 말인지나 알고서 사과하는걸까. 히마와리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사쿠라코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그러셔도 된다고 몇번이나 말했잖아요."
"하지만..."
"제가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평소의 사쿠라코는 이렇지 않은데, 오늘따라..."

그 말을 뱉자마자 사쿠라코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까 너 울었잖아."
"....네?"

히마와리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쿠라코가 히마와리의 목발을 쥐었다.

"손등이 뜨거웠다고."
"....."
"이게 다, 내가 넘어지라고 하는 바람에..."
"그, 그런거 아니예요. 그래서 여태껏 그렇게 풀이 죽어있던거예요?"
"아니라고는 해도 말이야, 마음이 편하지 않아."

목발을 통해서 사쿠라코의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기분이었다. 히마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손을 뻗어서 사쿠라코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목발을 잡고 있어 불가능하다.

"괜찮다, 괜찮다 하지만 오늘 하루종일 네 표정이 좋지 않아서 솔직히 무서웠다고."
"아... 그건... 사쿠라코 때문이 아니예요."
"차라리 내가 넘어졌으면."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히마와리가 다급하게 말꼬리를 잘랐다.

"아니예요! 그런 말이 어딨어요?"
"넌 운동치에, 몸치에, 가슴까지 무겁잖아.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좀 편했을거 아니야."
"...사쿠라코..."

아니, 하마터면 감동 받을 뻔했다. 운동치에, 몸치에, 가슴까지 무겁다니. 히마와리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얼굴에 힘을 주다가 순간 힘이 풀려버렸다. 그런 말을 하면서까지 사쿠라코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정말, 필터링 하나 없다. 바보같이. 웃음이 터졌다.

"뭐, 뭐야, 왜 웃어? 지금 난 진지하다고!"
"아, 아뇨, 근데..."
"근데 뭐?"

어디에선가 한차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내 히마와리가 비틀거리더니 목발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사쿠라코 쪽으로 쓰러졌다. 사쿠라코가 놀라 쥐고 있던 목발을 떨어뜨렸다. 쟁그랑 소리에 귀가 얼얼해졌다.

"넘어질 뻔 한걸 사쿠라코가 붙잡아준거예요."
"......"

사쿠라코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히마와리의 숨소리는 고요했다. 사쿠라코의 손이 히마와리의 허리에 살짝 감겼다.

"고마워요, 사쿠라코."

알수 없는 기분이 발 끝에서부터 치밀어왔다. 사쿠라코도 히마와리 어깨에 코를 묻었다. 목을 감싸왔던 쓰라림은 사라졌다. 박하사탕을 먹은 듯이 상쾌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히마와리의 방금 전의 말에는 상쾌하게 받아칠 수가 없었다.

"미안해."

결국 마지막 남은 앙금을 뱉어내고서야 속이 편안해졌다. 자꾸만 자책하는 사쿠라코의 마음을 히마와리가 조심스럽게 보듬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쪽으로 패스!"

사쿠라코가 공을 받았다. 바로 돌진해서 발로 공을 차버리면 골인이다. 맞은편 상대는 히마와리. 공격수를 못하는 탓에 수비수로 남은 모양이었다. 히마와리 쯤이야, 사쿠라코가 발을 있는 힘껏 뒤로 뺐다. 히마와리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바닥을 짚었다. 잘못하면 공을 직격타로 맞을수도 있다.

"간다!"

이윽고 사쿠라코가 공을 차올리자, 히마와리는 눈을 질끈 감고 아무 곳으로 발을 뻗었다. 퉁,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탄성이 울려퍼졌다. 히마와리의 발이 정확하게 사쿠라코의 공을 막아냈다.

"아, 저런 얼굴에 공을 쳐맞을!"

사쿠라코가 분에 겨워 이를 부득이며 하는 말에, 히마와리의 발 끝에 맞았던 공이 되돌아왔다. 어, 어, 이게 아닌데, 멍하게 있던 사쿠라코는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사쿠라코, 괜찮아요?!"

몰려드는 친구들 사이로 히마와리가 파고들었다.

"아으..."
"사쿠라코, 코피..."

놀란 히마와리가 입을 가렸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사쿠라코의 코에서 보기 좋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쿠라코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으아, 코피!!! 양호실!!"

허둥대는 사쿠라코를 붙잡고 히마와리가 부축해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양호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는 친구가 넘어졌는데 웃냐?"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은 채 손으로 코를 막아 웅얼거리는 소리에 히마와리가 다시 빙긋 웃었다. 발목은 깨끗하게 나았지만 사쿠라코는 여전히 히마와리를 부축하듯이 걷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요 사쿠라코, 사쿠라코한테는 약간 마법적 감각이 있는것 같아요."
"무슨 말이야."

그런 마법, 앞으로는 좋은 데에 쓰일 수 있기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