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끝이 났다.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학생회 일은 생각보다 고달프다. 매일같이 운동장이 노란 빛으로 물들때까지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은 우리 먼저 가볼게, 조심히 가!"
스기우라 선배는 가족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며 먼저 나갔고 이케다 선배도 늘 그랬듯 함께였다. 나와 히마와리, 마츠모토 학생회장님만 남은줄 알았는데 학생회장님은 어느샌가 자리를 비우고 안계셨다. 역시, 엄청난 존재감이다. 누구랑 캐릭터가 겹치는것도 같은데.
"저 사쿠라코, 저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빨리 다녀와, 배고프니까."
일이 유독 많았던 터라 나는 지쳐있었다. 히마와리가 가방을 놔두고 총총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동안 나는 히마와리의 가방까지 들고 학생회실 문을 잠갔다.
"여어, 사쿠라코. 마츠모토 있나?"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니시가키 선생님이 하얀 가운을 펄럭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머리카락과 얼굴과 옷에 이상한 숱검댕이를 묻힌 채였다.
"아, 오늘은 모두 돌아갔는데요..."
"그래? 좀 늦게 왔군. 아쉽네."
니시가키 선생님은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학생회실에서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학생회장님과 둘이서 대체 무슨 실험을 하시길래 매일같이 회장님만 찾는걸까. 이상한 호기심이 꿈틀댔다.
"무슨 일이세요?"
"실은, 새로 실험한 결과물이 완성됐는데 말이야. 사람한테 적용시켜봐야 하는거거든."
"어떤건데요?"
선생님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곧 기다렸다는 듯이 그 손에서 작은 알약이 하나 튀어나왔다. 새끼 손가락 한마디 만한 작은 알약이었다.
"이게 뭐예요?"
"흐흥~ 이게 뭘까?"
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아꼈다. 그 얄궂은 얼굴에 조바심이 났다. 나도 모르게 알약을 빼앗아들고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감기약 같이 생긴 그냥 평범한 알약인데.
"기억력이 좋아지는 알약이지."
"기억력이요....?"
가슴이라도 커지는 알약이라면 먹었을텐데, 기억력이라니 쓸데없다. 다시 니시가키 선생님의 손바닥에 알약을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다 뿌려놓은 떡밥을 싸그리 무시당한 멍한 표정이었다.
"별로 흥미가 없군?"
"기억력은 필요 없어요. 정 그러시면 히마와리한테 가보시는게 어때요? 아마 공부 잘하고...."
순간 기가 막힌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기억력이 좋아지는 저 알약을 먹으면 앞으로 히마와리의 도움 없이 당당하게 히마와리를 밟고 설 수 있는 것이렷다.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없다. 나는 다시 알약을 쥐었다.
"필요 없다면서."
"아, 아니예요. 선생님은 이 알약의 효과를 증명하고 싶으신거죠? 제가 먹을게요."
이것만 있으면 히마와리를 이길 수 있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때마침 히마와리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히마와리는 니시가키 선생님을 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아, 잠시 마츠모토한테 좀. 근데 이미 가고 없더라고."
알약에 대한 이야기를 히마와리가 들어서는 안된다. 내가 똑똑해지는걸 시기해서 빼앗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알약을 재빨리 입에 넣고 삼켰다. 동글동글한 표면이 목구멍을 깨끗하게 씻고 내려갔다.
"아, 사쿠라코. 그거 살짝 부작용이 있을수도 있는데, 심각한건 아니지만..."
"서, 선생님, 저희는 이만 집에 가볼게요! 안녕히가세요!"
재빨리 히마와리의 팔을 부여잡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히마와리가 주렁주렁 따라오면서 말을 더듬었다.
"사, 사쿠라코, 부작용이라니, 선생님한테서 뭘 받은거예요?"
"받긴 뭘? 난 아무것도 안받았는데. 얼른 집에 가자. 나 배고파."
알약에 뱃속에서 기분 좋게 소화가 되고 있는게 느껴졌다. 분명 좋은 기운이다. 앞으로 히마와리를 누를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히마와리는 그저 따라오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 알약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사쿠라코 지존 프로젝트 시작이다.
"오오오!"
효과는 대단했다. 수업시간에 대충 흘려들은 것들이 어찌된 일인지 전부 또렷하게 머릿속에 박혀있는 기분이었다. 숙제를 펴고 열심히 연필을 놀렸다. 분명 히마와리 녀석,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분에 차서 바닥을 뒹굴거야.
