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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히마사쿠]꿈 걷기

(3) 커팅 테이프

03


  텅 빈 복도였지만 확실히 수업은 진행되고 있었다. 작은 창문으로 살짝 들여다 본 교실 안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읽는 사람, 무언가를 쓰는 사람, 명상을 하는 사람, 가끔은... 구석에서 울고 있는 사람까지.

 

  "저런 사람들이 나중에 자멸할 가능성이 크겠네요..."

 

  당장에라도 들어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히마와리가 내 팔목을 잡았다.

 

  "감당하는건 스스로의 몫이에요. 결코 누가 도와줄 수 없어요. 그건 이승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현실에 부딪히고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주변에서 위로와 걱정을 해줘도 본인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끝없이 동굴 안으로 숨게 된다. 결국 자기 자신을 밖으로 이끌어내는건,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걸어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은, 아니 영혼들은 자기계발을 통해 자신이 누군지 또렷하게 알게 되고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고 한다. 저승에서조차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한다. 염라대왕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지난 삶이 결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깨닫고 결정하고, 후회마저도 스스로의 몫. 인간의 굴레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우리는 꽤 많은 교실을 지나치고 있었다. 혹여나 내 정체가 들키지는 않을까, 이제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가고 싶다. 아직 죽기 싫다. 내 곁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히마와리는 아마 스스로와 싸우는 중일 것이다. 따뜻함의 유혹이냐, 나의 삶이냐.

 

  "학교에서 영혼을 관리하는 사무소가 몇군데 있어요. 지금은... 교장실로 가볼거예요."

 

  교장실은 학생회실보다 조금 작았다. 책장에 책들이 빽빽히 꽂혀있었고 한쪽 벽에는 어느 여자의 자화상이 걸려있었다.

 

  "이승에서 흔히 말하는 염라대왕이에요. 자기계발을 마친 영혼을 다시 이승으로 보내시는 분이죠. 여기서는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러요."
  "아...."

 

  교장은 없었다. 덕분에 조금 안정을 되찾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문득 돌아본 히마와리는 나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는 족족 고개를 돌렸다. 계속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건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괴로운거 알아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 본분을 다 하는것 뿐이에요. 세상의 순리이기도 하구요."

 

  히마와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를 나서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말아요. 영혼들은...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모르니까."
  "알겠어요."

 

  그때,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나와 히마와리의 시선이 일제히 문 바깥으로 쏠렸다. 길고 노란 머리카락의 여자가 판사와 비슷한 차림으로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승에서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인지 앳된 소녀의 얼굴이었다.

 

  "자기계발을 끝내신 분인가요?"

 

  여자가 인자하게 웃었다. 저 사람이 교장...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오무로 사쿠라코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내 손은 그녀의 손을 통과해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어...어... 어라?"

 

  당황스러워서 안절부절하다가 그제서야 문득 죽은 자와 산 자는 접촉할수 없다는 히마와리의 말이 떠올랐다. 잠자코 손을 거두니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신... 아직 이곳에 오면 안되는 사람이군요. 어쩌다가..."
  "그 분을 이승으로 돌려보내려고 찾아왔습니다."

 

  히마와리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교장이 잠시 히마와리를 돌아보다가 빙긋 웃었다.

 

  "장하네요. 유혹을 참고 여기까지 인도하시다니."
  "어떻게 해주실순 없나요?"
  "글쎄요, 어디 한번 봅시다."

 

  히마와리가 교장에게 나에 대한 자료를 넘겼다. 우리는 한데 모여 소파에 둘러 앉았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교장이 내 자료를 검토하는 동안 히마와리는 줄곧 불안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오오무로 사쿠라코. 자료는 잘 읽었습니다. 클래스를 배정받지 않은걸로 보아 확실히 아직 살아계시군요."
  "저... 돌아갈 방법은 있는건가요?"
  "그 전에 이쪽의 이야기를 먼저 해드릴까 하는데요."

 

  교장이 손깍지를 끼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오면서 보셨을겁니다. 영혼들이 어떤 식으로 자기계발을 하고 있는지."
  "네... 보긴 봤어요."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들어볼수 있을까요?"

