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마와리는, 어쩌면 자신이 한 줌의 먼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김 한번에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 작은 먼지. 본래 자신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히마와리를 태어나게 한 존재는, 히마와리가 어느정도 자랐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녀에게 하나의 형태를 주었다. 그는 히마와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따뜻한 빛 한 줌을 안겨주었다.
'너는 머지않아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란다. 언제나 이 한 줌의 빛처럼 살아가라. 어디에 있든 생명들을 품을 줄 아는 마음을 지녀라.'
히마와리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끊임없이 히마와리를 성장시켰다. 그 빛을 받았을 때부터 히마와리는 어느 방에 갇혀서 지냈다. 그녀는 수도없이 내면과 외면을 탈피하고, 새 것을 입었다. 정말 많이 고통스러웠다. 탈피를 할 날이 다가올 때면 그녀는 공간과 시간을 잊고 앓아누웠다. 깊은 잠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깨어나면, 그녀는 한 단계 성장해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탈피를 거쳐 히마와리의 외면과 내면은 단단해지고 넓어졌다. 어느 날 그 방을 나왔을 때, 그 존재는 히마와리 앞에서 태양처럼 웃었다. 그를 만족시켰으니 됐어. 히마와리는 수많은 날의 눈물을 묻었다. 히마와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그'였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히마와리는 또다른 세계를 알게 되었다.
"신기해요. 저 세상에서는 생물이 참 많아요. 모두 형태도 달라요."
그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히마와리를 말리지 않았다.
"이제 때가 되었구나."
히마와리는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 곳에 오기 위해 태어났을 것이다. 이 세상을 돌봐야 한다는 천사의 무거운 사명감은 히마와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지고 있었다. 이 세계에 내려오게 되는 자격이 있는지, 어떤 기준이 있는지는 히마와리도 잘 모른다. 다만, 그녀는 선택되었다. 머잖아 땅으로 내려온 히마와리는 학교라는 곳에 다니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자신이 왜 이 세계에 내려오게 되었는지, 히마와리를 태어나게 한 존재가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는 어느새 한 아이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시 히마와리를 찾아와서 중요한 한가지를 알려주었다.
"네가 미소지어 준 그 아이를 지키렴. 그게 너의 임무란다."
멋대로 당신을 알아버려서 미안해요. 멋대로 다가가서 미안해요. 성급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다시 만들어져도 당신이에요.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정답은 당신이었을지도 몰라요.
사쿠라코를 알면 알수록 히마와리는 점점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쿠라코에게 다가간 것은 큰 실수라는 것을, 며칠 전에야 알아버렸다.
뜨거운 기운이 얼굴을 떠뜨릴 것처럼 밀고 올라왔다. 히마와리는 눈을 천천히 떴다. 이마에 무언가가 얹어졌다. 시원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그녀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작고 다부진 손이 급하게 히마와리의 머리 위에 얹어있는 것을 내리눌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수건이 떨어지잖아."
"...사쿠라코...?"
히마와리의 방 안이었다. 그녀는 분명 공사장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방 안이다. 뇌를 억지로 가동시켜보았지만 금세 호흡이 흐트러지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사쿠라코가 히마와리의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려놓았다.
"기억 안나지?"
"....네....?"
"네가 쓰러지기 전에 그랬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두가지."
"두가지...?"
도대체 무슨 말인걸까. 그 목소리는 담담할 뿐이었다.
"첫째.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병원이나 경찰은 안된다. 둘째. 조금있으면 내가 쓰러질텐데 이후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히마와리가 피식 웃었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그래도 그 덕에 병원에 히마와리의 존재를 알릴 일이 생기지 않았다. 아마 병원에 가도 그녀는 아무런 진단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니까.
"집 앞까지는 멀쩡하게 걸어오더니, 역시 겉보기만 그랬구나?"
"제가... 멀쩡했어요...?"
"현관문 열기 직전에 그 두가지를 일러주더니, 문 열자마자 쓰러졌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옆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보게 해주세요.'
히마와리는 다시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녀는 조용히 하늘의 존재에게 읊조렸다. 아, 저는 깨달았어요. 이 아이를 진정으로 지켜주기 위해서는, 이 아이로부터 멀어져야한다는 것을요. 왜 그 중요한 것을 알려주지 않으셨나요? 왜 항상 저를 시련 속에 던져놓으시나요?
"너, 너 울어?!"