한참 물에 올라 문제를 풀고 있는데 히마와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숙제 있으니까 도와주러 갈게요'라는 문자였다. 벌써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오지 말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문자를 보내기도 전에 이미 초인종이 눌리고 있었다. 늘 하던대로 습관이 되어 서로의 의견은 필요가 없어진 일정이기는 했다.
"어, 왔어?"
일단 최대한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히마와리를 맞이했다. 히마와리는 수학 공책을 들고 여느때처럼 거실로 입성했다.
"숙제는 조금 해봤어요?"
"어어, 그게 말이야."
일부러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아꼈다. 히마와리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멈칫했다.
"...웬일로 수학공책이 펼쳐져있네요?"
눈치가 빠르다. 생각보다 일찍 들킬지도 모르겠다. 덜컥 겁이 나서 급하게 되는 대로 둘러댔다.
"어, 응, 맨날 너 고생시키는것 같아서... 한번 들춰봤어."
히마와리가 별일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조금 편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미소지었다.
"시작해볼까요? 모르는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응."
여느때처럼 숙제가 시작됐다. 나는 책상 위에서, 히마와리는 바닥에서 문제를 풀었다. 이미 숙제는 거의 다 해놓은 상태인데 어떻게 해야 평소처럼 보일까 열심히 고민한 끝에 늦장을 부리기로 했다. 푸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히마와리를 골려주고 있으니 가슴이 간질간질한게 스릴 넘치는 기분이라 짜릿했다. 바보같은 히마와리, 가슴만 컷지 아무것도 모르는 히마와리!
문제를 풀다가 히마와리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잘 안풀리는 문제라도 있나, 고개를 기웃거렸다. 과연 한 문제에서 연필이 멈춰있었다.
"뭐, 잘 안돼?"
"이게 잘 안풀리네요. 분명 수업시간에 들었던건데..."
헤에, 잘난척하던 히마와리가 별 일이 다 있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려가 문제를 살폈다. 히마와리가 나를 흘끔거렸다.
"사쿠라코가 본다고 뭐 알기나 하나요? 얼른 모르는 문제 체크부터..."
그러나 나는 이제 더이상 예전의 사쿠라코가 아니란 말씀이지.
"아, 이건 말이야. 이렇게 해서. 이렇게."
아까 풀었던 문제라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풀이를 쭉 적어가는 동안 히마와리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갑자기 내 이마를 짚었다.
"무, 뭐야?!"
"혹시 열이 있는건 아니죠?"
"아니거든! 사람을 뭘로 보고!"
"이걸 사쿠라코가 풀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어디 아픈거 맞죠?"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의 눈초리,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히마와리의 손을 잡아 내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잘 들었어야지."
"사쿠라코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굉장히 기분이 나쁜데요..."
히마와리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내가 푼 문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걸 풀 수 있을리가 없어, 그럴리가 없어, 라는 메아리가 들리는 듯 했다. 꼴 좋다, 히마와리. 맨날 나보고 바보라고 놀리더니.
"사쿠라코. 혹시 아까 부작용이니 뭐니 한걸 들어서 하는 말인데 니시가키 선생님이 이상한 실험을 사쿠라코한테 권한건 아니겠죠?"
뜻밖의 허를 찔렸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져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 아니! 무슨 소릴 하는건지 모르겠네!"
"지금 굉장히 당황하고 있거든요! 그런거 맞죠? 대체 뭘 받은거예요?"
"그런거 아니라니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 알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히마와리도 똑같은걸 얻으려고 할테고, 그러면 사쿠라코 지존 프로젝트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고 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아아, 몰라! 나 조금만 쉴래!"
일단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침대 위로 풀썩 뛰어들었다. 히마와리도 쫓아오다가 내가 이불을 부스럭거리자 손사래를 쳤다.
"먼지 날리잖아요, 그만 해요! 잠깐 저 좀 보자구요!"
"싫어, 저리 가, 싫어!"
"이불 좀 그만... 에.... 에...."
히마와리가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몸을 앞으로 확 숙였다.
"엣취!"
순간, 내 얼굴에 몰캉몰캉한 것이 닿았다. 곧 포근한 냄새도 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게 뭐지, 히마와리는 어디로 갔지, 고개를 돌리자 히마와리가 입고 있던 옷과 똑같은 색깔이 보였다. 시선을 조금 내렸다. 내 두 팔은 무언가에 감겨있었다. 조금 더 내렸다. 나는 아직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사... 사.... 사쿠라코...? 지금 이게 무슨... 무..."
내 머리 위에서는 히마와리 목소리가 간지럽게 울리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상태였고, 히마와리는 내 베개라도 된 듯이 나에게 안겨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세는 틀림없이...
