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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히마사쿠]천사를 보았다

(1) 처음 보는 아이

  사람들이 지나간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나와, 눈을 마주치거나 그것조차 부담스러워하며 그저 스쳐지나간다.
  그 사람들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사람이.

 

-------

 

 

 

01

 

 

  실전에서의 함성소리는 늘 사쿠라코를 아득한 고동 속에 던져놓는다. 그 고동은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듣는 것 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아 두렵기도 하지만, 주심의 입에 호루라기가 물리면 순식간에 머리가 맑아지면서 주변이 밝아진다. 삑-! 그 소리에 사쿠라코는 아득함에서 깨어나 다시한번 머리를 두드린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경기가 시작됐다. 상대편이 선공을 시작했다. 사쿠라코는 2루와 3루 사이의 외야수를 맡았다. 첫번째 주자가 공을 힘껏 찼다. 그러나 공은 내야에 떨어져 금방 잡혔다. 간단히 아웃. 두번째 주자, 이번에는 꼼수를 부려 일부러 3루 쪽으로 공을 툭 건드린다. 파울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간 공을 잡으려 투수가 뛴다. 그 와중에 주자는 1루에 도달했다.

 

  "얍삽하네... 예선인데 벌써부터."

 

  사쿠라코가 혀를 찼다. 순서는 빠르게 넘어간다. 어느새 3루를 모두 상대편이 메우고 있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에이스가 등장했다. 덩치가 상당하다. 발길질 한번에 이쪽으로 넘어오겠지. 주자가 공을 찼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외야수로 넘어온다.

 

  "사쿠라코, 잡아야돼!!"

 

  잡지 못하면 홈런으로 네 점을 뺏길수도 있는 높이였다. 사쿠라코는 냅다 달렸다. 공은 바깥으로 자꾸만 벗어나려 했다. 저편으로 향하고 있는 공은, 마치 이번 경기에서 이변을 가져다주려는 듯이 골탕먹이고 있었다. 더 이상 힘을 빼지 말고 홈런으로 놔줄까. 모두의 눈이 사쿠라코를 쫓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그리고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때도 타지 않은 하얀 피구공이 두 손 가득 뿌듯하게 쥐여져있었다.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주심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웃-!"

 

  아, 해냈다. 그녀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관중들을 돌아보았다. 반 친구들이 대부분의 관중석을 메우고 있었다. 반 친구들에게 신나게 손을 흔들다가, 익숙한 눈과 마주쳤다.
  그 아이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사쿠라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쿠라코는 그 눈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옷을 털고 돌아섰다.
  정말 귀신같은 녀석이다. 공을 투수에게 던졌다. 사쿠라코의 손을 떠난 공이 바닥에 튕겨질 때마다 사쿠라코는 속이 울렁거렸다. 아웃시킨 통쾌함마저 사라졌다.
  빨간색 '주장' 마크가 세차게 흔들렸다.

 

***

 

  사쿠라코는 지역 발야구 대회에 나갈 수 있는 기회에 발탁되었다. 예선에 나가기 전부터 그녀는 주장이라는 무거운 짐에 시달리며 열심히 방과후 연습을 했다.
  발야구란 학교에서 시간이 날 때 재미삼아 하는 놀이에 불과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거금의 상금이 걸린 지역 대회가 되어버렸다. 우선, 구역을 나눠 각 구역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하나씩 선출한다. 선출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학교별로 의논을 해서 양보를 하는 경우도 있고, 정정당당하게 경기를 치뤄서 출전권을 따내는 학교도 있었다. 방식은 자유였지만 어쨌든 상금이 걸린 경기였기에 작은 학교가 아닌 이상은 모두 예선을 치뤄 출전권을 따는 형식이었다. 사쿠라코네 고등학교에서는 방과후에 운동하는 습관이 잘 길러진 학교였고, 따라서 주변 두어개의 학교에서 알아서 뒤로 빠져준 덕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토너먼트 경기식으로 해서 총 15개 정도의 학교를 꺾어야 우승을 거머쥘 수 있다.
  사쿠라코는 안그래도 승부욕이 강한 편이다. 게다가 주장이 되었으니 연습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체육관에 늦게까지 남아서 공을 차는 연습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사쿠라코를 매일같이 지켜보는 아이가 있었다.

 

  "발야구, 잘하시네요."

 

  그 아이는 지쳐서 드러누워있는 사쿠라코에게 스포츠드링크를 건냈다. 처음보는 얼굴이라 사쿠라코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그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그런 태도를 예상했다는 듯이 그 아이는 당황하지 않고 느닷없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양갈래로 차분히 땋아내린 머리카락, 숨이 막힐 듯이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자세.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그 아이의 등을 노을이 노랗게 살라먹고 있었다. 순간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 고마워."

 

  사쿠라코는 일어나 앉아서 드링크를 받았다. 아무래도 저 아이는 이 쪽을 알고 있는 듯 하다. 이 상황에서 이름을 물어보면 어쩐지 실례가 될 것 같다.

 

  "왜 이 시간까지 안가고 있어?"

 

  사쿠라코가 물었다. 물어보면서 머릿속이 조금 간지러웠다. 처음 보는 앤데 늘 만나던 사이처럼 말을 걸다니. 그러나 그 아이 역시 사쿠라코를 처음보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쿠라코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마주보았다.

 

  "성실하시네요. 매일같이 연습을 하시다니."
  "매일같이....?? 날... 매일 보고 있었어?"
  "체육관에 공 튀는 소리가 나길래 와보면 늘 사쿠라코가 있어서..."

 

  사쿠라코. 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사쿠라코는 공으로 등짝을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나 저쪽은 사쿠라코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난 왜 처음 보는 얼굴이지?
  그러나 처음 보는 아이는 별 일 아니라는 태도였다.

 

  "늘 혼자 다니다보니 주변을 둘러보는 습관이 생겼거든요. 여유로운 날에는 여기서 학생들이 운동하는 걸 구경하기도 하는데, 요즘엔 사쿠라코가 있네요.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아, 아니야. 괜찮아. 곧 전국 대회가 열리니까."

 

  방과후에는 전국 대회를 위해 발야구 선수들에게 체육관을 양보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딱히 불편하게 다가오지도 않고, 무리해서 대화를 걸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다만 그녀가 사쿠라코를 알고 있는 것에 비해 사쿠라코에게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유감일 뿐이었다. 게다가 늘 혼자라니. 혹시 너무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는 친구인가.

 

  "이만 가봐야겠어요. 연습은 적당히 하시는게 몸에도 좋을 거예요. 그럼."

 

  그녀는 일어나서 교복 치마를 정돈하더니 이내 다시 싱긋 웃었다. 사쿠라코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어... 잘 가."

 

  점점 작아지는 그 등을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제 이름은 후루타니 히마와리예요. 혹시 모르실까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체육관 커튼을 활짝 걷었다. 이 땅에 완전히 물든 노을이 순식간에 사쿠라코의 눈을 찔러왔다. 간신히 앞을 볼수 있게 됐을 때, 그 작은 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파란 스포츠드링크가 송글송글 맽힌 땀으로 사쿠라코의 손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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