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향기가 났다. 늘 방에서 나던 쓰고 목이 막히던 냄새와는 다른. 덕분에 머릿속이 상쾌해졌는지, 눈이 절로 떠졌다. 찌뿌둥한 것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어깨도 더이상 욱신거리지 않았다. 천장이 똑바로 히마와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또다시 쓰러진 것일까.
"몸... 좀 괜찮아?"
낯선 향기만큼 낯선 목소리였다. 히마와리는 발작을 일으키듯 일어났다. 사쿠라코는 어디가고, 긴 금발의 여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옆에 앉아있었다.
"누, 누, 누구세요...?"
"아, 난 이상한 사람 아니야. 사쿠라코의 선배인데...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
놀라지 않아도 된다는 건 누구 기준일까. 사쿠라코의 선배라는 사람은 히마와리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수건을 집어들었다.
"잠깐, 빨아올게. 아직 열이 있어서 그대로 움직이는 건 무리일거야."
여자가 일어났다. 작은 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일었다. 순간, 히마와리는 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기침을 했다. 코를 틀어막고 사레가 들린 듯이, 아니, 목에 먼지라도 낀 듯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간질이고 있었다.
"콜록! 컥! 허억!"
"왜, 왜그래? 물 줄까?!"
여자가 허둥대며 먼지를 일으킬수록 히마와리의 기침은 점점 심해졌다. 몇번 쓰러지더니 작은 먼지에도 반응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나 싶었지만, 곧 이상한 기분이 울컥 솟아오르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콜록.... 흑..... 흐윽...."
처음 보는 사람에게 기침하면서 눈물 콧물 다 짜내는 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에 창피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여자는 히마와리가 기침을 너무 많이 해서 눈물이 나는 줄 알고 서둘러 물을 가지러 나갔다.
그러나 단순히 먼지 때문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알 수 없는 것이 마음 깊숙한 곳을 아프게 간질이고 있었다. 여자가 일어나는 순간 파도처럼 커다란 파동같은 것이 끼쳐왔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 파동이 더욱 확실하게 다가왔다. 이건, 평범한 인간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파동이 아니다. 처음 느껴보는 것이지만, 분명 이건 누군가의 한이 섞여있는 무시무시한 의식... 먹물과도 같은 지독한 색이 느껴졌다.
평범한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
'그렇다면 혹시, 저 사람도...?'
히마와리가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을 때, 여자가 돌아왔다.
"여, 여기 물 가져왔어! 얼른 마셔!"
여자가 다시 바람을 일으키며 히마와리의 옆에 앉았다. 히마와리는 최대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안간 힘을 쓰면서 물을 마셨다. 단순한 기침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물을 먹어서는 기침이 낫지 않았다. 여자는 안절부절하며 일어났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히마와리는 결국 두 팔을 들어 여자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제발.... 콜록... 앉아 계세요! 움직이지 마시... 마시고!"
정적이 흘렀다. 여자는 히마와리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조금 겁먹은 표정이었다. 너무 심했을까... 하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천사에 대한 일을 언급할 수도 없다. 조금 있자, 눈물과 기침이 잦아들었다. 히마와리는 간신히 한숨을 몰아쉬며 소매로 눈가를 닦을 수 있었다.
"괜찮아진거야?"
"예... 뭐..."
"다행이다!"
여자가 다시 꿈틀거리려다가, 히마와리 표정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며 몸에 힘을 주었다. 이럴 때 사쿠라코는 어딜 간걸까. 왜 옆에 이 사람을 데려다 놨을까.
"어... 우리 구면인데. 나 기억 안나?"
"...네?"
히마와리가 조금 진정된 모습을 보이자, 여자가 나긋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무리 기억을 짚어봐도 만난 적이 없는...
"아!"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 때, 사쿠라코와 히마와리가 처음으로 동네 카페에서 만난 날, 사쿠라코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자였다. 그 때 사쿠라코는 이 선배라는 여자와 나가는 듯 하더니 홀로 앉아있는 히마와리에게 다시 돌아왔었다.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이라 몰라본 것이었다.
"토시노 쿄코라고 해. 이제야 인사하네. 사쿠라코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아, 그리고 여긴 사쿠라코 방이니까 안심해."
무슨 이야기를 했을 지는 눈에 훤했기에 히마와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아마 히마와리가 쫓아다닌 것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사쿠라코를... 좋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야?"
히마와리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시다가 사레가 들릴 뻔했다. 아무래도 전국에 그간 있었던 일이 퍼져나가려는 모양이다.
"다 지난 일이에요. 제가 너무 일방적으로 그랬으니까, 놓아주는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음... 확실히, 사쿠라코가 많이 곤란해하긴 했어."
히마와리가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게 당연하다.
"그런데, 기분 나쁜것 같지는 않았어. 나중에 너랑 만나야한다고 안달이었으니까."
한숨이 쏙 들어갔다.
'내가 멋대로 사쿠라코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사쿠라코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결국 또 멋대로 행동해버렸다. 한 사람을 위해 행복과 상처를 동시에 주는 일이 천사가 하는 일이던가. 나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나았으면 좋겠어. 길거리에서 그렇게 쓰러지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아... 혹시 길거리에서부터..."
"사쿠라코가 널 힘들게 업고 있길래 같이 부축해서 들어온거야."
사쿠라코는 히마와리를 한쪽 팔로 간신히 부축하며 쿄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번째로 쓰러졌을 때는 집까지 와서 쓰러졌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길거리에서 쓰러졌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힘이 모두 빠진 사람의 무게를 견디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기에, 연락을 받고 뛰어온 쿄코와 함께 사쿠라코의 집으로 옮긴 것이었다.