"아, 아니야! 아니라고!"
히마와리는 한쪽 팔로 침대를 지탱하면서 나를 향해 엉거주춤하게 누워있었다. 내 팔은 마치 무언가에 묶인 듯이 히마와리의 허리를 꽉 죄고 있었다. 풀어보려고 했지만 당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뭐야 이거?!"
"제가 어떻게 알아요! 대체 니시가키 선생님한테 뭘 받은거예요?"
"받은거 없다니까 그러네! 얼른 나한테서 떨어져!"
그런데, 떨어지라고 할 수록 나는 히마와리의 몸 쪽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사쿠라코, 수, 숨이..."
"아으악응아"
우리는 한참동안 실랑이 한 끝에 결국 서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설마, 니시가키 선생님이 말하려던 부작용이라는게 이런건가. 재채기하면 껴안는 부작용?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이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걸까. 히마와리도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몸에 힘이 쪽 빠졌지만 팔에서는 힘이 빠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정말... 사쿠라코 다운 선택이네요."
"그런거 아니라니까..."
"닥치고 생각이나 좀 해봐요. 이 상황 어떡할거예요? 혹시 선생님한테 뭐 들은거 없어요?"
"없어..."
될 대로 되라지, 싶으니 긴장이 풀렸다. 히마와리 몸은 생각보다 포근해서 진짜 베개같았다. 내 머리 위에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가슴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니 점점 아득해져오는 듯이 편안해졌다.
"사쿠라코? 자는 거 아니죠? 자면 안돼요."
이미 한차례 소동이 벌어진 뒤라 몸이 지쳐있던 탓인지, 눈이 슬슬 감겼다. 얼굴을 더 묻었다. 히마와리가 움찔거리더니 내 얼굴을 부여잡고 떨어뜨려놓으려고 했다.
"어, 어디에 얼굴을... 빨리 치워요!"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쓸데없는 저항 하지 말고 생각이나 더 해보자고."
히마와리도 곧 포기했다. 상체가 조금 흔들리더니, 긴 팔이 내 몸을 휘감았다.
"정말... 사쿠라코랑 있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어쩐지 기분 나쁘지 않은 듯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한동안 정적 속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있잖아요, 사쿠라코."
히마와리가 조심스럽게 정적을 깼다.
"갑자기 느끼는거지만... 사쿠라코 정말 말랐네요."
"내가?"
히마와리가 내 어깨와 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손 대면 뼈가 금방 만져지잖아요. 밥 좀 잘 먹고 다녀요. 맨날 체육시간에 이기겠다고 악 쓰지 말고."
"그러는 너야말로, 좀 잘 먹어. 누가 누굴 걱정해."
히마와리의 허리를 감고 있는 내 손도, 히마와리의 체격을 느끼고 있었다. 맨날 가슴 돼지니 어쩌니 하긴 했지만 사실 히마와리는 마른 편이었다. 한창 다이어트 한다고 난리를 쳤을때가 생각났다. 그때 굶어 죽을 뻔 했던 히마와리를 구해준게 나라는걸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머리카락도 생각보다 푸석푸석하고."
이번에는 머리카락 부드럽게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푸석푸석하다니, 실례네. 그런데 이상하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엄마가 쓰다듬어주는 것 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머릿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히마와리가 내 얼굴을 살짝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뭐지, 이 이상한 상황은... 히마와리는 아무 생각 없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나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얼굴은 누가 사탕주면 따라갈것 같이 생겼네요."
그 말이 묘하게 내 머릿 속을 물들였다. 웃자고 하고 있는 말인지, 그냥 놀리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자세하게 본 적이 있었나, 하면 고개를 조금 갸웃거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느새 니시가키 선생님의 이상한 약물에 중독이라도 된 듯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히마와리의 눈썹이 살짝 꿈틀대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그 입술에 눈이 갔다. 작고 얇은게 참 까탈스럽게도 생겼다. 갑자기 귀를 대고 있는 히마와리 가슴의 고동이 점점 커졌다. 덩달아 나도 정신이 없어져서 숨을 빠르게 쉬었다. 피가 빠르게 순환했다.
"사쿠라코, 사실은요, 저는..."
그 입술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돌연 밖에서 쿵쾅쿵쾅 소리가 들리더니 문고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놀라 서로를 밀쳤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나데시코나 하나코가 본다면 분명 내 인생은 불 보듯 뻔하다.
"히마와리, 과일 먹고 해."
나데시코 목소리였다.
