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긴 복도의 끝이라고 했다. 아직 성치 않은 몸을 휠체어에 얹고 조금씩 복도를 헤쳐나갔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정말 나 한명 뿐이었다. 소리도 시간도 멈춘것 같은, 마치 꿈에서 본 저승과도 같은 곳이었다.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꿈이 현실로 다가올까봐 두려우면서도 꿈이 아니길 바랐다. 이승에서 다시 만나요, 꼭. 그 말을 지킬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휠체어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리 굴러갔다. 나는 문을 몇발자국 남겨두고 멈춰섰다.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 아직도 잠자고 있을까. 혹시 가족들이라도 있으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심장이 터질것 같아서 정신마저도 혼미해지고 있었다.
"...누구세요?"
그때, 뒤에서 경계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휠체어를 돌리며 올려다본 얼굴에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푸른 머리카락, 떨어진 눈고리, 오똑한 코, 교복까지.
"아... 저...."
입을 열어야 하는데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휠체어 바퀴를 꽉 잡고 고개를 숙였다.
"병실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여긴 제 언니 병실이에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언니 병실이라면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다.
"후루타니 히마와리... 아니신가요?"
학생이 빙긋 웃으며 가방을 가볍게 들춰맸다.
"저는 후루타니 카에데예요. 히마와리는 제 언니구요. 언니 친구분이세요?"
자매는 정말 생김새가 똑같았다. 목소리도 비슷해서 하마터면 아닌 사람을 붙잡고 못난 꼴을 보일 뻔 했다. 카에데가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비로소 용기를 내어 휠체어를 밀 수 있었다.
입구에서 바로 침대 끝자락이 보였다. 천천히 바퀴를 굴리자 발 끝이 보였고, 이내 힘없이 천장을 보며 누워있는 여자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에는 심장이 뛰는 소리와 인공 호흡기 소리가 전부였다. 깊은 꿈을 꾸는 두 눈은 굳게 닫혀있었다.
"음료수라도 드실래요? 오렌지 주스 있어요."
"감사합니다..."
"말 놓으셔도 돼요. 언니 친구분이시잖아요."
카에데가 주스를 가져다주었지만 그걸 받아들고 한동안 마시지 못했다.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머리카락은 생명력 없이 옆으로 쓰러져있었고 그 당돌한 눈빛은 볼수가 없다. 손가락 끝을 만져보니 따뜻했다. 내 손이 따뜻하다며 계속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은 나보다 따뜻했다.
"언니는... 언제부터 이렇게 된거야?"
카에데가 내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조심스럽게 몸을 기댔다.
"3년 전 즈음이었을거에요. 학원 차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사고가 컸어요."
"......"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처음 보는 분이신데."
"나는..."
내가 누군지 설명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나보고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떡을 급하게 삼킨 듯한 꽉 막힌 마음을, 이 기막힌 우연을, 히마와리의 차가움을 잊기 전에 전하고 싶었다.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그냥 들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분명 히마와리와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근처에 살지도 않았고 학교도 같은 학교을 나온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저승에 갔고,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나를 살리고, 죽은 듯이 누워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카에데는 시종일관 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나는 바보같이 혼자 흥분해서 눈물을 쏟고 있는데 카에데는 담담했다. 그녀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숨이 차서 더이상 말을 이어갈수가 없었다.
"사실... 언니가 이렇게 된지 3년이 지나서 언니가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크게 충격받지는 않을것 같아요."
카에데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언니는 3년동안 죽어있었던거나 다름 없으니까.... 그런데 저희 가족 대신에 언니를 만나주고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을거에요. 저도... 언니를 만난적이 있어요."
"...언제....?"
눈물이 조금 수그러들자 카에데가 나를 놓아주었다. 그 눈빛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한 얘기를 전부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느낀 모습이었다.
"언니가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 꿈에 찾아왔었어요."
줄곧 나를 향하던 그녀의 시선은 히마와리에게 옮겨졌다. 얼굴을 눈에 찬찬히 아로새기는 듯,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저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고... 그 말만 남기고 갔어요."