쿄코가 바람이 일어나지 않게 매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난 이만 가볼게. 사쿠라코가 약 사오는 동안 돌봐달라고 해서 있던건데, 이제 몸도 괜찮아보이고 나도 일이 있어서... 미안."
"아, 아니예요. 고맙습니다."
"응. 아, 그리고, 혹시..."
쿄코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도 생각하고 있는지, 입술이 연신 씰룩댔다. 히마와리는 천천히 일어나 쿄코와 마주보았다. 히마와리가 일어나자, 쿄코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를 피했다.
"저기... 우리 그 때 카페에서 한 번 눈 마주치고 이후엔 만난 적 없었지?"
"...네?"
"아, 별건 아니고 그냥, 널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나 해서..."
쿄코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죄 지은 사람처럼 히마와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씀해보세요."
"...데자뷰라는게 있잖아. 요즘 그게 너무 자주 찾아오는 것 같아서..."
정적. 히마와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쿄코는 한동안 멍하게, 한편으로는 그리운 듯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급하게 한걸음 물러났다.
"아! 미안해. 뜬금없이 이상한 말만 늘어놓았네. 아, 저, 이만 가볼게."
쿄코는 거의 비틀거리다시피 방을 벗어났다. 히마와리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연이 깊은 사람은 아닌데, 묘한 기분이다. 쿄코와 히마와리는 동시에 서로에게 기묘한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저 사람은 그렇다면 역시 내가 생각하는 존재가 맞나?'
아니, 그렇다기에는 그런 이상한 파동 이외에는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 사람도 천사라면, 내 집에서 마주했던 그 발바닥만 보이던 천사와 비슷한 느낌이 나야 해.'
히마와리가 느끼기에, 쿄코의 몸에서는 발 끝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온통 한으로 뭉친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본인 것은 아니다. 겉을 감싸고 있는 자연스러운 밝은 에너지와, 안에서 흘러넘치다 못해 폭발하려고 하는 부자연스러운 절망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서 옮겨왔다... 묻었다는 것이 더 적절할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파동 끝에는 쓴 피 냄새가 났다. 절대 맡고 싶지 않은 절망의 피 냄새.
"히마와리, 괜찮아?"
사쿠라코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밖에서 훅 끼쳐들어오는 바람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왜 앉아있어, 얼른 누워."
"괜찮아요. 토시노 선배가 잘 보살펴주셔서..."
사쿠라코가 히마와리 앞에 약을 쏟아내었다.
"일단 열 내리려고 열에 좋다는거 다 사왔거든. 하나씩 먹어보고 잘 안들으면 다른것도 먹어봐."
"고마워요..."
"아, 그리고 혹시 쿄코 선배랑 무슨 이야기 했어?"
히마와리는 약을 집어들다가 멈칫했다. 사쿠라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히마와리를 바라보았다.
"나가는 선배 표정이 많이 안좋아보여서.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사쿠라코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쿄코 선배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너를 만나는 일로 많이 망설일 때, 계속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너랑 만나보라고 등을 밀어줬어."
"....선배가요?"
"선배가 없었다면 우리는 쭉 서로 이상한 오해만 하고 있었을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선배 만나면 꼭 잘 대해드려."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저 선배는 누구인가요? 언제부터 알던 사이인가요? 왜 우리의 일에 굳이 매번 도움을 주었을까요?
"네, 그럴게요."
그러나 모든 말을 약과 함께 삼켰다. 사쿠라코가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만일 쿄코가 천사라면 사쿠라코와 쿄코는 히마와리에 대해 진작에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대답을 못들었는데."
어쩐지 떨리는 것 같은 그 목소리에 심각한 생각들이 단번에 물러갔다. 히마와리는 새삼 사쿠라코를 건너다보았다. 사쿠라코는 굳은 표정으로 히마와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합, 보러 와줄래?"
"...사쿠라코, 저는..."
"너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때는 언제고,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사쿠라코의 두 손이 서로를 꼭 껴안았다.
"이번만큼은 나를 지켜봐줬으면 좋겠어."
아, 저 표정. 두려우면서도 간절히 바라는, 확고한 표정. 히마와리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금 오기가 생기는 것도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사쿠라코만의 천사로서, 사쿠라코를 완벽하게 지켜봐주자. 앞으로 멀어질 일에 후회가 없도록.
쿄코는 집에 돌아와서 그대로 이불 속에 몸을 뉘였다.
언제부턴가 저녁 시간대만 되면 마음이 조마조마해져서 자주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급한 일도 없는데...
이불에 몸을 묻고 있으니 몽롱해졌다. 이렇게 이불 속에 누워있다보면 금세 잠들어버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다. 신기한 건, 잘 때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마치 필름이 끊기듯이 양말 한쪽이 벗겨지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 때가 있다.
쿄코는 히마와리와 사쿠라코의 일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히마와리를 재회했을 때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 히마와리에게서는 익숙한 느낌이 났다. 집에 무언가 위험한 걸 두고 온 것 같은 느낌. 집으로 달려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 모든 것이 히마와리에게서 느껴졌다.
또한, 히마와리의 일로 계속해서 신경을 쓰는 사쿠라코를 볼 때마다 마치, 그 안에 쿄코 자신이 찾고 있는 답이 있는 듯이 그녀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쿄코는 사쿠라코가 히마와리를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하고 오해를 풀길 바랐다.
그렇게 하면 이런 영문모르는 생활도 끝날거라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다시 새까만 밤이다. 잠 잘 시간이다. 쿄코는 오늘도, 꿈을 꾸길 바라며 잠자리에 든다.
>(8)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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