"...그런데 둘이 뭐하고 있는거야?"
눈을 살며시 떴다. 나는 침대 구석에, 히마와리는 침대 끄트머리에 살포시 앉아있었다. 우리는 몸이 떨어졌다는거에 믿기지가 않아서 서로를 꿈뻑꿈뻑 쳐다보다가, 말을 맞추기 바빴다.
"아, 아, 사쿠라코가 공부하기 싫다고 침대 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잠깐 실갱이를 좀..."
"맞아, 내가 하기 싫다고 해서, 히마와리가 막 방금 전까지 화내고... 그, 그랬지?"
어색하게 웃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과일 왔으니까 먹어볼까나~ 와~이~"
나데시코가 잠시 나와 히마와리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다가 책상 위에 과일을 올려놓았다.
"사쿠라코, 히마와리가 숙제 도와주는걸 당연한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알려줄 때 열심히 해. 히마와리 없으면 바보 멍청이 사쿠라코잖아."
"그런 말 할거면 나가."
참외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노려보자, 나데시코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순순히 퇴장했다. 나데시코가 나가자마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부작용이었나보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작용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풀려났다.
"히마와리, 미, 미안... 갑자기 그래서..."
"아니예요... 별로..."
"과일 먹을래?"
히마와리도 내 옆으로 와서 참외를 집었다. 우리는 숙제 할 생각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참외만 집어먹었다. 씹어먹는 동안 계속 히마와리의 얇고 작은 입술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기억력이 좋아지는 알약이다보니 별게 다 기억되는구나 싶었다.
"대체 무슨 약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다음날 다짜고짜 니시가키 선생님한테 가서 따졌다. 선생님은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은 내 탓이라며 되려 나몰라라 했다.
"그러게, 내 말을 끝까지 들었어야지."
"미리 설명을 다 하고 줬어야죠!"
"설명 하기도 전에 삼킨게 누구였더라?"
"으으!!"
선생님은 내 불평을 모두 흘려듣고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실험 보고서'라고 위에 대문짝만하게 써져있었다.
"네 성과를 적어줄래? 어땠어?"
"...확실히 기억력은 좋아진것 같던데요. 숙제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고."
"역시 그렇지?"
싱글벙글 웃는 니시가키 선생님 앞에서 부득부득 이를 갈며 펜으로 보고서를 작성해갔다.
"그래서, 결국 부작용은 뭐였던건데요?"
"음... 외부에서 자극을 받으면 심장이 급격하게 놀라서 아무거나 막 껴안는거."
"약 먹는 대신에 심장이 약해진다니, 좀 위험한거 아니예요?"
"뭐, 그래도 큰 일은 없었던것 같아서 다행이네. 기껏해야 히마와리랑 껴안은거 아니야?"
"그, 그런거....!"
제 발 저려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려던 찰나, 과학실 문이 열렸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선생님, 부르셔서 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어느새 나는 일어나서 과학실 문턱에 있었다. 훅, 숨이 막히면서 머리가 어질해졌다.
"아직 약효과가 안떨어졌나보네."
얼굴이 화끈해졌다. 히마와리도 당황했는지 두 손을 쓰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내 두 팔은 히마와리의 허리를 꽉 껴안고 있었다.
"이상하네. 방금 전에는 아무런 자극도 없었잖아? 왜그러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부작용이 추가가 됐나?"
"돼, 됐고, 이거나 빨리 풀어줘요! 부작용 푸는거 없어요?!"
"어, 그거 말이지."
선생님이 과학 물품이 담긴 바구니를 꺼내왔다.
"히마와리는 이거 가져가라고 부른거고. 참고로 부작용은 누가 다시 자극해주기 전까지는 못풀어."
"그런게 어딨어요~!"
"둘이 알아서 잘 해봐. 난 수업이 있어서 이만."
선생님은 우리 둘만 남기고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이걸 어떡하지, 곧 수업이 시작될텐데,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억울해졌다. 그때, 드르륵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닫혔다. 히마와리가 문 손잡이를 굳게 잡고 있었다.
"...히마와리?"
여태껏 아무 말 없던 히마와리가 두 팔 안에 나를 가두었다.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이대로 있다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히마와리한테서 향긋한 향기가 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안나던 냄새인데. 히마와리의 손이 문득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머릿결이 곱네요, 사쿠라코."
대체, 뭔지. 다시 내 심장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녀석의 고동이 커졌다. 아아, 정말 싫다. 사쿠라코 지존 프로젝트를 돌려달라!! 이런 식으로 지존이 되는건 싫어!
-Fin.