 

  내 머릿 속에는 아까부터 한 장면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구석에서 울고 있었어요."
  "그저 울고만 있던가요?"
  "네. 아무것도 못하고... 가서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슬퍼보였어요."
  "정말 다정한 분이시군요, 오오무로 씨는."

 

  교장이 싱긋 웃었다. 이상하게 칭찬이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사실 다음 생애로 환생활 확률은 60퍼센트 정도밖에 안됩니다. 절반을 간신히 넘긴 수준이죠. 오오무로 씨가 보신 그런 영혼들이 자멸할 확률이 자그마치 40퍼센트라는 소리입니다."

 

  아까 그 영혼이 자멸하는 모습이 갑자기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팔뚝을 움켜잡았다.

 

  "그런데, 자멸을 막을 방법이 있습니다."
  "어, 어떻게...?"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죠. 어린아이가 울면 달래주듯이."

 

  교장이 일어났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차갑습니다. 따뜻하게 안아줄수 없어요. 그래서 자멸할수밖에 없는겁니다. 하지만... 따뜻한 사람이 안아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교장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교장으로서 부탁드립니다. 따뜻한 사람이 필요해요. 히마와리와 같은 위치에서 함께 일해주신다면 자멸하는 영혼은 줄어들겁니다."
  "......."

 

  히마와리를 건너다보았다. 히마와리는 고개를 숙이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제 학생들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볼 때면... 이 일을 관두고 싶을 정도로 슬럼프에 빠집니다. 오오무로 씨, 저승으로 잘못 끌려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다른 영혼을 돌볼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주세요."

 

  구슬프게 울고 있던 영혼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 손으로 그들을 살릴 수 있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하지만 저는... 그들과 접촉할 수 없는걸요."
  "이 곳 생활에 익숙해지다보면 괜찮아질겁니다."

 

  히마와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덩달아 일어났다.

 

  "왜 그러세요?"
  "누가 찾아온 것 같아요."

 

  동시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서류를 들고 등장했다.

 

  "교장 선생님, 새로운 영혼을 신고하러 왔습니다."
  "아, 서류 이리 주세요."

 

  교장이 서류를 받았다. 이제 막 온 영혼이라 그런지 서류에 이름도, 사진도 없었다.

 

  "곧 마중나가야겠군요. 이름은 어떻게 되던가요?"

 

  교장은 서류를 들고 온 영혼의 말에 따라 인적사항을 적어내려갔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걸 교장 선생님이 받아서 적으시는건가요?"
  "여기에 이름이 적히면 이제 이 곳 학생으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저희가 거두는거죠."

 

  교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클래스를 정해주고 서랍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투명 테이프였다.

 

  "저걸 붙이면 이제 인적사항을 수정할수 없게 돼요. 완전히 저승사람이 되는 거예요."

 

  히마와리가 대신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러면서 교장이 아까 살펴보았던 내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렇다면..."
  "히마와리."

 

  교장이 다가와서 히마와리의 팔을 잡았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학교에서는 오오무로 씨가 필요해요."
  "...교장 선생님."
  "다정하고 따뜻한 오오무로 씨만 있다면, 우리 학생들은 전원 살 수 있습니다."

 

  히마와리가 들고 있는 서류가 미세하게 떨렸다.

 

  "교장 선생님... 질문... 해도 될까요?"
  "네, 해보세요."

 

  히마와리는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밀려왔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이 차가운 감촉이 이대로 나를 감싸버릴 듯한 기운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저는 아직 죽지 않은 오오무로 씨의 손을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승에 계시는 교장 선생님은 지금 제 팔을 잡고 계시죠."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가가 햇살인지 무엇인지 모를 빛에 물들어 반짝였다.

 

  "저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러고보니 히마와리는 이승의 나와 저승의 교장, 두 영혼과 접촉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히마와리의 말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히마와리는, 어떻게 된거죠?!"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교장은 내 손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가면서 보더니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답은 간단합니다. 히마와리, 당신은 죽은것도 산것도 아닌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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