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두들, 잔에 사이다 채웠지?"
감독이 사이다를 높이 추켜올렸다. 모두들 그 행동에 맞춰 잔을 들어올렸다. 형형색색의 음료수가 계단을 이루듯이 제각각의 높이로 고개를 들었다.
"자! 그러면 우리 팀의 주장, 사쿠라코의 건배사가 있겠습니다!"
사쿠라코가 어물적 일어났다. 사실 사쿠라코가 맡은 외야쪽으로 넘어온 공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공을 재치있게 차는 선수는 있었으나 높고 멀리 차는 선수가 많이 없는 학교였다. 사쿠라코는 이번 경기에서 자신의 활약이 제일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잔을 든 손이 조금 부끄럽다.
"오늘 첫 경기 수고 많았어. 앞으로도 실수 없이 이대로만 갔으면 좋겠다. 나나모리 여자 고등학교 파이팅!"
한 번씩의 건배가 오가고, 모두들 배가 고팠던 탓에 앞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막 구워진 고기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갔다. 사쿠라코 역시 음료수를 마시랴, 고기를 먹으랴 정신이 없었다. 지금만큼은 발야구에 대한 걱정을 모두 덜고 먹자판이 되었다.
갑자기 사쿠라코의 휴대폰이 울렸다. 가족들의 축하 연락인가 싶어서 반갑게 받았는데, 아는 선배의 연락이었다. 그녀는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아, 선배? 잘 지내셨어요?"
발야구 때문에 최근 주변 친구에게 신경 쓸 새가 없었던 탓에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사쿠라코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연습하느라 많이 바빴지?]
"아, 아뇨, 먼저 연락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우리 사이에 무슨. 예선 통과 축하해.]
"저는 오늘 한거 없어요. 팀원들이 잘 해준 덕분이죠."
[갈수록 상대는 어려워질테니까, 열심히 해.]
호탕한 웃음이 울려퍼졌다. 사쿠라코는 그 웃음에 전염이 된 듯이 살며시 미소지었다. 토시노 쿄코는 중학생 시절부터 쭉 이어오는 사쿠라코의 둘도 없는 인연이다. 사쿠라코는 쿄코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불안했던 마음이 모두 가라앉았다. 비록 고등학교는 다른 곳으로 갔지만 아직까지 연락하는 데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선배'라는 말이 입버릇이 되어 다른 학교가 되어도 계속 선배라고 불렀지만 쿄코는 신경쓰지 않았다.
사쿠라코는 문득, 최근 쿄코와 연락을 한게 언젠지 궁금해졌다. 잠시 통화를 멈추고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최근 메세지를 주고받은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저기 선배, 내일 시간 되세요?"
때마침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관중석에서 사쿠라코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 그 아이에 대해 정리도 할 겸, 조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마 재밌을거예요."
그러나 그 말과는 달리, 사쿠라코의 표정은 조금 굳어있었다.
물론, 사쿠라코는 첫 만남 이후에 그 이름을 금방 잊어버렸다. 해바라기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발야구 주장은 너무 바쁜 몸이었다. 고된 연습 때문에 사쿠라코는 아침에 늘 늦잠을 자기 일쑤였고, 담임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 음료수를 받고 난 이후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 일은 그림자처럼 사쿠라코를 계속 쫓아다녔다.
"음료수 정말 좋아하시네요."
어느날은 자판기 앞에서.
"우산은 가져오셨나요?"
또 어느날은 학교 신발장에서.
"밥은 꼭 챙겨드세요."
그리고, 옥상 위까지.
사쿠라코가 어딜 가든지 히마와리가 있었다. 그 아이가 사쿠라코를 따라다니는 것인지 사쿠라코가 그 아이를 따라다니는 것인지 모를 이상한 전개였다. 처음에는 친구가 되고싶은건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말 이외에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서로의 공간을 구별하는 듯이.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 듯이.
예선이 코앞이었기에 사쿠라코는 그 아이를 애써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복도를 스쳐지나가다가도 보이는 그 얼굴에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데 히마와리의 얼굴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쿠라코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후루타니 히마와리라는 아이는 바로 옆 반이었고, 반에서 공부를 가장 잘한다는 것. 늘 책을 가지고 다니며, 도서관 위원이다.
"...이래서는 제가 스토커... 같네요...."
고개를 푹 숙이자 쿄코가 음료수를 들이키면서 허허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인연이 있다니. 하다못해 쿄코와도 학교 방과후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절대 친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히마와리는 아무도 모르게 사쿠라코의 세상에 들어와있었다.
"그냥 네 팬 아니야? 너, 학교에서 꽤 유명하다며."
"열심히 하니까 눈에 띄는 것 뿐이겠죠. 딱히 발야구를 잘하는 것도 아니예요. 차는 것도 잘 못하고. 굳이 장점을 말하자면 공에 겁이 없는 정도려나요...."
사쿠라코는 고개를 들어 에이드를 한모금 마셨다. 그러고나서 보니 그녀가 시킨 에이드는 블루레몬에이드였다. 파란 배경 사이로 탄산들이 참지 못하고 위로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 날, 사쿠라코의 손을 적신 파란 스포츠드링크처럼. 손톱으로 잔을 툭 건드렸다. 이것도 일종의 필연일까.
"차라리 친구가 되자고 다가와주면 편할텐데요. 딱히 그럴 마음도 없어보이는데 왜 자꾸 말을 걸어오고, 제가 있는 곳에 매번 있는건지."
"그럼 이 카페 안에도 있겠네? 그 아이."
"...아, 소름..."
으슬으슬 떨며 팔뚝을 쓸어내리니 쿄코가 픽 웃었다. 그 웃음에 사쿠라코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당사자가 아니면 일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지.
"음, 이건 그냥 생각나서 말하는건데 말이야."