오늘 하루도 끝이 났다.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학생회 일은 생각보다 고달프다. 매일같이 운동장이 노란 빛으로 물들때까지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은 우리 먼저 가볼게, 조심히 가!"
스기우라 선배는 가족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며 먼저 나갔고 이케다 선배도 늘 그랬듯 함께였다. 나와 히마와리, 마츠모토 학생회장님만 남은줄 알았는데 학생회장님은 어느샌가 자리를 비우고 안계셨다. 역시, 엄청난 존재감이다. 누구랑 캐릭터가 겹치는것도 같은데.
"저 사쿠라코, 저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빨리 다녀와, 배고프니까."
일이 유독 많았던 터라 나는 지쳐있었다. 히마와리가 가방을 놔두고 총총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동안 나는 히마와리의 가방까지 들고 학생회실 문을 잠갔다.
"여어, 사쿠라코. 마츠모토 있나?"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니시가키 선생님이 하얀 가운을 펄럭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머리카락과 얼굴과 옷에 이상한 숱검댕이를 묻힌 채였다.
"아, 오늘은 모두 돌아갔는데요..."
"그래? 좀 늦게 왔군. 아쉽네."
니시가키 선생님은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학생회실에서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학생회장님과 둘이서 대체 무슨 실험을 하시길래 매일같이 회장님만 찾는걸까. 이상한 호기심이 꿈틀댔다.
"무슨 일이세요?"
"실은, 새로 실험한 결과물이 완성됐는데 말이야. 사람한테 적용시켜봐야 하는거거든."
"어떤건데요?"
선생님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곧 기다렸다는 듯이 그 손에서 작은 알약이 하나 튀어나왔다. 새끼 손가락 한마디 만한 작은 알약이었다.
"이게 뭐예요?"
"흐흥~ 이게 뭘까?"
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아꼈다. 그 얄궂은 얼굴에 조바심이 났다. 나도 모르게 알약을 빼앗아들고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감기약 같이 생긴 그냥 평범한 알약인데.
"기억력이 좋아지는 알약이지."
"기억력이요....?"
가슴이라도 커지는 알약이라면 먹었을텐데, 기억력이라니 쓸데없다. 다시 니시가키 선생님의 손바닥에 알약을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다 뿌려놓은 떡밥을 싸그리 무시당한 멍한 표정이었다.
"별로 흥미가 없군?"
"기억력은 필요 없어요. 정 그러시면 히마와리한테 가보시는게 어때요? 아마 공부 잘하고...."
순간 기가 막힌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기억력이 좋아지는 저 알약을 먹으면 앞으로 히마와리의 도움 없이 당당하게 히마와리를 밟고 설 수 있는 것이렷다.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없다. 나는 다시 알약을 쥐었다.
"필요 없다면서."
"아, 아니예요. 선생님은 이 알약의 효과를 증명하고 싶으신거죠? 제가 먹을게요."
이것만 있으면 히마와리를 이길 수 있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때마침 히마와리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히마와리는 니시가키 선생님을 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아, 잠시 마츠모토한테 좀. 근데 이미 가고 없더라고."
알약에 대한 이야기를 히마와리가 들어서는 안된다. 내가 똑똑해지는걸 시기해서 빼앗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알약을 재빨리 입에 넣고 삼켰다. 동글동글한 표면이 목구멍을 깨끗하게 씻고 내려갔다.
"아, 사쿠라코. 그거 살짝 부작용이 있을수도 있는데, 심각한건 아니지만..."
"서, 선생님, 저희는 이만 집에 가볼게요! 안녕히가세요!"
재빨리 히마와리의 팔을 부여잡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히마와리가 주렁주렁 따라오면서 말을 더듬었다.
"사, 사쿠라코, 부작용이라니, 선생님한테서 뭘 받은거예요?"
"받긴 뭘? 난 아무것도 안받았는데. 얼른 집에 가자. 나 배고파."
알약에 뱃속에서 기분 좋게 소화가 되고 있는게 느껴졌다. 분명 좋은 기운이다. 앞으로 히마와리를 누를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히마와리는 그저 따라오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 알약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사쿠라코 지존 프로젝트 시작이다.
"오오오!"
효과는 대단했다. 수업시간에 대충 흘려들은 것들이 어찌된 일인지 전부 또렷하게 머릿속에 박혀있는 기분이었다. 숙제를 펴고 열심히 연필을 놀렸다. 분명 히마와리 녀석,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분에 차서 바닥을 뒹굴거야.
