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코네 팀은 차근차근 우승을 거머쥐어갔다. 히마와리와 그렇게 결론을 지은 이후로 사쿠라코는 별 사념 없이 발야구에 집중했다. 히마와리가 찝찝하다가도 공을 잡으면 곧바로 공에 집중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사쿠라코는 여전히 발야구에 열정이 있었고, 실패하기 싫었고, 무엇보다도 졌을 때 자신을 증오하게 되는 순간만은 피하고 싶었다.
결승이 두 단계정도 남았다. 사쿠라코는 푹 쉬라는 감독님과 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학교 체육관에 남았다. 학교 체육관은 제일 안쪽에 있어서 수업이 끝나고 저벅저벅 걸으며 잡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았다. 정문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었다. 사쿠라코는 한 쪽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실내화를 찍찍 끌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생각없이 쭉 걸어 체육관 앞에 도착해서 모래가 묻은 실내화를 탁탁 털고 있었는데, 눈을 살짝 들자 체육관 2층 난간에 누군가가 기대어있는 것이 보였다. 문득, 사쿠라코는 자신도 모르게 히마와리인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신발을 대충 구겨신고 체육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질수록 히마와리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 색이 짙은 자주색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 사람은 난간에 기대어있는 것이 아니라 난간에 올라가 앉아있었다.
"거기 있으면 위험해요!"
사쿠라코는 밑에서 방방 뛰면서 그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서로 눈이 맞았다. 질끈 묶어올린 포니테일이 찰랑거렸다. 그녀는 사쿠라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허둥대기 시작했다.
"아! 내가 언제 올라왔지??"
"기, 기다려요! 제가 갈게요!"
체육관 2층이라고 해도 1층에 잘못 떨어지면 발목이 하나 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사쿠라코는 곧바로 체육관 입구 옆에 있는 계단을 뛰어올라가 2층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거짓말같이 사라져있었다.
"...뭐지?"
중얼거리면서 아까 그 여자가 걸터앉아있던 난간으로 가보니, 1층에서 다시 짙은 자주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어떻게 내려간거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두 군데. 모두 입구 쪽에 있다. 올라가는 동안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입구에서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어느 틈에...
여자도 사쿠라코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2층에 있는 사쿠라코와 눈이 맞고는, 다시 허둥댔다.
"아!! 저 때문에 죄송해요..."
사쿠라코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서 여자와 마주했다. 그녀는 조금 부끄러운 듯 시선을 밑으로 깔고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보인다. 사쿠라코는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이 학교 학생이라면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방금 전의 행동도 쓸데없는 참견이었을 수도 있다.
평범한 사복이라 이 학교 학생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사쿠라코와 마주치기 전에 그녀는 난간에 가만히 걸터앉아서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무슨 냄새를 맡는 것처럼.
"미, 미안해요. 이만 가볼게요."
여자는 입을 꾹 다물고 사쿠라코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역시 별로 신경쓸 일이 아닌데 괜히 간섭했나. 사쿠라코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잠시 뻘쭘해하고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살짝 여자를 돌아보니 그녀는 멈춰서있었다.
"혹시..."
여자가 돌아섰다. 그녀의 눈은 방금 전에 어색해하던 눈빛이 아니었다. 사쿠라코를 똑바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사쿠라코는 그 눈에 잡아먹힐 듯이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뒷걸음이라도 치고 싶었는데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동안 사쿠라코를 응시하더니,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고 몸이 움직여졌다. 요즘들어 정말 진귀한 경험을 많이 한다. 별 일 아니었다는 사실에 가슴을 진정시키려는데 여자가 다시 사쿠라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거긴 창문이에요! 입구는 저쪽!"
여자가 창문을 기어오르다가 멈칫하더니, 잰걸음으로 입구를 향해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 학교 학생은 아닌 듯 하다.
쿄코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 좀 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책이라면, 학교 도서관 말고도 시립 도서관같은 곳이 있을텐데 쿄코는 굳이 사쿠라코네 학교에서 꼭 좀 부탁한다는 말 뿐이었다.