"......"
"아직 엄마랑 아빠한테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저 꿈이니까. 우리는 언니가 살아날거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카에데가 고개를 숙여서 얼굴을 감쌌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포기해야하는걸까요?"
나는 아까부터 히마와리의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 이어져있을것만 같았다. 이렇게 따뜻한데, 그렇게 멀리 갔을리가 없다.
"분명 여기서 만나자고 했으니까... 다시 돌아올거야."
비록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반드시 돌아와서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면, 정말 저 세상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거라면 분명 이쪽 길을 찾아올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카에데가 내 몸을 감싸안았다.
"언니를 한번만 더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저번처럼 그냥 보내지 않을거예요... 절대..."
"카에데..."
인위적인 기계 소리에 머리가 아파왔다.
기계 소리 대신에 히마와리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일어나셨나요?"
눈이 뻐근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눈을 마구 비볐다.
"그렇게 눈을 비비면 눈 상해요."
누군가가 내 손을 저지한다. 눈 앞이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생기있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히마와리..."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나요? 너무 오래 자면 머리 아플텐데."
시끄러워, 듣기 싫어. 모든걸 내팽개치고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히마와리가 휘청이더니 이내 잔디밭이 우리의 몸을 포근히 받쳐준다.
"왜 자꾸 주변 사람을 힘들게 만들어...?"
"...오오무로 씨?"
"네 동생도, 가족들도, 희망 한줌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어. 다들 힘겹게 너만 기다리고 있다고..."
그리고, 생판 모르는 나도 기다리게 만들었잖아.
"여긴 정말 따뜻해요. 그렇지 않아요?"
"...몰라."
"바람도, 잔디밭도... 이대로 잠들것 같이 황홀해요."
그녀의 품에서 얼굴을 들었다. 두 손으로 그 얼굴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너...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
"그런 얼굴 하고 있으니까 무섭잖아요..."
내 얼굴이 굳어있는게 느껴졌다. 이마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뻐근하다.
"살아있으면 돌아오라고, 저승에서 일 좀 해보겠다고 그러고 있지 말고!"
"저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에요."
"너 아직 안죽었어. 정신 차려! 다들 널 기다리고 있잖아, 그게 니가 살아있다는 증거야... 알겠어...?"
히마와리가 한쪽 눈을 감았다. 그 위로 물 한방울이 똑, 떨어진다.
"망할 교장 말 따위... 다 뒤집어버리고 돌아와... 제발..."
"......."
"나도 기다리고 있잖아, 나도... 이렇게...."
힘없이 그녀의 품 안에 다시 쓰러졌다. 이건 꿈이다. 히마와리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날리가 없잖아. 차라리 다시 잠들었으면. 다시 깼을때 현실이었으면.
히마와리가 몸을 꿈틀대다가 나를 일으켜세웠다.
"조금만 더 힘내볼게요. 지금은 잠시 쉬어가는거니까, 봐주세요."
"쉬어가는거라니....?"
히마와리가 조심스럽게 나와 이마를 맡대었다.
"열심히 당신의 온기를 따라가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승에서 꼭 만나요."
가슴이 뜨거워졌다. 마치 두꺼운 이불을 열겹씩이나 덮은 기분이었다. 몸이 무거워졌다. 다시 잠에 빠져들 듯이 눈을 감았다. 봄바람 한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두근, 두근, 잊지 않고 꼭 잡고 있었던 손이 생명을 얻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눈을 살며시 뜨자, 다시 히마와리가 보였다. 생기있던 머리카락은 어디로 가고,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과 생기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입에는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고, 손등에는 얄궂은 바늘이 꽂혀있다. 산소 마스크가 뿌옇게 따뜻한 숨을 품는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본다. 길고도 짧았던 인연을 되돌린다.
"...어서와."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지자 야윈 손이 따스히 내 뺨을 어루만진다.
우리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정말 길고, 따뜻한 꿈이었다.
>다음 편이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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