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짖궂은 비가 내린다. 가벼운 여름비다. 톡톡, 땅 위에서 빗방울들이 리듬을 맞춘다. 톡톡, 그에 맞춰서 발 끝으로 시간을 세어본다. 하나, 둘, 셋....
"오래 기다렸어요?"
내 발치에서 바퀴가 멈춘다.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우산을 펼쳐들었다.
"방금 왔는데 뭐. 가자."
무릎을 꿇고 등을 내밀자, 툭 내 등 위로 몸이 던져진다.
"읏차."
힘없는 몸을 들춰업고 우산을 들었다. 빗 속으로 한발자국 내밀자 빗물이 시원하게 우산을 때린다. 비에 맞는게 싫은 나약한 풀 한포기가 내 등에 더 바짝 달라붙는다.
"비오는 날은 진짜 싫어요."
"그래도 시원하잖아."
"괜히 고생하잖아요."
"어, 그거 나 걱정해주는거야?"
"누가요?! 제 몸 가누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기분 좋게 내 목을 감싸온다.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진다.
서둘러 풀 한포기를 조심스레 조수석에 옮기고 휠체어도 마저 가져왔다. 비 오는 날은 분명 힘이 두배로 들지만, 반대로 힘이 두배로 나는 날이기도 하다.
"집으로 갈거지?"
"집으로 가요...?"
무심하게 툭 던지니 과연 입이 삐죽 튀어나온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다.
"집 밖에 더 있나. 늦깎이로 공부하느라 힘드신 몸 뉘이셔야지."
"예, 집으로 가요."
빙그레 웃으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은근 다루기 쉽다. 재밌기도 하면서.
어느새 나는 직장에 들어갔고 히마와리는 밀린 3년 공부를 하느라 처음부터 다시 애쓰는 중이었다. 재활만 해도 몇년이 걸렸는지. 3년 내내 누워있던 그녀의 몸은 갑작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몇번 좌절했었다. 그 옆에서 함께 재활을 받고 있는 나는 점점 나아지고 있는데, 히마와리는 숟가락을 드는 것 조차 힘겨웠으니 말이다.
말없이 우는 날이 많았다. 밥을 먹다가도 울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울고, 책을 읽다가도 울었다. 그럴때마다 괜히 그 슬픔이 나한테도 번져서 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꽤 훔쳤다. 다시 일어난건 정말 기적이었지만 그 이상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롯이 본인의 몫이었다.
"히마와리, 왜 그래? 화났어?"
운전하면서 흘끗 훔쳐보니 창 밖을 보면서 아무 말이 없다. 원래 노래를 틀어놓고 흥얼거리거나 오늘 배웠던걸 늘어놓기 바쁠 시간인데.
"운전이나 해요."
"...응, 알겠어."
이번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이러다가 이따가 맞는건 아닌가 모르겠다. 재활 속도는 느렸지만 그만큼 얼마나 많은 힘을 비축해두었는지, 때리는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지난 세월동안 맞아서 멍든게 몇군데였더라....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휠체어를 내리고 히마와리를 태우자마자 기다리지도 않고 대뜸 쌩하니 가버린다. 단단히 삐졌다.
"아아, 같이 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걸 간신히 잡아서 함께 탔다. 삐져도 좀 티 안나게 삐지던가. 얼굴에 다 쓰여져있으니 더 골리고 싶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느때처럼 아무도 없다. 히마와리의 부모님은 밤 늦게서야 일을 마치고 올거고 카에데도 공부를 마치려면 좀 있어야 한다.
"쉬고 싶으니까 가주세요."
"휠체어는 갈아타셔야죠."
야윈 몸을 번쩍 들어서 집에서 타는 휠체어에 올려주니 다시 휑하니 들어가버린다. 밖에서 타던 휠체어를 접어서 현관 한쪽에 두고 쫓아들어갔다.
"...가라니까요? 프레젠테이션 준비 있다면서요."
"그 전에 할건 하고 가야지."
다시 히마와리를 안아들었다. 도망도 마음대로 못가는 몸이 내 품 안에서 움찔거린다. 그대로 방 안에 데리고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앉혔다.
"지금 뭐하는거예요?"
"내가 설마 잊었을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나 그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해바라기 한다발을 꺼내들었다. 히마와리의 얼굴에 그제서야 웃음이 조금씩 번졌다.
"6월 16일, 생일이잖아. 축하해."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힘들다고 해서 잊어버린줄 알았는데...."
"그거랑 이건 별개지."
히마와리가 뿌듯한 표정으로 해바라기를 안았다. 언젠가 자신의 무덤에 해바라기 한송이를 놔달라고 부탁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내 앞에서 웃으면서 해바라기를 쥐고 있다. 이건, 꿈이 아니겠지.
자신과 꼭 닮은 꽃을 안고 있는 히마와리를 감싸안았다.
"정말 긴 꿈이었어."
"또 그 소리. 자꾸 이야기해도 난 못알아들으니까 그만해요."
히마와리는 나에게 했던 말이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저승에서 있었던 일도, 깨어나기 직전에 함께 잔디밭에 있었던 것도, 전부. 다만 깨어나고 내 뺨을 어루만진건 어딘가 모르게 자신이 고생시킨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고 했다. 내가 숨이 벅찰 정도로 슬픈 사람처럼 보였단다. 내 이름을 물어봐올때 적잖게 충격을 받았지만 차근차근 나에 대해서 알려주고, 차츰 친해져갔다. 그 결과로 지금은 기사 노릇을 하고 있지만.
꿈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처럼 아득히 묻혔다. 나만이 생생히 기억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나 이제 정말로 가볼게. 좀 있으면 카에데 오니까 그때 성대하게 파티 해. 미안."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요. 언젠가 열심히 따라잡을테니까."
"당연하지. 내가 3년동안 자고 있던 사람한테 질것 같아?"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니 얼굴을 찡그리면서 손을 올린다. 그대로 내 손을 쳐낼것 같더니, 그 대신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는 언젠가 잔디밭에서처럼 서로의 품에 안겼다.
"제가 정말 많이 좋아하는거 알고 있죠?"
"....응."
"제 못난 모습까지 다 지켜봐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나도..."
고개를 들었다. 다시 따뜻한 잔디밭에 누워있는것 같다. 비록 히마와리는 그때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잊을수 없을것 같다.
"나도 너 많이 좋아해."
이불을 열겹 덮은 듯 방 안 공기가 더워졌다. 히마와리의 따뜻한 손을 맞잡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아마 아득히 먼 곳에서 나에 대한 기억을 꺼낼수 있을때까지 몇번이고 히마와리의 기억을 자극할 것이다. 평생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평생동안 끈질기게 달라붙으면서 알려줄 것이다. 그 날 잔디밭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 바람이, 이마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빗방울이 창에 부딪히는 소리에 마음이 잔잔히 울린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꿈이 물결을 타고 일렁인다.
일렁이다가, 가슴을 파고 스며든다. 아무도 꺼낼 수 없는 깊은 곳으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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