"있는지 없는지는 저도 몰라요."
[없으면 말고. 부탁할게.]
책 제목을 받긴 했지만 혹시라도 도서관에 가면 히마와리와 마주하게 될까봐 거북해졌다. 요즘에는 통학시간에도 복도에서도 도통 만날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이쪽을 먼저 보고 길을 피한 것이겠거니, 싶다.
사쿠라코는 내내 도서관 가는 것을 미루다가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이 거의 문을 닫기 직전에서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도서관 위원들이 마지막으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책만 금방 찾고 나갈게요."
양해를 구하면서도 혹시 히마와리가 있지는 않은지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책을 다 찾을 때까지 히마와리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감쪽같다. 요즘도 하루종일 나를 감시하고 있는건가? 이쪽의 행동을 묘하게 꿰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책을 찾았다.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을 한 것 보면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닌 것 같다. 대여하고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사쿠라코를 불러세웠다.
"저기요!"
돌아서니 저번에 히마와리가 사쿠라코와 이야기하기 위해 대신 책 정리를 부탁한 친구였다.
"네?"
"혹시 히마와리 이야기 못들으셨나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히마와리 일을 나에게 묻지?
"히마와리가 아프다고 며칠째 학교를 안나오고 있는데, 혹시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아시나 해서..."
"히마와리가 아프다구요?"
어쩐지, 안보여도 너무 안보인다 싶었다. 며칠동안 아픈거라면 병이 꽤 심한건데.
"미안해요. 저도 잘..."
"아... 저번에 같이 이야기하는거 보고 친한 친구이신줄 알았는데..."
친한 친구... 그 말에 사쿠라코의 입가가 씰룩댔다.
"그냥 잠깐 인사만 하고 지나간 친구예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 말만 남기고 도서관을 나왔다.
'히마와리가 아프던 말던 내가 알 바는 아니야.'
사쿠라코가 생각했다. 히마와리 주소를 아는 것도 아니고. 연락할 방도도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휴대폰을 꺼내 쿄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책 빌렸어요. 이따가 만날까요?"
늘 보던 카페에서 이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장소를 옮겨볼까. 사쿠라코가 애먼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매번 보이는 풍경에 슬슬 질려가던 차였다. 쿄코는 마주앉아서 사쿠라코가 건내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책이었다.
"이 책을 학교 다닐때 도서관에서 몇번 읽었는데 최근 필요해졌지 뭐야. 근처 도서관에서 찾아봤는데, 없더라고. 그래서 혹시 다른 학교에는 남아있나 했지."
"연장도 가능하니까 천천히 보세요."
"그럴까?"
쿄코가 책을 덮고 사쿠라코와 마주보더니, 눈을 두어번 끔뻑였다.
"안좋은 일 있어? 표정이 굳어있네."
"네? 아뇨? 전혀 없는데."
사쿠라코는 급하게 웃어보였다. 쿄코는 '흐응~'하더니 음료를 쭉 들이켰다.
"요즘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그런가봐요. 슬슬 훈련도 지쳐가고."
이어 대꾸하다가 문득 체육관에서 마주친 이상한 여자가 떠올랐다.
"사실요, 며칠 전에 체육관에서 이상한 여자를 봤어요. 2층 난간에 걸터앉아있더라구요."
"엥? 큰일날 뻔했네! 다친덴 없고?"
"혹시라도 큰 일 생길까봐 제가 2층을 올라갔는데 이미 1층에 있더라구요. 눈 깜짝할 사이에. 약간 짙은 자주색 머리였는데, 혹시 아세요?"
쿄코가 신나게 음료를 마시다가 멈칫했다.
"꼭 누굴 찾아온것 같았어요. 근데 어떻게 왔냐니까 도망치듯이 가버리고... 그거 하난 재밌었어요. 아니, 조금 무서웠던것 같기도 해요. 그 눈 진짜...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쿄코는 어느새 음료를 다 마신 상태였다. 컵을 천천히 내려놓더니, 책을 들고 조용히 일어났다.