드디어, 히마와리가 보고싶어한 얼굴이 눈 앞에 나타났다. 사쿠라코가 동그란 눈으로 히마와리를 내려다보았다. 사쿠라코를 제대로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 모습마저도 차오르는 눈물이 눈 앞을 가로막았다. 눈물이 귀를 타고 흘러 히마와리의 얼굴 옆을 차갑게 적셨다.
"사쿠라코... 저... 이상하죠....?"
"응? 뭐가?"
"미안해요... 그럴 수 밖에 없던 사정이... 사쿠라코를 피할 수 밖에 없었던...."
울음이 목에 사무쳐 말조차도 막혔다. 히마와리는 갑자기 눈 앞이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쿠라코가 휴지로 히마와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아프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사쿠라코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너, 확실히 이상해. 안그래도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근데. 나머지 이야기는 차근차근 들을게. 일단은 좀 쉬어."
히마와리를 재우려는 듯이 사쿠라코의 손바닥이 히마와리의 가슴팍 위에서 토닥토닥,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눈물이 멎었다. 히마와리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눈을 붙였다.
눈을 떴을 때 몸은 가벼워져있었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팔의 상처도, 상처가 나기 전의 멀쩡한 피부로 돌아가있었다. 사쿠라코는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쪽지 하나 없다.
히마와리는 천천히 침대에서 벗어나 창문을 열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루? 이틀?
"너,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구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뒤를 돌아봤으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옆에서 말하는 듯이 생생한 목소리였다.
"난 위에 있어. 너의 바로 위에."
히마와리는 창문 밖으로 길게 목을 빼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붕 위에 누가 걸어앉아있는지, 맨 발바닥이 그녀의 눈 바로 앞에서 인사를 했다.
"누, 누, 누구세요?!"
"미래의 너."
"....네?"
그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다정하면서도, 두렵게 느껴졌다. 발바닥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 곁에는 짙은 검은 색의 무언가가 둥둥 떠다녔다. 토성의 고리처럼 목소리의 주인에게 꽉 묶인 채였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미래야. 내가 너였을 시절이 있었고, 넌 곧 내가 될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너를 태어나게 한 그 존재의 말씀, 절대 잊지 마. 넌 그 아이를 지켜야해. 어떤 형태로든."
태어나게 한 존재. 그 말이 히마와리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려주시지 않아. 몸소 깨닫고 성장해야 해. 그래야 네가 그 아이를 지킬 명분이 생기는거야. 그러니까 그를 원망하지 마."
"질문이 있어요."
그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포기했다. 알게 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저는 그 방에서 자라면서 탈피를 다 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직... 고통이 남아있는 거죠?"
낯선 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여전히 히마와리에게는 맨 발바닥만 보이는 상태로.
"나머지 한 단계. 그 단계를 지내는 동안 절대 그 아이에게서 도움을 받지 마. 너 혼자서 견뎌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정말 나처럼 될수도 있어."
그 몸이 점점 위로 향했다.
"기생천사가 되는건 피해. 무슨 일이 있어도."
한순간 하얀 빛이 히마와리의 눈을 찔렀다. 이어 지구상에서 보지 못한 이상한 형태의 빛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더니, 정신을 간신히 차렸을 때는 다시 지상이었다. 발바닥은 사라지고 없었다. 짙은 어둠도 물러난 상태였다.
사실 히마와리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이상한 고통이 지속되던 이틀째에 알게 되었다. 지상으로 파견된 천사들은 나머지 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것은 몸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이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인간의 도움을 받아 극복한다면, 기생천사로 낙인찍혀 인간도 천사도 아닌 영혼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세계를 떠돌게 된다. 또한, 기생천사의 가호를 받던 생물은 불행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불행한 시기를 보내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불행한 만큼 인간들이 내뿜는 분노로 인해 결국 기생천사는 인간에게 악마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기생천사..."
히마와리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천천히 윗 옷을 벗고, 윗속옷을 풀어 내렸다. 날갯죽지에 전날의 고통이 생생히 새겨졌다.
마지막 시련, 그것은... 날개가 돋는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다.
"오오무로 사쿠라코."
그 이름을 조용히 곱씹었다. 아마 이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사쿠라코에게 멋대로 들이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히마와리는 그냥 그 아이에게 이끌렸다. 이제와서 멀어져야한다니, 가혹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이 또한 그의 뜻이라면.
샤워를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고통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직 낙오될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모든 일상을 포기할수는 없다. 마지막 단추를 채웠을 때, 문득 두려움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 공부 잘하지?"
손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잠시 멈춘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사쿠라코를 밀어낼 수 있을까.'
이번엔 정답을 모르겠다.
>(6)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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