한참 물에 올라 문제를 풀고 있는데 히마와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숙제 있으니까 도와주러 갈게요'라는 문자였다. 벌써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오지 말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문자를 보내기도 전에 이미 초인종이 눌리고 있었다. 늘 하던대로 습관이 되어 서로의 의견은 필요가 없어진 일정이기는 했다.
"어, 왔어?"
일단 최대한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히마와리를 맞이했다. 히마와리는 수학 공책을 들고 여느때처럼 거실로 입성했다.
"숙제는 조금 해봤어요?"
"어어, 그게 말이야."
일부러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아꼈다. 히마와리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멈칫했다.
"...웬일로 수학공책이 펼쳐져있네요?"
눈치가 빠르다. 생각보다 일찍 들킬지도 모르겠다. 덜컥 겁이 나서 급하게 되는 대로 둘러댔다.
"어, 응, 맨날 너 고생시키는것 같아서... 한번 들춰봤어."
히마와리가 별일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조금 편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미소지었다.
"시작해볼까요? 모르는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응."
여느때처럼 숙제가 시작됐다. 나는 책상 위에서, 히마와리는 바닥에서 문제를 풀었다. 이미 숙제는 거의 다 해놓은 상태인데 어떻게 해야 평소처럼 보일까 열심히 고민한 끝에 늦장을 부리기로 했다. 푸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히마와리를 골려주고 있으니 가슴이 간질간질한게 스릴 넘치는 기분이라 짜릿했다. 바보같은 히마와리, 가슴만 컷지 아무것도 모르는 히마와리!
문제를 풀다가 히마와리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잘 안풀리는 문제라도 있나, 고개를 기웃거렸다. 과연 한 문제에서 연필이 멈춰있었다.
"뭐, 잘 안돼?"
"이게 잘 안풀리네요. 분명 수업시간에 들었던건데..."
헤에, 잘난척하던 히마와리가 별 일이 다 있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려가 문제를 살폈다. 히마와리가 나를 흘끔거렸다.
"사쿠라코가 본다고 뭐 알기나 하나요? 얼른 모르는 문제 체크부터..."
그러나 나는 이제 더이상 예전의 사쿠라코가 아니란 말씀이지.
"아, 이건 말이야. 이렇게 해서. 이렇게."
아까 풀었던 문제라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풀이를 쭉 적어가는 동안 히마와리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갑자기 내 이마를 짚었다.
"무, 뭐야?!"
"혹시 열이 있는건 아니죠?"
"아니거든! 사람을 뭘로 보고!"
"이걸 사쿠라코가 풀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어디 아픈거 맞죠?"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의 눈초리,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히마와리의 손을 잡아 내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잘 들었어야지."
"사쿠라코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굉장히 기분이 나쁜데요..."
히마와리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내가 푼 문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걸 풀 수 있을리가 없어, 그럴리가 없어, 라는 메아리가 들리는 듯 했다. 꼴 좋다, 히마와리. 맨날 나보고 바보라고 놀리더니.
"사쿠라코. 혹시 아까 부작용이니 뭐니 한걸 들어서 하는 말인데 니시가키 선생님이 이상한 실험을 사쿠라코한테 권한건 아니겠죠?"
뜻밖의 허를 찔렸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져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 아니! 무슨 소릴 하는건지 모르겠네!"
"지금 굉장히 당황하고 있거든요! 그런거 맞죠? 대체 뭘 받은거예요?"
"그런거 아니라니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 알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히마와리도 똑같은걸 얻으려고 할테고, 그러면 사쿠라코 지존 프로젝트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고 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아아, 몰라! 나 조금만 쉴래!"
일단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침대 위로 풀썩 뛰어들었다. 히마와리도 쫓아오다가 내가 이불을 부스럭거리자 손사래를 쳤다.
"먼지 날리잖아요, 그만 해요! 잠깐 저 좀 보자구요!"
"싫어, 저리 가, 싫어!"
"이불 좀 그만... 에.... 에...."
히마와리가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몸을 앞으로 확 숙였다.
"엣취!"
순간, 내 얼굴에 몰캉몰캉한 것이 닿았다. 곧 포근한 냄새도 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게 뭐지, 히마와리는 어디로 갔지, 고개를 돌리자 히마와리가 입고 있던 옷과 똑같은 색깔이 보였다. 시선을 조금 내렸다. 내 두 팔은 무언가에 감겨있었다. 조금 더 내렸다. 나는 아직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사... 사.... 사쿠라코...? 지금 이게 무슨... 무..."