"네..."
"널 좋아하는거 아니야?"
사쿠라코는 탁자에 붙어있다시피 구부정하게 빨대를 잘근거리다가, 그 말에 고개를 확 들었다.
"언제 봤다고 좋아한대요?! 에이, 설마! 설마 설마 설마!"
딸랑, 손님이 들어왔다. 그 소리에 그녀는 무심코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녹색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사쿠라코는 쿄코의 말에 당혹스러워하는 그 표정 그대로, 다시 그 아이와 마주했다. 히마와리도 놀라며 이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히마와리는 인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사쿠라코는 그 인사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다시 숙였다. 아, 정말 뭘까. 저 애는.
날씨가 꽤 더워졌는데 아직 매미는 울지 않는다. 정말 다행이다. 매미소리라도 났으면 더위가 더해져서 머리가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쿄코는 앞서 걷다가 돌아서서 사쿠라코의 등을 토닥였다.
"설마 내 말이 씨가 될줄이야."
"이제 심각함을 좀 아시겠어요?"
쿄코가 안쓰럽다는 듯이 사쿠라코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사쿠라코는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 문제를 대체 어떻게 전해야하나. 막막해지려는 찰나, 쿄코가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입을 열었다.
"사람의 직감은 믿을만하지 않을까?"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그 표정에 쿄코가 덧붙였다.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갑자기 어느날 고기가 너무 먹고 싶으면, 그건 몸에서 단백질이 필요하다는 신호니까 다이어트고 뭐고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한다고."
"...아....?"
"그러니까, 어느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면 그건 필시 이유가 있을거야."
"제발 그 애가 저를 좋아한다던가, 그런 말은 그만..."
사쿠라코가 주먹을 꽉 쥐며 쏘아붙이자 쿄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놀리는 건 이 쯤 해야겠다.
이내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졌다. 날씨가 덥기 때문인걸까. 전혀 상쾌하지 않다. 곧 큰 거리에서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했다. 조심히 가세요. 잘 가. 다음에도 우승해! 쿄코는 그렇게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러나, 사쿠라코는 왠지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두고 온 물건이 있다.
"갑자기 음료수가 먹고 싶어서 혼자 나왔다고..."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까부터 안색이 안좋아요."
어느새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와 조금 전의 카페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사쿠라코는 잠시 고찰에 빠졌다. 숙제를 할 때도 이것만큼 고민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의 속을 모르고 천진하게 음료수가 시원하다며 행복하게 웃었다.
"혼자서 잘 다니는구나..."
"그럼요. 늘 혼자였으니까요."
"그래서 혼자 음료수 먹으러 카페도 오는구나... 하필이면 내가 있는 곳으로..."
사쿠라코가 아까부터 계속 턱을 괴며 달갑지 않은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히마와리는 그 시선을 즐기는 듯이 편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쉽게 내놓을 것 같지도 않다. 히마와리는 빨대를 입에 거의 박다시피 하며 말을 아끼고 있었다. 음료수에 흠뻑 취한 모양이었다. 음료수가 모두 사라지고 컵의 바닥이 드러나서야, 히마와리가 사쿠라코를 바라보았다.
"아, 목이 너무 말라서 실례했네요. 아까는 기뻤어요."
"뭐가?"
"처음으로 저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셨잖아요."
"...아, 그랬지."
쿄코를 배웅하고 다시 카페로 돌아와 혼자 앉아있는 히마와리를 발견할 때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실, 아직 카페에 머물러있는 히마와리를 보고 잠시 안심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있을 지 모르니까. 사쿠라코는 본격적으로 히마와리를 떠보기 시작했다.
"혹시 발야구에 흥미 있어?"
"아뇨, 전 운동을 잘 못해요."
"아니면 친구가 필요해?"
"친구는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도 만족해요.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요."
"내 입으로 말하기엔 뭐하지만 내 팬이라던가."
"굳이 말하자면 팬이겠죠?"
"...혹시... 정말 혹시... 날... 좋... 좋...."
히마와리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입이 터질 듯이 간질간질 올라오던 말은, 결국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사쿠라코는 어느새 쿄코가 한 말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취재당한 기분이에요. 호기심이 많네요, 사쿠라코는."
취재는 스토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대로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갈까, 사쿠라코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용기를 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더 물을게. 날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난 솔직히... 네가 누군지 몰라."
히마와리는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쿠라코가 귀를 바짝 기울였다.
"아, 그러고보니 그동안 사쿠라코를 알던 사람처럼 대해버렸군요. 제가 정말 무례하게 굴었었네요. 죄송해요..."
"사과는 아무래도 괜찮으니까 설명 좀 해줘. 나 정말 혼란스럽거든."
빈 컵에서 얼음들이 쨍강,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호기롭게 대답하던 그 모습은 간데없이 히마와리는 입을 꾹 다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갑자기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그 모습은 사쿠라코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오늘 히마와리를 붙잡은 것이 잘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우리 학교에서 사쿠라코를 모르면 간첩 아닐까요? 이렇게 유명한데."
그 말은, 너무나도 쉽게 터져나왔다. 고민하던 표정에서 나올 대답이 아니다. 사쿠라코는 소파에서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드러누울 뻔했다. 천장이 사쿠라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헛웃음이 터졌다.
선배, 정말 저와 이 녀석 사이에 뭔가 필연적인게 있는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단백질같은 무언가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에선가 쿄코가 얄궂게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히마와리는 소파에 누워있다시피 한 사쿠라코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쿠라코는 눈을 감았다. 피곤함에 아득히 잠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기력을 회복하려면 히마와리에 대한 질문은 저기 멀리 던져놓아야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각한 대로 잘 되지는 않을 것 같은 이상한 마음이 꿈틀댔다.
>(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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