"아,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봐야할것 같아. 저녁을 해놓는다는게 깜빡했네."
"그럼 슬슬 가야죠. 먼저 가세요."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쿄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선배도 저녁 늦게 드시네. 나는 집에서 대충 먹고 나왔지만.'
사쿠라코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스름 해가 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해가 지면 선선하다. 천천히 걸어볼까. 가로수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그 사이를 유유히 걸었다.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다. 아무도 방해받지 않고, 편안한 시간. 때마침 사람도 별로 없다. 노래를 들으면서 가려고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았다. 아무렇게나 감겨있는 이어폰을 꺼내다가 줄들이 서로 엉키는 바람에 놓쳤다.
"아이 참..."
허리를 숙여 이어폰을 주웠는데, 옆에 껌자국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하여튼 요즘 사람들은 껌을 아무데나 뱉어내는게 문제라니까. 사쿠라코가 혀를 차면서 고개를 들다가 멈칫했다. 껌자국이 드문드문 일렬로 쭉 펼쳐져있었다. 왼쪽 오른쪽 왔다갔다 자국을 남겼다. 희안하게도 뱉어놨네. 껌자국은 모퉁이를 돌아, 밤이 되어 잠시 중단된 공사현상까지 이어져있었다. 호기심에 쭉 따라가보았는데, 어느순간 껌자국은 사라졌다.
"나도 참 이상한 호기심이다."
중얼거리면서 돌아섰다. 조금 있으면 준결승전이다. 컨디션 조절을 해야지.
그런데, 공사장 안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라도 있는 건가? 휴대폰 후레쉬로 비춰가며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보았다.
"흑... 흐윽..."
자세히 들어보니 고양이 소리가 아니라 사람 소리였다. 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인 듯, 목소리가 여렸다.
'연인이랑 전화로 싸우고 여기 와서 쳐우는 건가. 민폐다, 민폐.'
거기에서 그쳤으면 사쿠라코는 그대로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후레쉬에 잠깐 익숙한 머리카락이 비춰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다가 사쿠라코는 그대로 폰을 집어던지면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히, 히마와리?!"
히마와리가 입을 꾹 막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볼을 따라 주르륵 흐르더니 바닥으로 주체없이 떨어졌다. 이미 눈물자국이 그 주변에 잔뜩이었다.
"사쿠... 윽...."
히마와리도 놀라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어금니를 다물었다.
"너 여기서 뭐해?"
반가움 반, 불안함 반으로 더 다가갔다. 히마와리가 입을 막던 손을 내리더니, 크게 심호흡했다.
"오지 마세요! 제발..."
"....어?"
거의 절규하다시피 한 외침이었다. 사쿠라코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오면 안돼요..."
"무, 무슨 말을 하는거야?"
히마와리가 눈이 부실까봐 후레쉬를 조금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히마와리의 왼팔에 깊은 상처가 보였다. 아, 껌자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히마와리의 핏자국이었다. 피가 한줄기를 이루며 옷을 적시고 있었다.
"너, 너, 너, 대체 무슨 일이야?!"
"오지 말라고 했어요!"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무언가에 괴로워하면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동안에도 히마와리는 눈물을 쏟고 있었다. 사쿠라코는 경찰과 구급차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신은..."
히마와리가 울먹이면서 입을 열었다. 푹 숙인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 사이로 히마와리의 눈이 보였다.
'당신은 나를 알면 안됐어...'
그러나 그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히마와리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사쿠라코는 어디에 신고할까 고민만 하다가 순간, 짙은 자주색 머리의 여자를 떠올렸다. 그 눈과 똑같았다. 실례했습니다, 라고 무미건조하게 뱉던 그 표정과.
히마와리가 다시한번 깊게 심호흡하더니, 허리를 간신히 들어올렸다. 이윽고 서로 마주했다. 히마와리는 방금 전까지 단호하던 그 태도와는 정 반대로, 주저앉아서 엉엉 울며 떼를 쓰는 아이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5)에서 계속
'단편 > [히마사쿠]천사를 보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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