내 머리 위에서는 히마와리 목소리가 간지럽게 울리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상태였고, 히마와리는 내 베개라도 된 듯이 나에게 안겨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세는 틀림없이...
"아, 아니야! 아니라고!"
히마와리는 한쪽 팔로 침대를 지탱하면서 나를 향해 엉거주춤하게 누워있었다. 내 팔은 마치 무언가에 묶인 듯이 히마와리의 허리를 꽉 죄고 있었다. 풀어보려고 했지만 당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뭐야 이거?!"
"제가 어떻게 알아요! 대체 니시가키 선생님한테 뭘 받은거예요?"
"받은거 없다니까 그러네! 얼른 나한테서 떨어져!"
그런데, 떨어지라고 할 수록 나는 히마와리의 몸 쪽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사쿠라코, 수, 숨이..."
"아으악응아"
우리는 한참동안 실랑이 한 끝에 결국 서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설마, 니시가키 선생님이 말하려던 부작용이라는게 이런건가. 재채기하면 껴안는 부작용?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이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걸까. 히마와리도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몸에 힘이 쪽 빠졌지만 팔에서는 힘이 빠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정말... 사쿠라코 다운 선택이네요."
"그런거 아니라니까..."
"닥치고 생각이나 좀 해봐요. 이 상황 어떡할거예요? 혹시 선생님한테 뭐 들은거 없어요?"
"없어..."
될 대로 되라지, 싶으니 긴장이 풀렸다. 히마와리 몸은 생각보다 포근해서 진짜 베개같았다. 내 머리 위에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가슴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니 점점 아득해져오는 듯이 편안해졌다.
"사쿠라코? 자는 거 아니죠? 자면 안돼요."
이미 한차례 소동이 벌어진 뒤라 몸이 지쳐있던 탓인지, 눈이 슬슬 감겼다. 얼굴을 더 묻었다. 히마와리가 움찔거리더니 내 얼굴을 부여잡고 떨어뜨려놓으려고 했다.
"어, 어디에 얼굴을... 빨리 치워요!"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쓸데없는 저항 하지 말고 생각이나 더 해보자고."
히마와리도 곧 포기했다. 상체가 조금 흔들리더니, 긴 팔이 내 몸을 휘감았다.
"정말... 사쿠라코랑 있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어쩐지 기분 나쁘지 않은 듯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한동안 정적 속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있잖아요, 사쿠라코."
히마와리가 조심스럽게 정적을 깼다.
"갑자기 느끼는거지만... 사쿠라코 정말 말랐네요."
"내가?"
히마와리가 내 어깨와 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손 대면 뼈가 금방 만져지잖아요. 밥 좀 잘 먹고 다녀요. 맨날 체육시간에 이기겠다고 악 쓰지 말고."
"그러는 너야말로, 좀 잘 먹어. 누가 누굴 걱정해."
히마와리의 허리를 감고 있는 내 손도, 히마와리의 체격을 느끼고 있었다. 맨날 가슴 돼지니 어쩌니 하긴 했지만 사실 히마와리는 마른 편이었다. 한창 다이어트 한다고 난리를 쳤을때가 생각났다. 그때 굶어 죽을 뻔 했던 히마와리를 구해준게 나라는걸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머리카락도 생각보다 푸석푸석하고."
이번에는 머리카락 부드럽게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푸석푸석하다니, 실례네. 그런데 이상하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엄마가 쓰다듬어주는 것 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머릿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히마와리가 내 얼굴을 살짝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뭐지, 이 이상한 상황은... 히마와리는 아무 생각 없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나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얼굴은 누가 사탕주면 따라갈것 같이 생겼네요."
그 말이 묘하게 내 머릿 속을 물들였다. 웃자고 하고 있는 말인지, 그냥 놀리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자세하게 본 적이 있었나, 하면 고개를 조금 갸웃거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느새 니시가키 선생님의 이상한 약물에 중독이라도 된 듯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히마와리의 눈썹이 살짝 꿈틀대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그 입술에 눈이 갔다. 작고 얇은게 참 까탈스럽게도 생겼다. 갑자기 귀를 대고 있는 히마와리 가슴의 고동이 점점 커졌다. 덩달아 나도 정신이 없어져서 숨을 빠르게 쉬었다. 피가 빠르게 순환했다.
"사쿠라코, 사실은요, 저는..."
그 입술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돌연 밖에서 쿵쾅쿵쾅 소리가 들리더니 문고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놀라 서로를 밀쳤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나데시코나 하나코가 본다면 분명 내 인생은 불 보듯 뻔하다.
"히마와리, 과일 먹고 해."
나데시코 목소리였다.
"...그런데 둘이 뭐하고 있는거야?"
눈을 살며시 떴다. 나는 침대 구석에, 히마와리는 침대 끄트머리에 살포시 앉아있었다. 우리는 몸이 떨어졌다는거에 믿기지가 않아서 서로를 꿈뻑꿈뻑 쳐다보다가, 말을 맞추기 바빴다.
"아, 아, 사쿠라코가 공부하기 싫다고 침대 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잠깐 실갱이를 좀..."
"맞아, 내가 하기 싫다고 해서, 히마와리가 막 방금 전까지 화내고... 그, 그랬지?"
어색하게 웃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과일 왔으니까 먹어볼까나~ 와~이~"
나데시코가 잠시 나와 히마와리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다가 책상 위에 과일을 올려놓았다.
"사쿠라코, 히마와리가 숙제 도와주는걸 당연한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알려줄 때 열심히 해. 히마와리 없으면 바보 멍청이 사쿠라코잖아."
"그런 말 할거면 나가."
참외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노려보자, 나데시코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순순히 퇴장했다. 나데시코가 나가자마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부작용이었나보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작용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풀려났다.
"히마와리, 미, 미안... 갑자기 그래서..."
"아니예요... 별로..."
"과일 먹을래?"
히마와리도 내 옆으로 와서 참외를 집었다. 우리는 숙제 할 생각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참외만 집어먹었다. 씹어먹는 동안 계속 히마와리의 얇고 작은 입술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기억력이 좋아지는 알약이다보니 별게 다 기억되는구나 싶었다.
"대체 무슨 약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다음날 다짜고짜 니시가키 선생님한테 가서 따졌다. 선생님은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은 내 탓이라며 되려 나몰라라 했다.
"그러게, 내 말을 끝까지 들었어야지."
"미리 설명을 다 하고 줬어야죠!"
"설명 하기도 전에 삼킨게 누구였더라?"
"으으!!"
선생님은 내 불평을 모두 흘려듣고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실험 보고서'라고 위에 대문짝만하게 써져있었다.
"네 성과를 적어줄래? 어땠어?"
"...확실히 기억력은 좋아진것 같던데요. 숙제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고."
"역시 그렇지?"
싱글벙글 웃는 니시가키 선생님 앞에서 부득부득 이를 갈며 펜으로 보고서를 작성해갔다.
"그래서, 결국 부작용은 뭐였던건데요?"
"음... 외부에서 자극을 받으면 심장이 급격하게 놀라서 아무거나 막 껴안는거."
"약 먹는 대신에 심장이 약해진다니, 좀 위험한거 아니예요?"
"뭐, 그래도 큰 일은 없었던것 같아서 다행이네. 기껏해야 히마와리랑 껴안은거 아니야?"
"그, 그런거....!"
제 발 저려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려던 찰나, 과학실 문이 열렸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선생님, 부르셔서 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어느새 나는 일어나서 과학실 문턱에 있었다. 훅, 숨이 막히면서 머리가 어질해졌다.
"아직 약효과가 안떨어졌나보네."
얼굴이 화끈해졌다. 히마와리도 당황했는지 두 손을 쓰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내 두 팔은 히마와리의 허리를 꽉 껴안고 있었다.
"이상하네. 방금 전에는 아무런 자극도 없었잖아? 왜그러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부작용이 추가가 됐나?"
"돼, 됐고, 이거나 빨리 풀어줘요! 부작용 푸는거 없어요?!"
"어, 그거 말이지."
선생님이 과학 물품이 담긴 바구니를 꺼내왔다.
"히마와리는 이거 가져가라고 부른거고. 참고로 부작용은 누가 다시 자극해주기 전까지는 못풀어."
"그런게 어딨어요~!"
"둘이 알아서 잘 해봐. 난 수업이 있어서 이만."
선생님은 우리 둘만 남기고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이걸 어떡하지, 곧 수업이 시작될텐데,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억울해졌다. 그때, 드르륵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닫혔다. 히마와리가 문 손잡이를 굳게 잡고 있었다.
"...히마와리?"
여태껏 아무 말 없던 히마와리가 두 팔 안에 나를 가두었다.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이대로 있다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히마와리한테서 향긋한 향기가 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안나던 냄새인데. 히마와리의 손이 문득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머릿결이 곱네요, 사쿠라코."
대체, 뭔지. 다시 내 심장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녀석의 고동이 커졌다. 아아, 정말 싫다. 사쿠라코 지존 프로젝트를 돌려달라!! 이런 식으로 지존이 되는건 싫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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